제20화: 악어 입

by 남킹


우리는 정오 무렵, 마침내 목적지인 섬의 남쪽 끝 절벽에 도착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투명했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다. 지금 우리가 위태롭게 서 있는 발끝 아래로는, 그 깊이를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아찔한 붉은색 사암 절벽이 수직으로 까마득하게,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펼쳐져 있었다. 오래된 지도에서 보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원주민들이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 <악어 입>이라고 부르는 곳. 공식 명칭은 <데론리(Deronli) 절벽>. 현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장엄하고 비현실적인, 신들의 정원과 같은 선경(仙境)이었다.

"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깊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나탈리아?" 사리는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풍경에 잠시 말을 잃은 듯,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탈리아를 슬쩍 바라보며 난감함과 경외감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음정 높게 들렸다. 하지만 아내는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오직 절벽 아래의 깊은 심연만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과 함께 어떤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강한 바람을 타고, 거대한 익룡처럼 생긴 <천둥새> 무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마치 심연 속으로 빨려들 듯이 아찔한 속도로 계곡 아래로 사라져 갔다. 그 순간, 나는 가우타가 비밀리에 건네주었던, 동물의 가죽처럼 보이는 낡고 성긴 천 조각에 그려진 희미한 지도를 떠올렸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다가, 섬의 최남단에 이르러 마치 거대한 용이 하늘로 솟구치듯 급격하게 솟아오른 절벽 지형. 그리고 그 절벽 위에는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낙서처럼 보였지만, 분명 거대한 새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지도에는 고대 문자로 이 섬의 이름이 <뵈괼추탄(Vogelzustan)>이라고 적혀 있었다. ‘큰 새들의 땅’이라는 의미였다.

잠시 후, 뒤처졌던 본진 일행이 헉헉거리며 도착했다. 세 명의 사피엔티아 전투 대원과 네 명의 현지 원주민 가이드였다. 그들은 힘겨워 보이는 열한 마리의 <라마>와, 머리 모양이 망치처럼 기괴하게 생긴 세 마리의 <망치 머리 박쥐>를 데리고 왔다. 라마는 이번 탐사에 필요한 각종 식량과 텐트, 그리고 등반 장비를 운반하기 위한 필수적인 운송 수단이었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비상식량이 될 수도 있었다. 망치 머리 박쥐는 야간 경비용으로 특별히 훈련된 동물이었다. 이 섬은 단지 새만 거대한 것이 아니었다. 밤이 되면 사람의 팔뚝만 한 크기의 <자이언트 모기> 떼와 길이가 1미터가 넘는 맹독성 <살인 지네>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자이언트 모기는 한 번의 흡혈로 성인 남성의 피 1리터 이상을 빨아들였고, 치사율 또한 80%가 넘는다고 했다.

“자, 여러분!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즉시 하강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각 조는 최소 두 군데 이상의 안전한 확보 지점을 찾아 로프를 설치해주십시오.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

사리의 냉정하고 단호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원들과 원주민들은 이마에 흐르는 땀도 제대로 식히기 전에, 무거운 몸을 다시 이끌고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의 시뮬레이션과 예행연습을 통해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다. 이 모든 훈련은 치밀하고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인 사리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그는 무엇이든 완벽을 추구했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강한 승부욕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항상 얼음처럼 차갑고 진지하여 여간해서는 웃는 법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팀원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성격은 어쩌면 그의 불행했던 출생의 고통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리는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건강하게 태어난 형과 달리, 그는 태어날 때부터 치명적인 <거대세포 바이러스(Cytomegalovirus)>에 감염된 상태였다. 정상아보다 훨씬 작은 머리 크기, 황달 기운이 도는 노란 피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간, 그리고 심각한 폐 염증. 담당 의사는 그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10%도 되지 않는다고 비관적으로 진단했다. 하지만 그는 차가운 인큐베이터 안에서, 수많은 기계에 의존한 채 석 달이라는 시간을 기적적으로 버텨냈다. 그 시간 동안, 그의 쌍둥이 형은 어머니의 따뜻한 젖과 무한한 사랑을 독차지하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린 사리는 그저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따뜻해야 할 어머니의 흐릿한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가쁘고 고통스러운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절벽 가장자리에 단단히 뿌리내린 두 개의 거대한 나무 밑동에 굵은 등반용 로프가 단단히 묶이고, 그 끝이 아득한 절벽 아래로 던져졌다. 하강 루트를 신중하게 살핀 사리는 로프를 단단히 움켜쥔 왼손을 하강기 앞에 고정시키고, 오른손은 제동을 위해 옆구리에 위치시킨 다음,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서서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고 침착했다. 뒤이어 나머지 대원들과 원주민들도 숙련된 솜씨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각자 최소한의 식량과 물, 그리고 지하 세계 주민들과의 만남을 위한 제례 의식에 사용할 몇 가지 물건만을 넣은 작은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탈리아와 내가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며 천천히 내려갔다. 절벽 위에 남겨진 라마와 박쥐들은 이제 자신들의 운명에 맡겨질 터였다. 운이 좋다면 얼마 뒤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 구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전에 굶주린 퓨마나 다른 맹수들에게 잡아먹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 폭포수 바로 옆의 작은 바위 턱에 무사히 도착한 나는, 비로소 위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하고 압도적인 절벽의 크기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원주민들이 이곳을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에서는 에메랄드빛의 영롱한 물줄기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단 폭처럼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다섯 개의 거대한 폭포가 서로 합쳐지고 다시 갈라지면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물안개로 인해, 찬란한 쌍무지개가 마치 거대한 병풍처럼 눈앞에 황홀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이곳이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하면서도 두려운 간극이 놓여 있는 곳이라고 느꼈다.

일행은 잠시 하강을 멈추고,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자연의 경이로움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투명하면서도 강렬한 바람이 마치 무쇠 소리를 내며 협곡 사이를 휘몰아쳤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곳이 원주민들에게는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오백여 년 전, 이 미지의 섬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던 <가브리엘 튜더>라는 이름의 선교사 신부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곳 섬 주민들은 매년 봄,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존재, 즉 태어난 지 돌이 갓 지난 건강한 아기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즉, 이 ‘악어 입’ 절벽 아래로 갓난아기를 산 채로 내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이 절벽 위에서 손에 잡힐 듯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떠 있는 불길한 반달 모양의 활화산 섬, <미이샤(Miisha)>의 분노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3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이 <마가스 군도(Magas Archipelago)>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인도에서 과거 비슷한 종류의 인신 공양 의식이 행해졌다고 전해진다. 각 섬의 부족들은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신에게 바쳤다. 어떤 섬에서는 아직 월경을 경험하지 않은 순결한 처녀를, 또 어떤 섬에서는 용맹하게 자라날 첫 사내아이를 제물로 바쳤다.

각 마을에서 정한 제삿날이 다가오면, 그곳의 제사장들은 작은 배를 타고 이곳 데론리 절벽 아래로 찾아와 엄숙한 의식을 행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제물을 화산 신에게 바치곤 했다. 어떤 부족은 넓고 두꺼운 바나나 잎으로 아기를 둘둘 말아 폭포 가장자리 바위 위에 조용히 놓아두었고, 어떤 부족은 절벽 중간에 있는 거대한 천둥새 둥지에 몰래 아이를 넣어 두기도 했으며, 또 어떤 부족은 커다란 풍선에 아기를 매달아 바람이 화산섬 방향으로 불 때 하늘로 날려 보내기도 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주로 절벽 곳곳에 숨겨진 작은 동굴 안에 약간의 음식과 물과 함께 가두어 두는 방식으로 바쳐졌다. 아무튼 재물을 바치는 방식은 섬마다 부족마다 매우 다양했지만, 수백 년간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공통점은 바로 제물은 반드시 ‘산 채로’ 바쳐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제물을 바치고 며칠이 지나면, 마치 신이 제물을 거두어 가기라도 한 듯, 그 제물은 언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절벽 아래에는 수백 년 동안 바쳐진 수많은 아기와 처녀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단 한 구의 시체는커녕, 심지어 작은 뼛조각 하나조차 발견된 적이 없었다.

한때, 이웃한 <할마서> 섬과 <그루던> 섬 주민들 간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으로 인해 반년 가까이 제물 의식을 행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바로 그 해, 미이샤 화산이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폭발을 일으켜 수천 명의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하는 끔찍한 재앙이 발생했다. 이것을 신의 노여움으로 받아들인 원주민들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마겟돈 대전쟁 이후 이 섬을 찾아온 한 이름 모를 선교사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인신 공양 의식은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유일신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미이샤 화산은 더 이상 폭발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민들에게 공언하였으며, 놀랍게도 정말로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화산섬은 단 한 번도 폭발하지 않았다.

“자, 이제 그만 감상하고 서둘러 출발합시다!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지하 세계로 통하는 입구에 도착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리의 냉정한 재촉에,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벽 아래는 전형적인 열대 정글 숲이었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삼림과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대가 공존했고, 바닥은 썩은 낙엽과 검은 흙, 그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로 뒤덮여 있었다. 일행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암묵적인 걱정과 긴장감이 팽배했다. 시원한 바람은 저 높은 나무들의 꼭대기 부근에서만 살랑거릴 뿐, 땅에 가까운 공기는 무덥고 습했다. 여기저기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상한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일행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정글도(Machete)로 앞을 가로막는 무성한 덩굴과 나뭇잎들을 베어내며, 희미하게 남아 있는 숲길의 흔적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30분쯤 힘겹게 나아갔을 때, 조그마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는 오래된 나무 둥치처럼 보이는 것들이 몇 개 널려 있었고, 나무들 사이에는 낡아 빠진 해먹 텐트 하나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롭게 묶인 채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텐트 바로 위 나뭇가지에는 길이가 1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화려한 색깔의 독사가 꿈틀거리며 몸을 똬리 튼 채, 침입자들을 차갑게 굽어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절대로 땅바닥에 텐트를 치면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수십 마리의 살인 지네 떼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원주민 중 한 명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외치자, 동행한 안내인이 즉시 통역해주었다.

“물론 불편하고 위험하지만, 우리가 굳이 이 험난한 육로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안전 때문입니다.” 사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나탈리아를 쳐다보고는 지긋이 웃어 보였다. 그의 발치 바로 옆으로 선명한 붉은색의 작은 독개구리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사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우선, 비행기를 이용한 하늘길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신의 땅 상공뿐만 아니라, 이제는 태양계 주요 항로 곳곳에 파더스의 최첨단 감시 드론 수백, 수천 대가 거미줄처럼 깔려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중에는 강력한 레이저 무기나 미사일을 장착한 살상용 드론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차량을 이용한 지상 통로 이동은 어쩌면 하늘길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마겟돈 대전쟁 이후, 강력한 방사능에 피폭된 채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이 있었는데, 문제는 방사능에 오랫동안 노출된 이들의 후손들 중에서 심각한 유전적 돌연변이를 보이는 개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몇 세대를 거치며 도태되거나 사라졌지만, 오히려 혹독한 환경에 더 잘 적응하여 번성하게 된, 무섭도록 강력하고 폐쇄적이며 폭력적인 새로운 변종 인류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이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몇몇 대륙의 폐허 지역과 외딴 섬들을 빠르게 정복하며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들은 외부인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증오하여, 자신들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자는 누구든 가차 없이 공격하여 잔인하게 죽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이커(Psyker)>라고 불렀다. 땅을 밟는 순간, 그들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끔찍한 시체로 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과의 첫 번째 대규모 충돌은 바로 남극의 빙하 왕국에서 벌어졌다.

남극의 두꺼운 빙하 아래 건설된 <빙하 왕국>은 종신 지도자인 <하메스>를 중심으로 매우 효율적이고 강력한 군사 국가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지독하게 춥고 척박한 환경에서 비롯된 태생적인 국가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언젠가는 따뜻하고 풍요로운 북쪽의 푸른 땅을 얻기 위한 끊임없는 <북진 정책>이었다. 그리고 최근 10년 동안에는 남아프리카 대륙 남단과 그 근처의 섬들, 그리고 남아메리카 대륙 일부 지역까지 성공적으로 점령하면서 그 세력을 점차 무섭게 넓혀가는 중이었다.

빙하 왕국 군대와 사이커 무리 간의 교전은 초기에는 빙하 왕국 측의 상당한 어려움과 피해를 동반했지만, 이후 효율적인 신무기와 전술을 도입하면서 최근 몇 차례의 대규모 전투에서는 오히려 대승을 거두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아직은 점령한 땅이 턱없이 부족하고 불안정했지만, 적어도 대륙의 흉측한 돌연변이들을 몰아내고 북진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아마겟돈 대전쟁 이후 거의 모든 통로가 폐쇄된 것으로 알려졌던, <지하 세계>로 연결된 가장 가깝고도 은밀한 통로입니다.” 사리는 다시 한번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힘주어 말을 이었다. “이 마가스 군도의 섬들은 지리적으로 거대한 대륙과 매우 가깝고, 지금도 여전히 활발한 지각 활동으로 인해 섬 지하에는 무수하게 많은 용암 동굴들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곳입니다. 만약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이번에는 반드시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인류가 땅속 깊은 곳에 또 다른 문명을 건설하고 살아가기 시작한 역사는 어쩌면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실질적인 지하 세계 문명의 역사는 고대 로마 시대의 <카타콤(Catacomb)>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카타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잔혹한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지하 피신처이자 순교자들의 묘지였다. 로마의 박해가 수백 년간 계속되는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둡고 축축한 지하 무덤 속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그 끔찍한 탄압은 무려 300년 가까이나 지속되었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마침내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말이다.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공인된 이후에도, 신도들 중 일부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계속해서 지하 세계에 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더 깊고 더 넓은 곳을 향해 끝없이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기독교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수자에 대한 박해는 항상 존재했다. 그리고 박해받는 도망자들은 언제나 외진 오지나 깊은 숲속, 혹은 어두운 동굴 속으로 스며들어 숨어 살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어느 시점엔가, 지상의 박해를 피해 땅속으로 숨어든 다양한 종교와 인종의 사람들이 지하의 어느 광활한 지점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그저 아득한 신화나 전설, 혹은 황당한 가설 따위로만 치부되고 있는 그곳, <애틀랜티스(Atlantis)>라고 불리는 지하 세계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수많은 지하인들이 나름의 문명을 이루고 공존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과 자원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인간은 그곳에서도 지상 세계와 마찬가지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하지만 지하 세계에는 치명적이고도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외부 세계와의 완전한 단절로 인한 <고립 사회>라는 점이었다. 즉, 제한된 인구 풀 안에서 근친상간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근친상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 반복되게 되면, 유전학적으로 심각한 열성 유전병의 발현 위험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기 지하 세계의 일부 부족들은 지상의 이방인들을 몰래 납치하거나 유인하여 자신들의 사회로 편입시키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마가스 군도의 지하인들은 좀 더 교묘하고 악랄한 술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바로 미신을 이용한 협박이었다.

지하인들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뜨거운 <지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즉, 그들은 세대를 거듭하며, 일반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위험천만한 지하의 마그마를 안전하게 통제하고 이용하는 고도의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기술이 순진한 지상의 원주민들을 협박하고 통제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지상의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만약 매년 정해진 날짜에 산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화산 신 미이샤가 크게 노여워하여 섬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는 끔찍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가끔씩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하여 미이샤 화산에서 약간의 연기나 용암을 분출시키면, 겁에 질린 원주민들은 앞다투어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자식들을 산 제물로 내놓았다. 그렇게 해서 매년 수십 명의 어린 처녀와 사내아이들이 지하 세계로 ‘공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마겟돈 대전쟁 이전의 이야기였다.

대멸종과 대전쟁으로 인해 지상 세계가 폐허가 되자, 살아남기 위해 너무나 많은 피난민들이 지하 세계로 불청객처럼 밀려들어 오게 된 것이다. 이제 지하 문명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고립된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전쟁과 환경 오염으로부터 안전한,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다 왔습니다! 여기가 바로 입구입니다!” 앞서서 길을 안내하던 나탈리아가 뒤따라오던 사리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정글 속의 또 다른 작은 공터였다. 공터 중앙에는 기이하고도 섬뜩한 문양으로 장식된 돌 조각상들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조각상들의 얼굴은 마치 파충류처럼 길고 날카로운 도마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몸은 뜻밖에도 풍만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깨 부분은 마치 단단한 갑옷을 두른 듯 넓고 각져 있었으나, 허리 아랫부분은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 삼각 팬티처럼 보이는 작은 천 조각 하나만 착용한 듯한 기묘한 모습이었다.

“제랴두나(Jeryaduna)….” 아내는 내 곁으로 다가오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지하인들이 순진한 원주민들을 협박하고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여신상들이에요. 이 지역의 유일한 화산섬인 미이샤는 남성 신으로 숭배되고, 그에게는 여러 명의 제랴두나, 즉 여성 신들을 아내로 두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죠. 그래서 매년 지상에서 바쳐지는 어린 처녀들이 새로운 제랴두나가 되고, 함께 바쳐지는 어린 사내아이들이 그들에게서 난 자식들이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수백 년 동안 속여왔던 거예요.”

원주민들은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등에 지고 온 제사용 도구들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이어 스틸을 이용하여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그들만의 언어로 된 주문을 외우며 엄숙하게 제사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나탈리아는 사리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리 님, 여기서부터는 우리 셋만 갈 수 있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이곳은 신성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죠. 그들은 이곳을 <카스툴퀴에(Kastulquie)>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원주민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아내와 나, 그리고 사리, 이렇게 셋만이 다시 미지의 길을 나섰다. 숲은 이전보다 더욱 깊고 울창해졌고,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거의 사라진 채 희미한 짐승의 발자국 같은 흔적만이 간신히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30여 분을 더 힘겹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숲 속 깊숙한 곳에 숨겨진, 신비로운 에메랄드빛의 작은 호수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 호수에는 수많은 <물의 꽃>, 즉 아름다운 연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그리고 더욱 신기한 것은, 호수 중앙 부근의 물이 마치 온천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그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넋을 잃고 지켜보았다.

이윽고 아내는 등에 멘 배낭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미리 준비해둔 스노클링 마스크와 소형 산소통 두 개를 꺼내어, 그중 하나를 사리에게 건네주었다.

“저건 사실 물이 끓는 게 아니에요.” 나탈리아가 호수 중앙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건 바로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공기 방울들이에요. 우리는 지금부터 저 공기 방울이 올라오는 곳을 따라, 지하 세계로 이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끝없이 내려갈 것입니다. 릴리안 나리 님의 고문서 기록에 의하면, 이곳이 현재까지 알려진 루트 중 지하 도시로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이라고 합니다. 내려가는 동안, 최대한 숨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쉬시기를 바랍니다. 물살이 거셀 수도 있습니다.” 나탈리아는 사리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깊은 슬픔과 사랑, 그리고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또다시 시작된, 찰나처럼 짧은 만남과 영겁처럼 느껴질 긴 이별. 나는 그녀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삶의 뿌리이자, 내가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였다. 아내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던 지난날들의 혼란과 고통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다시 한번 내 눈앞에 밀려와 부딪혔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심장 소리만을 느끼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동안 사리는 이미 잠수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러자 아내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잠수복을 입기 시작했다. 그녀의 낡은 배낭만이 내 발치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기 직전에, 살짝 주름진 입가에 슬픈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뺨에는 이미 두 줄기 선명한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긴 속눈썹을 천천히 끔뻑거렸다. 마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아픔의 기슭 사이를 힘겹게 허우적거리는 듯한 애처로운 눈짓 같았다. 매번 이별을 겪지만, 이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은 마치 살갗에 파고든 가시처럼, 시간이 흘러도 결코 무뎌지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는, 사리를 따라 천천히 에메랄드빛 호수 속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연꽃 사이를 부드럽게 헤집으며 호수의 중앙, 공기 방울이 솟아오르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물속으로 완전히 잠기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게 힘껏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천천히 물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한동안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못한 채, 그녀가 사라진 물결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다시 연꽃의 연약한 잎 끝에서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구부정한 연 줄기 사이로, 물결 위에 비친 나의 흐릿한 그림자가 서글프게 다가왔다. 핏기 없이 쇠잔해진,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그리움의 형상. 나는 마침내 무거운 몸을 돌렸지만, 차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발이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굳어버렸다. 그때, 하늘에서 다시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명했던 바람은 어느새 차갑고 거세져, 숲의 나무들을 뒤흔들며 울부짖었다. 성긴 천으로 만들어진 나의 낡은 옷이 바람에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그렇게 나의 길고 외로운 그리움은 매번 이렇게 차가운 비가 되어 내렸다. 이마와 얼굴, 그리고 어깨 위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나는 그저 따스하다고, 그녀의 마지막 온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나는 마침내, 푸르게 멍든 상처처럼 보이는 좁고 미끄러운 숲길 위로, 천근만근 무거워진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기 시작했다.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발치에 미련처럼 쌓이는 축축한 낙엽들을 떨쳐내지 못했다. 나는 그저… 나의 아내 나탈리아에게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위험한 운명과, 그녀가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질 나에 대한 걱정들.

‘나탈리아… 나의 사랑… 저는 아직… 아직 당신을 이렇게 보낼 수 없습니다.’

비는 더욱더 거세게 내렸다. 하지만 나의 혓바닥은 갈증으로 바싹 타들어 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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