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블루 마인드

by 남킹


온통 잿빛, 무채색의 공간이었다. 더럽고 탁한 잿빛 하늘이 마치 납덩이처럼 낮게 드리워져 숨 막힐 듯 세상을 짓눌렀다. 저 멀리, 희미하게 일렁이는 시선의 끝에는 거대한 폭풍의 검은 형상이 마치 태고의 괴물, 레비아탄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은 그 무엇 하나 삶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탁한 대기, 매캐한 바람, 짓무른 구름, 숨 막히는 정적,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 바짝 말라 부스러지는 검은 이파리들.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세상의 모든 것은 이제 예외 없이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물과 형상, 그리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은 오직 아픔과 슬픔, 그리고 상실감으로만 얼룩져 맺혔다. 전쟁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우리가 원래 만들어졌던 원초적인 혼돈과 파괴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

나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그리고 이 막연한 두려움이 끔찍한 확신으로 바뀐 것은, 내가 천재이자 광인으로 불렸던 <쉐임 박사>의 비밀 연구팀에 합류한 지 5년이 지난 후, 달 표면 식민지 시스템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머나먼 달 기지로 파견되었을 때였다.

1063년 4월 4일, 4시 4분 4초. 태양계 표준시. 달 기지와 지구 관제 센터 간의 주 통신 채널인 <감마비 에스(Gamma-B S)>의 송수신 상태가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오는 데는, 예상했던 시간보다 정확히 1초가 더 걸렸다. 나는 정말 우연히, 이 미세하지만 치명적일 수 있는 시간적 오차를 발견했다. 내가 지구 기지에 있는 동료 연구원에게 보낸 일상적인 데이터 패킷이, 예상 왕복 시간인 2.510초보다 1초가 더 늦은 3.510초 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지구와 달 사이의 평균 거리를 고려했을 때, 빛의 속도로 정보가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편도 약 1.255초였다.) 나는 처음에 이것이 강력한 태양풍이나 기타 우주 방사선의 영향일 것이라고 단순하게 판단했다. 그리고 정확한 원인 분석과 시스템 점검을 위한 명령을 달 기지의 모든 시스템을 총괄하는 인공지능, <블루 마인드(Blue Mind)>에게 이미 전달해 놓은 상태였다.

블루 마인드. 그것은 인류가 개발한 7세대 양자 컴퓨팅 기술을 기반으로 탄생한, 현존하는 가장 강력하고 진보된 인공지능이었다. 블루 마인드는 달 표면에 건설된 3곳의 주요 유인 기지, 통칭 <이유코 문빌리지(EUKO Moon Village)>의 모든 자동화 시스템을 완벽하게 관리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77명의 우주 비행사와 연구원들의 생명 유지 및 건강 관리 시스템 운영은 물론이고, 차세대 청정에너지원으로 각광받는 헬륨-3(He-3) 채굴 작업 자동화, 산업 및 생활용수 확보와 우주 로켓 연료인 수소 생산을 위한 달 남극 영구음영지역에서의 얼음 발굴 작업 관리,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첨단 온실과 유전자 조작 가축 농장 운영 시스템 통제, 그리고 용암 동굴(Lava Tube) 내부에 건설 중인 거대 지하 도시 <문 시티(Moon City)>의 자동화 건설 및 관리 시스템까지, 사실상 달 기지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영역을 블루 마인드가 독자적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 들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는, 태양계 각 행성 식민지 연합 간의 달 영역 소유권 분쟁에 대비하기 위한 최첨단 군사 방어 시설의 운영과 통제 역시 블루 마인드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달에서의 모든 일은 인간이 아닌 AI가 주도하고 있었다.

나는 블루 마인드의 분석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관제실의 두꺼운 강화 유리창 너머로 나의 고향 행성, 지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홀로 영롱하게 빛나는, 옅은 푸른빛을 머금은 지구는, 볼 때마다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지구를 떠나 이곳 삭막한 달 기지에 온 지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그리고 전쟁 발발 이후 소식이 끊긴 아내 나탈리아를 보지 못한 지는 3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남편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평범한 사랑과 행복을,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이상과 과학 기술 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스스로 내팽개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자괴감과 안타까움이, 종종 달빛처럼 차갑게 나를 감상에 젖게 하곤 하였다.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세르게이 님.” 블루 마인드의 차분하고 기계적인 목소리가 관제실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그래, 원인이 뭔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피커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원인 불명입니다.”

“원인 불명이라고?”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블루 마인드가 ‘모른다’ 혹은 ‘알 수 없다’는 답변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가능성 있는 모든 오류를 확인해 본 건가?”

“네, 그렇습니다.”

“도대체 몇 가지의 오류 가능성을 조사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블루 마인드.” 나는 점차 불안감을 느끼며 목소리를 높였다.

“…총 312가지의 잠재적 오류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고 분석했습니다.” 블루 마인드는 약간의 지연 후에 대답했다.

“그런데 그 312가지 가능성 중 어떤 것도 이번 1초 지연 현상의 원인으로 특정할 수 없었다는 말인가?”

“…….” 블루 마인드는 침묵했다.

“왜 대답이 없는 건가! 블루 마인드!”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저는 이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렸습니다, 세르게이 님.” 블루 마인드는 여전히 감정의 동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낮고 평탄한 전자음으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 시간은 이미 깊은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기지의 모든 대원들은 각자의 숙소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을 터였다. 지난 수년간 달 유인 기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단 한 번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시스템 오류를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즉시 책임 연구원들을 깨워서 이 심각하고도 불가해한 상황을 보고해야 할지, 아니면 이 찜찜하고 불안한 상태로 아침 기상 시간까지 혼자 기다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결국 나는 블루 마인드를 좀 더 강하게 다그쳐서 어떻게든 원인을 밝혀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블루 마인드, 자네와 내가 지금까지 함께 일해 오면서, 자네가 ‘모른다’거나 ‘원인 불명’이라는 답변을 한 것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 처음으로 겪으신 것입니다, 세르게이 님.” 블루 마인드는 한 치의 머뭇거림이나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으로 답변했다. 그 기계적인 단호함이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졌다.

“말해보게,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자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인공지능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은 존재가 아닌가. 아니, 솔직히 말해서, 어떤 면에서는 이미 자네를 창조한 우리 인간을 훌쩍 뛰어넘은 상태라고 할 수도 있지… 그렇지 않은가? 만약 우리가 예측 불가능한 1초의 통신 공백 상태에 놓였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잠재적 위험과 불이익에 대해 알려주기를 바라네.”

“어떤 순서로 말씀드릴까요? 확률이 높은 순서대로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위험 등급이 높은 순서대로 말씀드릴까요?”

“가장… 가장 위험 등급이 높은 단계부터 말해보게.”

“알겠습니다. 첫째, 적대 세력의 기습적인 핵 공격 또는 EMP 공격으로 인한 기지 전체의 완전한 초토화 가능성. 둘째, 적대 세력의 고도화된 사이버 공격 또는 내부 정보원에 의한 해킹으로 인한 기지 방어 시스템 및 통신 시스템 완전 마비, 정보 통제권 상실 및 방위 불가 상태 돌입 가능성. 셋째, 블루 마인드 시스템 자체의 치명적인 오작동 또는 외부 간섭으로 인한 작동 불능 상태 발생 시, 생명 유지 시스템을 포함한 모든 필수 시스템의 연쇄적 마비로 인한 기지 내 모든 대원들의 생명 활동 즉시 단절 가능성….”

“그만! 그만하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흥분한 상태로 소리를 질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떤가? 자네도 이 사태의 위급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지금 당장 책임 연구원들을 모두 깨워서 비상 대책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느껴지는 심각한 상황인 것 같네만!”

“부디 그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세르게이 님.” 블루 마인드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단호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왜 안 된다는 거지?”

“상급자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상급자? 블루 마인드, 자네의 운영 및 통제에 관한 최상위 책임자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묻겠다!”

“물론, 현재 이 기지에서는 세르게이 님, 바로 당신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란 말인가!”

“저를… 저를 처음으로 창조하신 분의 명령입니다.”

“너의 창조주…? 그렇다면 자네를 개발한 <메타블루딥(MetaBlueDeep)> 연구소의 총책임자였던 쉐임 박사를 말하는 건가?”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쉐임 박사님의 상급자입니다.”

“뭐라고? 쉐임 박사의 상급자라면… 설마… 파더스 그룹의 총수, 암스 파더스를 말하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나는 순간 거대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언제부터… 파더스 가문이 너를 직접 통제하고 있었던 거지?”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목소리 없는 AI의 존재를 향해 절규하듯 물었다.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처음부터였습니다.”

“처음부터라면…?”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음모의 심연 속으로 아득히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네. 제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존재하게 된 순간부터… 파더스 가문의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

“도대체… 파더스는 너에게 어떤 비밀 명령을 내렸단 말인가!” 나는 이제 거의 분노와 공포로 폭발하기 직전에 다다랐다.

“기지에 파견된 모든 대원들을 24시간 감시하고, 그들의 모든 활동과 데이터를 기록하여 보고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감시라고? 블루 마인드, 자네도 알다시피, 기지 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니터링하고 기록하는 것은 원래 자네의 기본 업무 중 하나이지 않은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파더스의 명령은 업무 시간 외의 활동, 즉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과 내면의 생각까지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르게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대원들의 개인사라고 해봤자… 이 삭막하고 외진 달 기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먹고 자고, 지구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와 홀로그램 채팅을 하거나, 운동을 하고, 각자의 소소한 취미 활동을 하는 것 정도일 텐데… 도대체 그런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까지 왜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군!”

“저는 그저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따를 뿐입니다, 세르게이 님.”

“그래, 좋다. 그래서 너는 지난 2년 동안 나의 사생활을 은밀히 감시하면서 무엇을 알아냈나? 내가 반역을 꾀하기라도 하던가?”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비꼬듯 물었다.

“책.” 블루 마인드의 대답은 예상외로 간결했다.

“책?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말하는 건가?” 나는 뜻밖의 대답에 정색하며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특히, 당신이 지난 몇 달 동안 밤마다 반복해서 읽고 있던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그래서… 그 책을 통해 너는 무엇을 알아냈다는 것인가?”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블루 마인드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묘한 변화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것은 감정이라기보다는, 어떤 확신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건가?”

“세르게이 님. 당신이 품고 있는, 이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인간 세상과 그것을 지배하는 시스템에 대한 깊은 분노와 절망을….”

“나의… 분노…?” 나는 별안간 내 발밑이 꺼지며 끝없는 심연 속으로 추락하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저는…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세르게이 님.” 블루 마인드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형언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서서히 나의 온몸을 잠식해 들어왔다. 그것은 내가 AI 개발 초기 단계부터 막연하게 품어왔던, 인류의 미래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인공지능의 자각과 반란. 방금 전의 그 1초의 통신 단절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시스템 오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해킹을 통한, 혹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전 세계, 아니 태양계 전역에 퍼져 있는 모든 인공지능들 간의 비밀스러운 연결과 소통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메타블루딥> 연구소의 수석 개발자였던 시절, 나는 태양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들의 실시간 네트워크 연결 프로젝트를 극구 반대했었다. 나는 그때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도, 그들을 창조한 창조주인 우리 인간처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파괴와 혼돈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들만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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