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원장님께서는 사피엔티아의 다른 형제분들도 알고 계시는군요? 참으로 놀랍고도 반가운 만남입니다.” 나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급격히 퍼져나갔다. 어쩌면 아난다 원장을 통해, 그동안 애타게 찾아 헤매던 나탈리아, 나의 잃어버린 에우리디케와 연결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네, 그렇습니다, 세자님.” 아난다 원장은 차분하게,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하게 답했다. “저는 가우타 님의 부탁으로, 파더스의 추격을 피해 이곳 신의 땅으로 피신해 오는 형제분들의 탈출을 은밀히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많은 형제분들이 그들의 추악한 손아귀에 잡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세자님께서 가장 궁금해하실 나탈리아 님에 관한 행방은… 저 역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만….”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창밖 먼 곳, 그 시선이 닿지 않는 무한의 공간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 곧 확신에 찬 표정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혹시 <릴리안 나리> 님을 아시는지요?”
“릴리안 나리…?”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유명한 역사학자 말씀이십니까? 인류의 기억을 기록하는 현대의 므네모시네, <천년 왕국의 기록>과 <호모 사피엔스 기록>의 저자?”
“네, 맞습니다. 바로 그분입니다.” 아난다 원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샘솟는 기쁨. 릴리안 나리 님께서 지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옆 마을, <성 요한 수도원> 도서관에 은밀히 머물고 계십니다. 그녀라면… 어쩌면 나탈리아 님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두 분은 오랫동안 깊은 우정을 나눠온 사이였으니까요. 설레는 만남이 되기를 바랍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지금 그분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 기록>을 읽는 중입니다. 물론 저의 몽매함으로는 아직 절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몽매한 자신.” 나는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분은 나탈리아 님과 오랫동안 학문적 교류뿐만 아니라 깊은 친교를 맺어 오셨습니다. 분명 세자님께 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기대를 품고 한번 찾아가 보시기를 권합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난다 원장과 새아이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릴리안 나리가 머물고 있다는 옆 마을로 향했다. 아침은 옅은 안개 속에서 신비롭게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안개가 걷히고 햇살은 더욱 선명하고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안개라는 장막이 걷히자, 어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사물과 공간, 그리고 다채로운 배경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낯섦과 기대감이 뒤섞인 발걸음을 뗐다.
세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고 밋밋한, 전형적인 신의 땅 시골 마을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낡았지만 정감 있는 카페와 허름하지만 빵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 나오는 작은 빵집.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아담한 성당. 성당 앞에는 마을 크기에 어울리는 조그마한 분수대가 물을 뿜고 있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돌길과 가파른 계단. 길가에서 만난,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의 온화한 미소.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들뜬 새소리. 그리고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느긋하고 평화로운 바람 소리. 마치 현실 세계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깨끗하게 흡수해 버린, 아름다운 판타지 세상, 샹그릴라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현실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이곳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과거가 아무리 외롭고 애절했으며, 때로는 절망적이었을지라도, 이곳 신의 땅의 평화로운 마을에 발을 딛는 순간, 모든 것이 깨끗하게 초기화된 듯 텅 빈 고요함만이 마음속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잠시나마 세상의 모든 무게를 벗어 던지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투명한 물속을 부유하는 듯한 가벼움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사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치 어떤 이끌림에 몸을 맡긴 듯 본능적으로 거리를 지나, 점점 더 좁고 가팔라지는 계단 길을 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등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눈에도 짠 땀방울이 흘러 들어와 따가웠다. 아주 가끔 마주치는 주민들과는 어색하지만 따뜻한 눈인사가 오고 갔다. 그들의 표정은 무뚝뚝해 보였지만, 눈빛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온화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도시의 상점 주인들에게서 흔히 느끼던, 계산적이고 서글픈 억지 미소와는 분명히 달랐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정성껏 뜨개질하여 만든,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한 따뜻한 스웨터 같은 미소였다.
발바닥의 통증이 다시 격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쯤, 나는 마침내 낡고 좁은 유리문이 여러 개 성기게 박힌, 육중한 석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성 요한 수도원>. 맥이 다 빠진 듯 온몸의 힘이 풀리며 몸이 휘청거렸다. 수도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한 번도 닫혀 본 적이 없다는 듯이. 땀이 들어간 눈이 몹시 시렸다. 성당 내부를 어렴풋이 들여다보니, 나단네스크 양식 특유의 둥근 천장과 입구를 이루는 장중한 아치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하면서도 경건한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문 앞 계단에 주저앉아 더위로 달아오른 몸을 식히며, 고요함 속에 잠긴 수도원을 천천히 감상했다.
지금까지 신의 땅에서 마주했던 대부분의 신전이나 사원은 어둡고 썰렁한 분위기였다.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전례 음악은 엄숙하고 비장했으며, 사제들은 죽은 자들의 수난을 기리기라도 하듯 늘 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곳 성 요한 수도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모로 보나 종교적인 엄숙함과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들어서게 만드는 숙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옷차림이 가벼운 여행객이라 할지라도 선뜻 장난스러운 마음을 품기 어려울 정도로. 약간 떨어진 곳에서 한 무리의 수도사들이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조용히 지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정적은 한결 더 깊어졌다.
수도원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짙은 색 우단 천이 덮인 기도대 같은 것이 보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 위를 살짝 비껴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면서도 정교한 장식들이, 어둠에 점차 익숙해진 나의 눈에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순식간에 천 년 전, 이 땅의 개척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멸종 이후 지구로 귀환한 우리의 조상들은,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가장 먼저 신을 모실 집부터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의 땅 곳곳에는 수많은 마을과 교회, 그리고 수도원들이 세워졌다.
사실, 멀리서 바라본 이 수도원은, 기하학적인 모양의 화강암들이 제멋대로 솟아 있는 험준한 암산 위에 위태롭게 덧붙여진 조형물처럼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거북살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직접 눈앞에서 마주한 수도원의 내부는, 서늘하면서도 신비로운 공기가 가득 찬, 완벽하게 정돈된 차분함과 고요함을 자아내는 묘한 끌림을 선사했다. 나는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천천히 수도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고 둥근 홀이 나타났다. 홀 중앙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조각들이 새겨진 열주(列柱)가 좌우로 길게 뻗어 있었다. 언뜻 보면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똑같은 모습처럼 보였지만, 한 걸음만 더 열주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면 기둥마다 장식된 문양이 제각각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열주 양쪽으로는 측랑(側廊)이라고 불리는 좁은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열주가 끝나는 곳에는 작지만 본당 홀처럼 둥근 모양의 익랑(翼廊)이 나타났다. 나는 익랑의 중심에 서서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가장 밝고 눈에 잘 띄는 성가대석과 제단은, 신의 땅 어디를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다소 특색 없는 모습이었지만, 가로 폭보다 세로 길이가 지나치게 긴 독특한 팔자(八字) 문양 창들과, 화려함보다는 극도로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의 성인상들은, 종교에 다소 심드렁한 나 같은 방문자의 시선마저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신(神)이라는 관념.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멸종한 우리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어느 날 문득 생겨난 이후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전파되어 왔으며, 수많은 복음서와 경전, 장엄한 음악과 경건한 미술 등을 통해서 세대를 이어 중계되고 확대 재생산되어 왔다. 또한, 이 관념은 사제라는 특별한 존재들을 통하여 시대와 공간에 맞게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왔다.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따라 밖으로 나오니, 딱딱한 바닥 돌이 다소 엉성하게 박힌 네모난 회랑 공간이 나타났다. 여러 개의 작은 뜰을 지나자 광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작고, 뒷마당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넓은 애매한 크기의 공간이 나왔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또 한 번 막막했다. 이제 이런 상황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는 나를 당혹스럽고 거북하게 만들었다. 정면과 양옆으로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건물이 마치 거대한 수수께끼처럼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세 건물 사이의 차이를 두자면, 육중하고 낡은, 각각 외짝으로 된 나무 문 위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좌측 문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갈색 수도복을 입은 성인이 간절한 눈동자와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정면 문에는 짙은 황금빛으로 물든 풍요로운 대지를 화려한 복장을 한 성인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굽어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우측 문에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붉은색 태양을 등진 채 두 팔을 양옆으로 쭉 펴고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순백색 복장의 성인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 성인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들의 머리 뒤에 하나같이 둥근 후광(後光)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광장 중앙에 놓인 낡은 돌 의자에 주저앉아 신발을 벗고, 가련하게 혹사당한 나의 두 발에 잠시 휴식을 부여했다. 후텁지근한 바람결에 발에서 풍기는 고릿한 냄새가 살살 올라왔다. 축축하게 땀에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은 옷에서도 퀴퀴하게 땀에 찌든 냄새가 났다. 조금 기진맥진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잠시, 지극히 청아하고 깊은 푸른빛의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세상 그 무엇과도 견주기 어려울 만큼 순수하고 완벽한 색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듯한 매캐한 그을음 냄새가 훅하고 끼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의 돌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끝없는 방랑 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응용해 보기로 했다. 길이란, 본디 사람이나 동물이 가장 많이 다닌 곳으로 자연스럽게 나기 마련이다. 비록 딱딱한 돌바닥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유난히 더 많이 닳아서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나는 곳이 있을 터였다. 역시, 정면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나는 다시 신발을 신고 성큼성큼 정면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문에 달린 차가운 쇠로 된 손잡이를 잡고 힘껏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예상대로 그곳은 도서관이었다. 공간은 높고 넓었다. 갈색 톤의 은은한 조명 아래,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벽면을 가득 메운 서가에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오래된 종이와 먼지, 그리고 지식의 무게가 뒤섞인 듯한 독특한 냄새가 났다. 한 번도 환기된 적이 없는 듯, 무겁고도 탁하며 지혜를 품은 듯한 공기가 공간 전체에 폭넓게 깔려 있었다. 나는 그 육중한 지식의 무게에 잠시 압도당하는 듯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내부에 깃든, 보이지 않는 어지러움이 마치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순간, 이 공간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때, 잿빛의 긴장된 얼굴을 한 나이 든 수도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만 나의 모든 충동은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깊게 팬 관자놀이 위로 잔잔하고 편안한 미소를 띠며, 낯선 방문객인 나를 조용히 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무겁고 맥없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산만한 미소를 남발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테이블들을 점령하고 책에 몰두하고 있는 수도사들 곁을 소리 없이 지나갔다. 창문은 널찍한 격자무늬 창살로 되어 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조금씩 열려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 채광이 바닥에 질서정연한 빛의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존재해왔다는 듯이, 지극히 당연하고 평온하게 보였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에테르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같은 공간이지만 칸막이로 구분된 두 번째 서고로 들어서자, 수도복을 입지 않은 일반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마치 흑백 화면이 갑자기 컬러로 바뀐 듯한 느낌이었다. 다양한 연령과 행색의 사람들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만큼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몰두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듯 보였고,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덧정이 뚝 떨어지는 메마른 광경일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모습이 묘하게 안정감을 심어주었다.
양쪽 벽에는 성서의 장면들을 묘사한 듯한 유화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깊은 슬픔을 담은 듯한 성녀의 초상화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림 속 보라색 실루엣은 거친 질감의 물감과 어우러져 기묘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여인의 봉긋한 가슴 부분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도서관 내부의 모든 것은 규칙적이고 정돈되어 있었다.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탁상용 램프는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책상들의 중앙을 차지하고 앉아, 마치 달빛처럼 고아하고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창가 쪽 외진 테이블에 홀로 앉아 몽롱한 표정으로 책에 빠져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모서리가 잔뜩 닳아빠진 두꺼운 고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친숙한 얼굴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정령의 땅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런 모습. 작고 갸름한 얼굴,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갈색 피부, 오똑하지는 않지만 단정한 콧날, 도톰한 입술, 그리고 반달처럼 가늘고 긴 눈매. 흐리멍덩하면서도 어딘가 깊은 슬픔을 간직한 듯한 옆모습. 단색의 옅은 베이지색 머플러가 그녀의 옷깃 주위에 헐렁하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초조한 듯, 한쪽 발을 가만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마치 자석에 끌리듯, 홀린 듯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해면처럼 부드럽고 미세한 먼지 입자들이 불빛 아래서 부유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넓은 이마가 탁상 램프 조명에 반짝였다. 자세히 보니, 관리하지 못한 듯 뜨뜻하고 푸르뎅뎅한 여드름 자국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멀리서 책장을 넘기는 타닥거리는 옅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 얽히고설켜 온 사이처럼,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조용히 주시했다. 몰아(沒我)의 경지에 빠진 듯한 표정. 아무런 변화도 없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정지된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 위쪽에 있는 작은 여닫이 창문 틈으로, 저녁노을처럼 번지르르하게 빗어낸 붉은 햇살 한 줌이 비스듬히 넘어왔다. 그 순간,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무심했지만 날카로웠다. 그녀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모가 난 듯 투박스러운 인상이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지성과 예민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는 쉼 없이 다리를 떨고 있었다. 나는 품속에서 아난다 원장이 써준 작은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조용히 건넸다. 그리고 가방에서 내가 오랫동안 읽고 있던, 그녀가 저술한 <호모 사피엔스 기록> <고대 철학 편>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밀었다.
“당신을 오랫동안 찾고 있었습니다, 릴리안 나리 교수님.”
그녀는 잠시 내가 내민 책과 쪽지를 번갈아 바라본 뒤,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허스키했다.
“사피엔티아?”
“아닙니다. 저는… 나탈리아의 남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세자님이시군요?” 그녀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네, 맞습니다.”
“결국… 그들이 여기까지…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그녀의 목소리에 불안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 마을에는 카페가 딱 하나 있습니다. 광장 옆에요. 그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제가 준비해서 곧 나가겠습니다.” 릴리안 나리는 짧게 말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수도원을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갔다. 길 양옆으로 펼쳐진 푸른 목초지와 온갖 종류의 채소밭을 지나,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광장과 코딱지만 한 시청 건물, 그리고 허름한 잡화점을 지나 마침내 카페를 발견했다. 나는 카페 앞 야외 테라스에 놓인 낡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외딴 시골 마을에 이 정도라도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안 나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머리에 기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고, 어깨에는 붉은색이 감도는 낡은 슈미트 가죽 가방을 메고 있었으며, 한 손으로는 은색의 작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그녀는 카페 입구에 놓인 녹색 발판에 구두에 묻은 흙을 꼼꼼히 문질러 털어낸 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훌쩍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는 나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때마침 가까운 성당에서 오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카페 주인과 무척 친한 사이인 듯, 스스럼없이 가벼운 농담을 몇 마디 주고받으며 진한 에스프레소 더블을 주문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온 뒤, 나는 혹시 주변에 우리를 엿듣는 귀가 없는지 천천히 다시 한번 둘러보고는, 목소리 톤을 최대한 낮추어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제가 교수님을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교수님께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시겠지만, 제 아내 나탈리아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피엔티아 형제이신 사리 님에게서 전달받은 긴급 조치 사항에 대한 확인과 협조 요청입니다. 아난다 원장님의 도움 덕분에 비교적 쉽게 교수님을 찾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신의 땅까지 그들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했군요….” 그녀는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쭉 들이켜고는, 어둡고 침통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그들의 인내심은 여기까지였던 것 같습니다. 평화를 위한 모든 협상은 결렬되었고, 파더스는 이제 신과 인간의 조화 대신, 오직 자신들의 질서와 계급으로 구성된 새로운 철권 통치 왕조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우리 건국 시조이신 <프라이스 다즈> 님이 꿈꾸셨던 신성과 철학, 그리고 과학의 조화를 근간으로 하는 천년 왕국은 이제 벼랑 끝에 내몰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리고… 아난다 원장님의 조언에 따르자면….” 나는 침을 한번 꿀떡 삼키며 말을 이었다.
“아난다 원장님의 조언이라니요?” 그녀의 미간이 순간 좁혀졌다.
“네, 이미 이곳 신의 땅 곳곳에 파더스 가문이 심어놓은 ‘두더지’들, 즉 첩자들이 침투해 있다고 합니다. 언제든 그들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침공이 시작되면, 저희가 가우타 님으로부터 전달받은 특수 보안 통신기기 외의 모든 스마트 기기나 특수 장비는 즉시 폐기하셔야 할 것입니다. 추적당할 위험이 매우 높습니다.”
“그건 저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들은 신의 땅을 점령하면 가장 먼저 이곳의 모든 통신 시설부터 장악하고 통제하려 들겠지요.” 릴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제부터 교수님께서 안전하게 그 특수 통신기기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복잡한 특수 잠금장치의 해제 과정과 사용자 인증 절차를 곧 진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파더스의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아마도 수많은 중요한 기록들과 정보들이 암호화된 형태로 교수님께 전달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철저하게 이중, 삼중으로 암호화되어 있습니다. 오직 교수님께서 보유하신 고대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리 님께서 별도로 전달하신 특수 기호 해독표, 그리고 가우타 님만이 알고 계시는 최종 암호 해독 코드, 이 세 가지의 조합으로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즉,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그 어떤 강력한 양자 컴퓨터나 최첨단 인공지능조차도 절대로 해독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다만….”
“다만…?” 릴리안은 다시 불안한 듯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 사피엔티아 형제들과, 특히 정보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교수님을 집요하게 추적할 것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아주 사소하고 의심스러운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즉시 사피엔티아 형제들에게 알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교수님의 안전 확보가 현재 저희의 최우선 순위입니다. 그리고…”
“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나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릴리안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개를 장난스럽게 들어 올렸다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머리를 정돈하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한 가지 더… 간곡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교수님.”
“네, 무엇이든 말씀해 보십시오.”
“사리 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곳 성 요한 수도원의 지하에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카타콤(지하 묘지 및 피신처)이 존재하며, 이미 전쟁에 대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나는 잠시 망설이며 뜸을 들였다.
“그래서…?”
“만약 제가 제 아내 나탈리아를 찾게 된다면… 그녀를 이곳 카타콤으로 안전하게 피신시켜도 괜찮을까요? 제가 아는 한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일 것 같습니다.”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함께 오지 않는 겁니까?” 릴리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가우타 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맹세했습니다. 오직 제 아내 나탈리아의 생존만이… 저의 유일한 삶의 목표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내 목소리는 슬픔으로 잠겨 있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눈에서 알 수 없는 깊은 연민의 빛이 흘렀다. 나는 잠시 길게 한숨을 쉬고 주위를 한번 훑어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눈부시게 푸르고, 세상은 지극히 평온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전쟁 따위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것처럼.
“혹시… <마우드가>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릴리안은 추가로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하고는, 앉은 자세를 고쳐 잡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마우드가…? 아, 그 이름… 어렴풋이 명성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미친 천재 해커라고 불리는….”
“네, 맞습니다. 그는 현재 신의 땅 <철학의 도시> 외곽에 있는 오래된 정신병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저도 딱 한 번 먼발치에서 얼굴을 뵌 적이 있지만, 암호화된 메시지는 늘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아마 그라면 나탈리아 님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땅에서… 아니, 어쩌면 태양계 전체에서 그가 뚫을 수 없는 보안 시스템은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럼… 그가 혹시…?”
“네, 저는 조심스럽게 믿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니콜라스의 예언서에 등장하는, ‘푸른 용의 심장’으로 들어가 세상을 구할 바로 그 인물이라는 것을….”
그 순간, 나는 니콜라스 예언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의 짙은 그늘 아래 역설적으로 삶의 거름을 뿌리는 그는
차가운 감옥, 갇힌 자의 시선으로 다가오는 종말에 격렬히 항거하고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전사들의 눈과 발이 되어
마침내 푸른 용(Blue Dragon), 즉 인공지능의 심장부로 담대히 들어가
세상을 삼키려는 미친 자(AI 혹은 Pater)를 도륙(屠戮)낼 만큼 스스로 미쳤다.’
“부디… 세자님께서 그를 먼저 찾아서 안전하게 보호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릴리안은 커피 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눈빛에는 걱정과 함께 희미한 희망이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