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사과, 썩은 심장

by 남킹


고통은 붉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가, 이내 차갑고 푸른 빛으로 변해갔다. 목을 옥죄는 압박감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대신 머릿속이 터질 듯한 압력으로 가득 찼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역류하여 뇌 속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기분이었다. 의식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그 찰나, 칠흑 같던 시야의 한가운데서 작은 빛점이 나타났다.

그것은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빛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낡은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타타탁, 타타탁…’ 필름이 돌아가며 먼지 낀 렌즈를 통해 스크린에 상을 맺는 소리. 그래, 이것은 내 마지막 영화 상영회였다. 관객은 나 하나뿐이고, 스크린은 나의 텅 빈 의식이며, 상영되는 영화는 ‘장칭’이라는 이름 아래 겹겹이 파묻어버렸던, 저주받은 나의 과거였다.

첫 장면은 기차의 흔들림으로 시작되었다.

잿빛 하늘, 먼지 날리는 산둥의 황야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삼등석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열여섯, 혹은 열일곱. 더러운 무명옷을 입고 있었지만, 내 눈은 이제껏 그 누구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는 중이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체념에 잠긴 어머니, 나를 괴물 취급하던 동네 아이들과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내 손에 쥔 것은 몇 푼 안 되는 돈과, 세상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야망뿐이었다.

목적지는 상하이(上海).

그 이름은 내게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동방의 파리, 모험가들의 낙원. 네온사인이 밤을 대낮처럼 밝히고, 재즈 음악이 공기 중에 흐르며, 서양의 신사들과 치파오를 입은 여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곳. 그곳에 가면 내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곳에서는 ‘첩년의 딸 리칭윈’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누구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도시. 나는 그 도시의 가장 빛나는 별이 되리라 다짐했다.

기차가 상하이 북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거대한 인파와 자동차 경적,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와 상인들의 외침이 거대한 소리의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다. 눈앞에 펼쳐진 마천루들은 마치 거인들이 하늘을 향해 뻗은 손가락 같았다. 나는 압도당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래, 바로 이곳이다. 나의 무대는 바로 이 도시 전체다.

나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여공, 찻집 종업원, 상점 점원. 밤에는 싸구려 하숙집 다락방에서 얇은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배고픔과 고단함은 일상이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산둥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이 불타고 있었다. 무대 위에 서는 것. 배우가 되는 것.

배우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 수 있는 존재다. 공주가 될 수도, 혁명가가 될 수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내 비참한 인생을 버리고,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화려한 가면을 쓰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갈망했다. 나를 경멸하고 무시하던 시선이 아니라, 나를 동경하고 찬양하며, 나의 몸짓 하나, 대사 한마디에 울고 웃는 그런 시선을 원했다. 그것은 내게 있어 존재의 증명과도 같았다.

나는 작은 극단을 찾아갔다. 그들은 나의 촌스러운 행색과 사투리 섞인 말투를 비웃었다. 하지만 내 눈빛에 담긴 독기를 보았는지, 혹은 그저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는지, 나를 무대 청소부 겸 잔심부름꾼으로 받아주었다. 나는 묵묵히 일했다. 낮에는 무대를 닦고 의상을 날랐고, 밤에는 어두운 객석에 홀로 남아 주연 배우들의 대사와 동선을 모조리 외웠다. 거울도 없는 텅 빈 무대 위에서, 나는 수백 번, 수천 번 그들의 연기를 흉내 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여주인공이 갑자기 병으로 쓰러진 것이다. 대역은 없었다. 연출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내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연출가는 마지못해 내게 무대에 오를 것을 허락했다.

그날의 떨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뜨거운 조명이 내리쬐고, 수백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분장은 어설펐고 의상도 몸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막이 오르고, 내가 첫 대사를 내뱉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리칭윈이 아니었다. 나는 극 중 인물이 되어 울고, 웃고, 절규했다. 무대 청소를 하며 훔쳐본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에 응축되어 있던 설움과 분노, 갈망의 폭발이었다.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그들은 촌뜨기 소녀의 연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절박한 영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렸을 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그 소리!

그것은 내 평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무조건적인 인정이자 찬사였다. 그 순간, 나는 구원받았다. 아버지의 매질도, 아이들의 놀림도, 배고픔의 고통도 모두 그 박수 소리 속에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무대 위에서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온몸으로 그 환희를 빨아들였다. 이것은 마약과도 같았다. 한번 맛보면 결코 끊을 수 없는, 영혼을 잠식하는 달콤한 독약. 나는 그날 밤 결심했다. 평생 이 박수 소리를 듣기 위해 살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나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다. ‘란핑(藍蘋)’. 푸른 사과. 싱그럽고 풋풋하지만, 그 안에는 아담을 유혹한 이브의 지혜와 독을 품고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리칭윈이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얽힌 모든 과거는 상하이의 황푸강 깊은 곳에 던져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란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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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핑의 시대는 짧았지만, 불꽃처럼 화려했다.

나의 연기는 주목을 받았다. 곧이어 더 큰 극단에서 나를 불렀고, 나는 상하이 연극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내 사진이 잡지에 실리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나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나는 비로소 비단 치파오를 입고, 깨끗한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만족하지 않았다. 연극 무대는 너무 좁았다. 나는 더 큰 무대, 더 많은 관객을 원했다. 바로 영화였다.

나는 영화계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연극계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잔인한 정글이었다. 감독과 제작자들은 나의 재능보다 나의 젊음과 미모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기름진 눈빛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값을 매겼다.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술자리에 나가 웃음을 팔고, 때로는 그들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나는 그것을 굴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래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의 젊음을 주고, 그들은 나에게 스크린에 설 기회를 주었다. 나는 그들의 더러운 손길을 견디며, 카메라 앞에서 가장 순수하고 비련한 여주인공을 연기했다. 관객들은 스크린 속 나의 눈물에 함께 울었고, 나의 비극적인 사랑에 가슴 아파했다. 그들은 몰랐다. 그들의 순진한 여주인공이 카메라가 꺼진 뒤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나는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왕서방’, ‘도시풍광’, ‘자유의 신’. 나는 스타가 되어갔다. 내 얼굴이 담긴 영화 포스터가 상하이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나는 내가 꿈꾸던 모든 것을 얻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나를 향한 찬사와 함께, 나를 둘러싼 추문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신문과 잡지들은 나의 연기보다 나의 남자 관계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나를 ‘상하이의 카사노바’, ‘남자를 파멸시키는 요부’라고 불렀다. 나의 모든 행동은 가십 기사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탕나(唐納)와의 관계가 있었다.

그는 영화평론가이자 배우였다. 섬세하고 예술가적인 기질을 가졌지만, 병적으로 예민하고 소유욕이 강한 남자였다. 우리는 불같이 사랑했다. 예술과 인생을 논하며 밤을 새웠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 둘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항저우의 육화탑 아래서 수많은 기자들을 불러모아 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세기의 로맨스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 로맨스는 곧 지옥으로 변했다. 그는 나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읽는 책, 심지어 내가 입는 옷까지 간섭했다. 그의 사랑은 숨 막히는 감옥이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의 다툼은 잦아졌고, 나는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그를 떠났다. 그러자 그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구출되었지만, 이 사건은 상하이 전체를 뒤흔드는 대형 스캔들이 되었다. 모든 신문이 대서특필했다. 그들은 나를 비정한 마녀로 몰아세웠다. 남편을 죽음으로 내몬 요부. 그들의 기사는 사실 관계를 교묘하게 비틀어, 나를 대중의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언론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들은 펜이라는 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었다. 그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대중의 흥미를 끌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만 필요할 뿐이었다. 나는 거리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고, 극장에서는 야유를 들어야 했다. 한순간에 나는 상하이에서 가장 유명한 동시에 가장 미움받는 여자가 되었다.

그때 느꼈던 모멸감과 배신감은 내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는 대중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제는 내게 환호하다가도, 오늘은 신문 쪼가리 몇 장에 선동되어 내게 돌을 던지는 우매한 존재들이었다. 나는 기자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들은 진실을 보도하는 자들이 아니라, 잉크로 사람의 피를 빠는 흡혈귀들이었다.

훗날,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내가 왜 그토록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기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이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복수였다. 상하이에서 내가 당했던 모든 수모와 굴욕에 대한 뒤늦은, 그리고 철저한 복수. 나는 그들에게서 펜을 빼앗고, 붓을 부러뜨리고, 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그들이 함부로 타인의 인생을 재단하고 심판하지 못하도록.

나는 탕나와의 스캔들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무대에 서면 관객들의 모든 눈동자가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아 대사를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술과 아편에 손을 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의 위안일 뿐, 깨어나면 더 깊은 절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나는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게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만인이 평등한 사회. 출신 성분이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능력과 사상으로 평가받는 세상. 그 사상은 상처 입은 내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는 지하당원들과 교류하며 마르크스의 책을 읽었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적인 동지애는, 서로를 물어뜯고 시기하는 상하이 연예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들 속에서 비로소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완전한 안식처는 아니었다.

나는 당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국민당에 체포되었다. 차가운 감방, 취조실의 눈부신 조명, 그리고 나를 벌레 보듯 하는 취조관의 눈빛. 그는 나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영화 포스터와 스캔들 기사를 내 앞에 던져놓고 비웃었다.

“이런 몸 파는 광대년이 혁명을 논해? 웃기지 마라.”

그의 말은 비수처럼 내 심장에 박혔다. 그는 나의 사상이 아니라, 나의 과거를 심판했다. 그는 내게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동지들의 이름을 불고 전향서를 쓰면 풀어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감옥에서...

“평생 썩게 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뱀처럼 차가웠다. “아니, 그 전에 네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거든. 너처럼 예쁘장한 여배우에게 관심 있는 간수들이 아주 많아.”

그의 눈빛은 노골적인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이었다. 저 더러운 손에 의해 내 몸이 더럽혀지고, 그 사실이 또다시 세간의 가십거리가 되어 평생 나를 따라다니게 될 것이라는 상상. 그것은 죽음보다 끔찍한 형벌이었다.

나는 며칠 밤낮을 고민했다. 감방의 어둠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모든 것을 걸고 저울질했다. 혁명에 대한 신념, 동지들과의 의리, 그리고 나의 생존.

결국, 나는 생존을 택했다.

나는 전향서에 서명을 했다. 동지 몇 명의 이름을 댔다. 물론, 핵심 인물들은 아니었다. 활동이 미미하거나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난 이들의 이름이었다. 나는 그것이 나의 마지막 양심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나는 간수들에게 미소를 지었고, 때로는 그들의 추근거림을 적당히 받아주며 내게 가해질 폭력을 피했다.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서 풀려나기 위해 간수들에게 몸을 팔았다고 수군거렸다. 그 소문은 평생 나를 따라다니는 주홍글씨가 되었다.

나는 그 소문에 대해 단 한 번도 해명하지 않았다. 해명할수록 소문은 더 무성해질 뿐이라는 것을 상하이에서 이미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그 모든 기록을, 나를 취조했던 자들, 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던 자들, 나의 치욕을 목격했던 자들의 이름을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두었다. 언젠가 그들 모두에게 빚을 갚아주리라고.

감옥에서 나온 뒤, 상하이는 더 이상 내가 머물 곳이 아니었다. 동지들은 나를 변절자라며 경멸했고, 연예계는 나의 스캔들과 투옥 경력을 문제 삼아 나를 외면했다. 대중들은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나는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다. 어느 비 오는 밤, 나는 수면제를 한 줌 털어 넣고 침대에 누웠다.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의식이 멀어져 가는 순간, 내 귓가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 패배자로 끝날 수는 없다. 내가 죽으면 그들이 이기는 것이다. 나를 멸시하고 짓밟았던 모든 자들이 나의 죽음을 보며 고소해 할 것이다. 나는 그 꼴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살아남아서, 그들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내가 결코 패배자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나는 남은 힘을 다해 기어가 소금물을 퍼마셨다. 위액과 함께 약을 모두 토해냈을 때, 나는 탈진하여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내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나는, 과거의 란핑보다 훨씬 더 강하고 독해져 있었다.

나는 상하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위선과 배신, 타락으로 가득 찬 도시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옌안(延安).

중국 혁명의 심장. 모든 진보적인 청년들이 동경하는 성지. 그곳에는 나의 더러운 과거를 씻어줄 새로운 이념이 있고, 나의 상처를 보듬어줄 진정한 동지들이 있으며, 무엇보다… 나의 야망을 실현시켜 줄 거대한 힘이 있었다. 그 힘의 정점에 있는 남자, 마오쩌둥.

나는 그 남자를 만나야 했다.

상하이를 떠나는 기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보았다. 화려했던 네온사인들이 멀어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란핑’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의 청춘, 나의 꿈, 나의 순수했던 모든 것을 그곳에 남겨두고 왔다. 푸른 사과는 썩어버렸다. 이제 그 썩은 심장 속에서, 새로운 독초가 자라날 차례였다. 옌안의 붉은 태양 아래서.

…영사기의 필름이 끊어진 것일까. ‘타타탁’ 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상하이의 소음이 사라지고, 다시 지독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목을 조르는 압박감이 현실로 돌아왔다. 폐가 마지막 남은 공기를 갈구하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래, 푸른 사과는 썩었지. 그리고 그 썩은 과육을 먹고 자라난 것이 바로 나, 장칭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문화대혁명 때 왜 그토록 옛 영화들을 불태우고, 옛 노래들을 금지시켰는지. 그것은 낡은 문화를 청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과거를 지우기 위한 발악이었다. 스크린 속에서 웃고 있는 젊은 란핑의 모습을, 그녀를 둘러쌌던 그 모든 추문과 고통의 기록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삭제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울 수 없었다. 역사는 기록되고, 기억은 전염된다. 내가 파괴하려 했던 모든 것들은 잿더미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결국 나를 심판하는 증거가 되었다.

나는 실패했다. 배우로서도, 혁명가로서도, 한 여자로서도. 내 인생은 결국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는, 끔찍하고 지루한 비극으로 끝나고 있었다.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마지막 의식의 끈을 놓으려는 순간, 내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상하이의 관객들이 보내던 박수 소리도, 나를 비난하던 군중의 고함 소리도 아니었다. 아주 낮고 차분한,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담긴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옌안에 온 것을 환영하오, 란핑 동무.”

그래, 다음 장면은 옌안이다. 내가 비로소 나의 진정한 주인을 만났던 곳. 나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뀐 곳. 그 황량한 토굴의 어둠 속에서, 나는 새로운 빛을 보았다. 아니, 어쩌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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