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게 하품을 하고 기차에서 내렸다. 마치 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밀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눈시울이 가득 찬 눈물로 뜨거워졌다.
무척 작은 역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 혼자였다. 겨울의 해는 이미 사라졌다. 어둡고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깃을 세웠다. 찬바람이 세차게 코끝을 스쳤다. 바람 속에 뭔가 타는 냄새가 났다.
모든 것이 그 상태로 오랫동안 멈춘 듯하였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하였다. 눈은 생소하지만, 가슴은 이미 품고 있다.
네거티브 필름. 모든 열망이나 희망이 사라진 세상. 도회적 감성은 어디에도 느낄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운명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되짚고 고민하는 불편한 현실과 엄숙함의 영역을 거부하였다. 자신 속의 절대 가치를 부여하고 나머지는 배제해버렸다. 그리고 유아론적인 앎을 견지하였다. 다시 말해 상실의 두려움과 획득의 기쁨을 배제하는 것이다.
나는 노력을 그다지 하지 않았고 기대치를 늘 낮게 잡았다. 자신의 욕망을 낮추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을 하는 것. 늪 같은 단조로운 일상에 길드는 것. 그 어떤 것도 곱씹지 말 것. 억측이나 과장은 그냥 내다 버릴 것. 내 모든 비참을 마주하는 것. 현실과 낭만의 괴리는 애초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삶 그 자체를 다른 어떤 것에도 견주지 않았다. 당위를 휴지 조각처럼 내팽개치는 존재.
그저 내가 가진 사치라면,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모르는 여인과 섹스하는 것뿐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하나의 섹스는 다른 모든 욕망과 똑같았고 하나하나의 욕망은 다른 모든 사랑의 표현과 마찬가지였다. 만남의 설렘과 그 기억들, 느낌이 내 삶의 행간을 채우고 있다. 결국, 나는 섹스 외에는 어떤 것도 불안과 우울 속에서만 지내게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도착 사실을 메신저로 알렸다. 잠깐 답변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녀의 대답은, 내가 점점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느려지고 짧아졌다.
시간이 조금씩 확실성을 앗아갔다. 기차를 갈아탈 때도 그녀에게 메시지를 띄웠었다.
“대략 30분 정도면 당신 동네 역에 도착할 겁니다.” 한참 후에 받은 답은 단 한마디였다.
“네.”
나는 목을 움츠리고 서둘러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작지만 그런대로 형식을 갖춘 둥근 광장이 펼쳐졌다. 잠든 분수와 외로운 조각상이 중앙에 있다.
하긴 어디를 간들 늘 이런 식이다.
행인은 거의 드물었다. 노랑 등을 단 빈 택시만 차갑게 줄지어 정차되어 있다. 보이는 것 모두 왜소해 보였다.
세 갈래로 갈라진 앙상한 가로수 길이 어둠 속에 누웠다. 느닷없이 포르쉐 한 대가 거친 굉음을 내며 광장 앞 대로를 지나 우레같은 반향을 안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잠시,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고민을 하였다.
낯선 도시는 늘 생경한 호기심과 다소 번거로운 혼란을 주었다. 나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내비게이션을 들여다보며, 호텔을 눈대중으로 짚어 나갔다.
대략 2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방향만 잘 잡는다면 말이다. 나는 가방에서 마알록스 한 봉지를 꺼내 모서리를 찢어서 입으로 쭉 빨아 먹었다.
나는 광장을 가로질러 좁고 불퉁한 돌로 만든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다행히 내비게이터가 그어준 녹색 선을 따라 나는 가고 있었다.
행인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북유럽의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늘 똑같다. 겨울의 밤은 무척 이른 시간에 시작하고 사람은 항상 눈에 띄지 않았다. 고요한 밤의 숨결만이 흐른다.
그저 바람과 가로등, 낙엽 밟는 소리와 한 번씩 울리는 경적이나 사이렌 소리뿐이었다.
약간 가파른 길을 올라갔을 때쯤,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네.”
나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어 선 채, 그녀의 답장이 주는 의미를 생각했다.
‘만나기 싫다는 뜻인가?’
하지만 만남을 제안한 것은 그녀였다. 채팅을 시작한 지 이틀도 되지 않아 그녀는 자기 주소를 내게 전달했다.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기다릴게요.”
“이번 주말에도 괜찮을까요?”
“네, 그럼요.”
“정말, 찾아가도 될까요?”
“네. 오세요.”
“그럼 이번 일요일에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네. 근데 집에는 여동생과 어린 딸이 있어요.”
“그럼? 집 근처 호텔로 할까요? 어차피 식당은 코로나로 모두 닫았을 테니까.”
“네. 그게 좋겠네요. 근데 호텔도 닫지 않았을까요?”
“비즈니스 업무라고 둘러대면 됩니다. 어차피 호텔도 손님은 유치해야 하니까요.”
“아. 네. 그럼 오세요.”
“같이 잘 건가요?”
“네.”
나는 그녀에게 지금이라도 만나는 게 망설여진다면 돌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도를 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약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꼬불꼬불 계속 이어졌다. 숨이 차고 목에는 땀이 맺혔다. 코듀로이 바지 속 팬티가 어느 순간부터 말려가기 시작했다.
언덕 정상에 오르자, 목재 외장 집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복층의 전원주택도 눈에 띄었다.
붉은 볼보 스테이션왜건과 남청색의 포드 익스플로러, 크림색 MG 헥터, 흰색 마쓰다 미아타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사이에 엉거주춤 서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 오줌을 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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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또랑또랑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따스함을 주는 짙은 피부색을 지녔다. 하지만 얼굴의 굴곡과 세세한 특성은 분명 기품이라곤 전혀 보존할 수 없는 천박함이 묻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밝은색의 헐렁한 옷 속으로 부드럽고 축 처진 살덩이를 아무렇게나 밀어 넣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얇은 귀에는 크고 둥근 귀걸이가 대롱거렸다. 낡은 검정 가죽 멜빵에 가슴판이 있는 작업복 청바지를 입었다.
좁고 누추한 호텔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거치적거릴 것 없는 안내 데스크에서 우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벽에는 먼지가 잔뜩 뒤덮인 낡은 파이어 아일랜드 사진이 붙어있다.
이윽고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갈색 스웨이드 재킷을 끼듯이 입고 있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오지랖 넓고 얄팍한 모습이었다. 마치 전체주의자에 길든 모습이었다. 그는 광대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얼굴을 히죽거리며 여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빈방이 있나요?”
“있습니다만, 단속이 한층 강화되었어요. 당신들은 누가 봐도 비즈니스 업무로 온 것은 아닌 게 확실하군요….”
남자는 비웃는듯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쩌면 다이앤 아버스의 기괴한 사진에나 나올 법한 표정이었다. 어딘가에서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흘러나왔다. 팀파니 소리가 선명했다.
우리는 말없이 호텔을 나왔다. 바람 소리에 혼란이 가득했다.
“당신 집으로 갑시다.”
“하지만…. 방이 달랑 하나에요.”
“저는 거실에서 자겠습니다. 어차피 몇 시간 자지도 못할 겁니다. 첫차로 올라갈 거니까요.”
“하지만….”
나는 지갑을 꺼내 50유로짜리 지폐 석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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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교도관처럼 그녀의 삶을, 놓인 물건으로 해석하고 일별한다.
값싼 새앙 가루 팩이 놓여있다. 헝겊 인형이 보였다. 그리고 길비스 드라이 진과 버무스, 봄베이 사파이어, 소비뇽 블랑 빈 병이 장식품처럼 올려져 있다.
여자는 자기 방 문간에 서 있다.
발을 녹색 발판에 문질러 구두에 묻은 흙을 털었다. 나는 나의 데크 슈즈를 가지런히 놓았다.
외투 자락을 벗어, 작고 뭉툭한 소파로 던졌다. 내 무게의 대부분이 쑥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아기는 잠이 들었고 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벽지는 모서리마다 부풀어있다. 벨벳 커튼이 암울하게 걸려 있다. 끈적거리는 욕망이 사방에서 삐져나온다.
노란 조명 아래, 방의 모든 것이 죄스럽다는 듯이 속삭인다.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은 일그러져있다. 인간이 구축한 시스템에는 늘 부정적인 모습이다. 얼굴은 닳고 더러워지고 주름이 잡혀, 여행 중에 끼고 있던 장갑처럼 늘어나 버렸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준비해온 휴대용 리스테린으로 입을 헹궜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입 냄새가 심한 편이었다.
어느새 테이블에는 값싼 와인병과 잔이 놓였다. 소파 끝에는 이불도 보였다. 여자는 TV를 틀고 모든 조명을 껐다. TV에는 노르딕트랙 러닝머신 광고가 펼쳐졌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오래된 연인처럼 살포시 안았다.
부드러운 캐시미어 스웨터가 따스함을 전해주었다. 나는 스웨트셔츠를 힘들게 벗었다. 땀내가 물씬 풍겼다.
상처와 털을 민 자국, 약간 출렁이는 허벅지가 유혹한다. 유리잔 속의 얼음이 빛을 낸다. 음울하지만 욕정이 배어있다.
담배 연기가 미세한 안개처럼 떠오른다.
싸구려 화장품 냄새와 곰팡내, 땀내가 절묘하게 섞였다. 꺼림칙하기도 하고 속으로는 주저함도 있었지만 결국 쾌락의 기억은 무엇이든 강요하고야 만다.
개나리와 냉이 그림이 그려진 퀼팅 이불을 들썩거리자 쉰내가 푹 올라왔다. 할퀴고 짓밟고 싶은 충동이 솟았다. 하지만 꾹 참았다. 달팽이가 내뱉은 끈끈물 같은 게 여자의 음부에서 흘러내렸다.
천진난만하게 때론 휘황찬란하게 몸속의 모든 세포는 쾌락에 물든다. 덧베개가 이상한 모습으로 짓눌러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심하게 머리를 뒤로 젖힌다. 분수의 물줄기 위에 춤추는 아지랑이처럼 쾌락의 감탄이 삐져나온다.
나는 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었다
매 순간 천 곱의 희열이 죽은 삶을 대신한다. 운위할 수 없는 쾌락의 맛. 신의 선물. 여자는 숨이 턱 끝에 닿은 척, 헉헉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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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선잠이 들었다. 정신이 아득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따가운 통증을 얼굴에서 느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세상은 칠흑같이 어둡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거야?”
“미친 새끼야! 내 여동생은 아직 처녀야!” 여자는 눈썹을 치켜세운 채, 분노에 차서 떨기 시작했다.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그냥 끼니를 잇기 위해 너 같은 새끼가 필요할 뿐이야. 알겠냐고? 이 사기꾼 색전증 같은 녀석아!”
“지금 내게 으름장을 놓는 거야?” 나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어둠에 있다.
흔들리는 망막 속에 품은 저주가 느껴진다.
돌아서는 등에 그녀의 욕지거리가 매달렸다. 거친 손찌검이라도 돌려주고 싶었으나 늘 생각뿐이었다. 나는 역정을 억지로 삼켰다. 그냥 재킷을 찢을 듯이 손에 꽉 쥐고는 뛰쳐나왔다. 악덕과 모독이 치렁치렁 달려 나왔다.
무채색의 공간. 더러운 하늘이 낮게 드리웠다. 검정이나 회색 혹은 갈색이 지배하는 풍경은 선명함이 없었다. 마치 파스텔 색조로 덧 이겨놓은 듯한 유화 같았다.
틈이 놓여있다. 탁한 바람이 갈색의 병풍처럼 이어졌다 사라진다. 휘어진 도로 사이로 죽음처럼 깊은 수렁이 머문다.
칼날 같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절망적인 포르티시모가 쭈뼛 삐져나온다. 얼굴이 얼얼하고 목젖이 빳빳하였다. 침을 삼키니 따가움이 전해졌다. 몸이 늪 속에 빠진 듯 천근만근 무겁다.
혼란스러움이 형식을 찾아가고, 두운과 각운에 맞추고, 내 인생의 질서를 반듯하게 흩뿌려놓는다. 모든 것은 익숙하게도 반복된다. 혼돈만이 진정한 내 삶의 가치다.
암울한 무엇인가가 나를 눌렀다. 자의식 과잉으로 내려앉은 무거운 머리.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냥 받아들였다. 가장 착한 면과 악한 면이 늘 가까이 들러붙어 있다.
점점 방향을 어디에 둘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백지상태로 변했다. 어떻게든 견뎌야 하는 불행만이 가득하다. 모든 게 거품처럼 부글거린다. 동경과 좌절 속에, 광기와 불행 속에…
나는 경박하고 공허하다. 즉, 적어도 삶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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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나는 목을 길게 빼고 마냥 기다렸다.
배기바지를 입은 청년이 담배를 물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서성이고 있다. 연기는 가까이 오면서 꼬이고 말리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긴 하루였다. 재수 옴 붙은 날. 삶이 시간 속에 머뭇거린다. 운명이 수 놓은 반짝이는 경외. 내 안에서 여음이 울린다. 저주와 축복이 버무려진다. 창조의 활동과 오만. 이때를 늘 갈구한다. 다시 내부로 향한다.
번뇌는 불어나고 의식은 가볍고 감각은 불안하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세상. 늘 인간은 혼자다. 타나토스로 향하는 여정.
청색 블레이저와 타탄체크 바지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케이프 코트를 근사하게 차려입은 여인과 팔짱을 낀 채 나를 스치듯 지나갔다. 더블브레스트 재킷에 검은 레이밴 선글라스, 고전적인 느낌의 윙 톱 슈즈를 착용한 사내도 풍채 좋고 당당하게 서성거린다.
단조로운 힙합이 점점 크게 다가온다. 돌아가는 세계는 궁색하였고 나는 관조로 일관한다. 그리고 자신을 추스른다.
저 멀리, 시선의 끝에 폭풍의 형상이 도사린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쉰다. 지금은 그 무엇이든 삶을 어렵게 한다. 대기, 바람, 구름, 정적, 외로움, 바짝 마른 이파리. 모든 것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사물과 형상, 기억은 아픔과 슬픔으로만 맺어진다. 종말의 시대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원래 만들어진 대로 파괴로 이어진다.
자신이 평온했던 어린 시절에는 다 써버릴 수 없었던 지나친 교만, 의지, 지배력이 나의 죽음 속으로 흘러든다. 구역질은 늘 따라다니고 두려움은 상주한다. 나는 이제 잉여분을 탕진하고 싶다.
나는 입장하는 기차를 향해 뛰어든다. 허공에서 파들거린다.
그을음 같은 흐릿하고 음흉하기까지 한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쬐고 있다.
그 아름다운 존재에 축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