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제도는, 다른 제도처럼, 하나의 상태 속에 갇히는 거라고 봐요.
그리고 특히, 당신은 곧 깨닫게 될 거에요. 그게 얼마나 답답한지를.”
“특히 왜 나지?” 라후라는 피곤한 눈을 크게 뜨고 제냐를 쳐다 봤다.
“왜냐면, 심하게 자유로움을 갈구하잖아요.”
“내가?”
“네, 재론님, 한 달동안 휴가를 어떻게 보냈나요?”
“그야, 자유롭게 발길 닫는데로···” 그의 말에 제냐는 측은한 미소로 그를 바라봤다.
“난 뭔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내려놓았지.
그냥 내 시선이 가는 데만 보고 싶었던 거고...” 라후라는 자신이 내 뱉는 말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사르트르 말대로,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상태를 우리는 자유롭다라고 표현한답니다.” 제냐는 라후라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하였다.
“전 아담파 신자처럼 살고 싶었던적이 있었어요.
블타바강의 나체주의자 들어보셨나요? 권력도 계급도 노동도 화폐도 정부도 군대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사회 제도가 사라진 세상 말이에요.”
“언제부터?” 라후라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방 한쪽을 무질서하게 채우고 있는 수많은 책이 달려들 듯 위태롭게 쌓여있었다.
“오래전.”
“오래전? 모호한데.” 라후라가 제냐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물었다.
“어릴 때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였거든요.
내 물건에 절대로 남들이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죠.
특히, 내 동생에게는.
그런데 어느 날 깨우친 거에요.
내 모습이 남우세스러운 짓이라는 것을.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에 대해서도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세상에 묘한 매력을 느낀 거죠.”
“마치, 공산주의자 같은 느낌이 드는데?” 라후라는 제냐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렇지만은 않아요.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시작된 이상한 집착이 생겼으니까요.”
“이상한 집착?” 라후라는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이야기에 대한 끝없는 끌림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책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어요. 어찌 보면 당연하겠죠.
책에는 숱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러다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인생을 늘 궁금해 하죠.
바라봄의 즐거움과 몽환적인 생각이 삶의 기반이 되어 버린 셈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나와 아우르는 행위 말이죠.” 밝은색의 헐렁한 옷 속으로 제냐의 부드럽고 앙상한 갈비뼈가 삐져나왔다.
“당신은 어떤가요?” 그녀는 사랑이 가득한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 물었다.
“저는 아주 오래된 노래를 좋아했어요. 헤비메탈과 하드락...고막이 찢어지게 크게 틀곤 했죠.
덕분에 지금도 가는 소리는 잘 안들려요···그리고...” 그녀는 무척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낭만적인 연애를 하고 싶었고 가출도 해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거리를 떠돌던 애들과 며칠 동안 잔 적은 있어요.
그리고 형식과 예의에 무관심한 편이죠···그리고...
인공지능에 무척 관심이 많고요...그리고...그리고...” 라후라는 잠시 뜸을 들인뒤 마침내 고백을 하였다.
“저는 해킹을합니다. 사피엔티아라는 조직에 몸담고 있어요.”
“해킹? 마치 범죄 조직처럼 들리네요.” 제냐는 가벼운 미소를 띄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흔들리는 망막 속에 품은 갈등을 그는 느꼈다.
“그 반대라고 생각하시면 될거에요.
무척이나 은밀하면서도 사악한 집단에 대한 정보를···” 이 순간 그는 말을 끊었다.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튼 저는 당신을 지킬거에요. 죽을때까지···” 라후라는 제냐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어느새 그가 사는 곳에서 1600km 나 동쪽으로 와 있었다.
다음날, 작별은 짧았지만 발길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그는 그녀가 서 있는 플랫폼 기둥이 사라질 때 까지 끝없이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