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뜻대로 7

by 남킹

18.




다음날 나는 다시 학교를 빼먹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영화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조금씩 <대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마치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면서, 마침내 범인의 행동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탐정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알아 갈수록, 나는 이 모든 끔찍한 행위들이, 결국에는 <패밀리>를 위한 것임을 어렴풋이 수긍하게 되었다. 악한에게도 가족의 사랑은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영화 탐험은 오후를 넘기지 못했다. 어머니와 누나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극장 복도에서 마주친 그들의 표정은 너무도 상반되어 있었다. 한없이 슬픈 표정의 어머니와 세상의 온갖 화를 다 품은 모습의 누나가 내 앞에 마주 선 것이다. 나는 누나의 무수한 꿀밤 세례를 피하고자 어머니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를 가운데 두고 한동안,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누나를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만 했다. 결국은 누나에게 한쪽 귀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며 극장 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누나의 잔소리와 협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렇게 나의 가출은 이틀 만에 끝을 맺었다.


하지만 나는, 동네 어귀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 결사 항전을 결심했다. 이대로 더는 물러설 수 없다고 굳게 다짐을 한 것이다. 나는 전파상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버티기 시작했다. 나의 돌발 행동에 누나는 다시 씩씩거리며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피해 잽싸게 전파상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던 아저씨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뒤따라 들어오던 누나는 아저씨를 보자마자 급히 다정다감한 표정으로 바꾸더니 아저씨에게 인사를 꾸벅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어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아저씨에게 지난번에 주신 전단을 한 장만 달라고 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아저씨는, 빙긋이 웃으며 한 묶음의 전단을 가져와 우리에게 골고루 한 장씩 나눠 주었다. 그리고 아저씨의 맛깔나는 제품 홍보가 시작되었다. 비로소 어머니와 누나는 내 가출의 이유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우리 형편에 그 카세트 플레이어는 너무 비쌌다. 나는 이 세상에 가장 슬픈 표정으로 어머니를 쳐다봤고, 아저씨는 가장 현란한 말솜씨로 누나를 설득했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다.


외상으로 물건 먼저 가져가고, 매달 얼마씩 갚기로 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며칠 뒤 일시금으로 제품값을 지급하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예물인 목걸이를 판 것이다. 누나는, 원망스럽게도 이 사실을 너무 늦게 내게 알려 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뒤에 말이다.




19.




나는 그날 이후, 아저씨가 덤으로 준 2개의 공테이프에 좋아하는 팝송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테이프는 금방 채워졌다. 나는 이제 또 다른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더 많은 공테이프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머리를 짜내어,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모아 테이프를 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청소년 시절 대부분을 팝송 듣기와 녹음으로 채웠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이 되자, 나의 다락방 한 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카세트테이프가 쌓여 있었다. 나는 어느새 빌보드 차트 1위에서 100위까지 모든 노래를 꿰고 있었다. 그야말로 70년대 팝송의 전문가가 되어 버렸다. 나는 그때, 어렴풋이 내 미래를 그려보곤 하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음악 외에 다른 직업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수많은 관중 앞에서, 장발을 치렁치렁 흔들며 기타를 신들린 듯이 연주하는 나를 꿈꾸고 있었다.




20.




안나는 피아노 학원을 아주 열심히 다녔다. 그녀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피아노 연습시간을 점점 늘려나갔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안나의 귀가 시간은 거의 새벽 1시에 육박했다. 나는 야근이나 회식 등으로 늦게 퇴근을 하게 되면, 으레 피아노 학원으로 가서 문틈으로 그녀를 지켜보곤 하였다. 밤늦은 시간이라 선생들은 거의 없었으며 대여섯 명 정도의 여학생들이 각자의 피아노를 연습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어떤 때는 컵라면이나 피자 같은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빙 둘러앉아 재잘거리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는 가요를 반주하며 즐겁게 합창을 하기도 하였다.


어떤 모습이든 내 눈에는 흐뭇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게도 느껴졌다. 그러면 나는 1층으로 달려가 한 무더기의 빵을 사서 들이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학원생 모두 데리고 분식집이나 편의점으로 갈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잠시나마 해방된 모습으로 깔깔거리며 입시에 짓눌린 가슴을 열어젖히곤 하였다. 그런 그들의 웃음 속에서 나는 슬픔을 느꼈다. 세상은 이제 풍요로워졌지만, 그들 앞에 놓인 치열하고 끝없는 경쟁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해 보였다.


그즈음 아내의 고민도 깊어졌다. 안나의 진학 때문이었다. 너무 늦게 시작한 피아노가 문제였다. 지난달, 아내와 나는 학원에서 분기별로 실시하는 연주회에 다녀왔다. 그 연주회는, 그동안 갈고닦은 학원생들의 연주 실력을 부모들 앞에 시연함으로써, 일단 부모들을 안심시키고 또 적극적인 후원이나 홍보 효과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으로 보였다.


다소 신경질적인 그러나 예술적인 카리스마가 물씬 풍기는 학원장은, 아이들의 연주가 한 명씩 끝날 때마다, 짤막하게 감상평을 청중에게 말하였는데, 사실 대부분이 칭찬 일색이었다. 물론 약간의 단점을 안줏거리로 포함함으로써, 학원이 이 부분을 앞으로 중점적으로 개선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 아이는 완벽한 연주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부모들에게 교묘하게 심어주곤 하였다.


안나의 연주가 끝났을 때도 예외 없이 칭찬이 쏟아졌다. 학원장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마치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안나의 뛰어난 음악적 감수성에 찬사를 보냈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듣기에 참 좋았다. 사실 나도 그러한 느낌을 조금은 받기도 하였다. 다른 애들의 연주에서는 기교는 뛰어났으나 뭔가 기계적인 느낌이었다면 안나의 연주에서는 말할 수 없는 따뜻함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원장과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표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내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아내는, 멋도 모르고 헤죽헤죽하는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했다.

“에구구 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양반아…. 음악적 감수성이 좋다는 말이 뭔 뜻인 줄 알우?”

“...”

“그건 말이야 테크닉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을 에둘러 하는 말이야……. 쯧쯧…. 저 불쌍한 양반하고는….”

“...”

“누가 귀한 집 자식 보고 실력이 떨어진다고 하겠어??? 그러니 그냥 감수성이 풍부하다 뭐 이런 식으로 둘러치는 거야.”


듣고 보니 아내의 주장이 맞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날부터 아내는 장고에 들어갔다. 피아노를 전공하여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기에는 좀 실력이 부족해 보였고 일반 고등학교로 가자니 안나의 성적이 반에서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아 대학 진학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던 아내는 묘한 수를 들고 나왔다.


미국에 사는 나의 누이를 생각한 것이다. 아내는 몇 번 보지도 않았던 나의 누나에게 장거리 안부 전화를 뜬금없이 하고선 밑도 끝도 없이 안나의 유학을 알아봐 달라고 종용하는 거였다. 그렇게 몇 번 전화가 오고 가더니, 이번에는 미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알아보겠다며 강남의 모 유학원을 여러 차례 방문하는 거였다. 그렇게 점점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모녀가 미국으로 훌쩍 가버리고, 홀로 한국에 남은 나는 영락없이 기러기 아빠로 전락하는 절차였다. 뭔지 모를 위기감이 느껴졌다. 아내가 예전에 읊은 맹모삼천이 불현듯 다시 생각이 났다. 아내는 하나뿐인 딸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사람같이 보였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손쉽게 해결이 되었다. 독일에 있는 유럽 본사로 발령이 난 것이다. 이 소식을 아내에게 전하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두 모녀는 영어학원도 알아보고 있었는데 급작스레 독일어 학원으로 변경했다. 출국까지 남은 3개월 동안 독일어 기초라도 닦아야 한다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도 대학 졸업 후, 거의 손 놓고 있던 독일어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나는 독일행을 운명처럼 느꼈다. 내가 그를 알고 나서 유럽 문학에 빠지고 독문학을 전공하고 이렇게 독일로 가게 된 것이 마치 하나의 예정된 수순으로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독일에 가자마자 가장 먼저 쾰른에 들르기로 했다. 그의 거리를 꼭 한번 걸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짓과 상상 혹은 죄와 벌 (23).jpg
신의 땅 물의 꽃 (2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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