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다음날 나는, 학교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 버렸다. 다소 충동적이었지만, 예전부터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었다. 내가 내린 곳은 빌딩과 유흥가가 밀집한 상업지역이었다. 이른 시간인지라, 대부분의 식당과 술집들은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낙엽과 쓰레기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그리고 회사원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나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들은 보고 있자니, 부러움이 밀려왔다.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후딱 어른이 된 나의 미래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다.
나는 마땅히 갈 곳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닌지라, 그냥 설렁설렁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허름한 극장 앞에 발길이 멈추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초등학교 때 단체로 반공 영화를 관람한 그 극장이었다. 나는 매표소를 서성거리며 요금을 살펴봤다. 2편 동시 상영인데도 상당히 저렴한 편이었다. 나는 가방 구석 깊은 곳에 꿍쳐둔 비상금을 털어서 입장권을 샀다.
두툼하고 푹신한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외국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나는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잠시 복도에 서서 기다렸다가, 맨 뒤쪽 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다. 아직 오전이라 그런지 몇 안 되는 관객들만 보였다. 영화는, 중간부터 봐서 그런지 도통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정장한 신사들이 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있었다. 그중에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마치 살인의 종합세트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는 성당에서, 아기에게 세례를 주는 엄숙한 장면으로 시작하더니, 느닷없이 엘리베이터에서, 안마소에서, 회전문에서, 침실에서, 계단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놀란 입을 한동안 다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자라면서, 보고 배워온 바에 따르면, 가난한 우리나라를 원조해준 미국이라는 참 아름답고 우아한 국가에서, 저런 살인광들의 모습들이 그려진다는 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였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작고 더러운 영화관에 조명이 밝아오면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모두 떠나갈 때까지, 멍하니 객석에서 한동안 앉아 있었다. 뭐 사실 딱히 어디 갈 곳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 영화가 <대부>라는 것과 아주 유명하다는 것 그리고 주요 무대가 뉴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날, 그 삼류 극장에서 이 영화를 이틀에 걸쳐서 대여섯 번 정도 봤었다. 그리고 대학생 때 학생회관에서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만 이 영화에 그야말로 꽂히고 말았다. 그 후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지금까지, 나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보게 되었으며, 몇몇 장면들은 이제 너무도 익숙하게 나의 뇌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은, 2번의 웨딩 댄스이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딸 <코니>와 아빠 <비토>의 웨딩 댄스는, <The Godfather Waltz> 제목의 메인 주제곡과 함께 나오는데, 볼 때마다 부러움과 설렘을 내게 안겨주었다. 부러움이란, 나도 언젠가 딸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딸이 한 명 정도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설렘은, 딸과 춤을 출 만큼 서로 사랑하고 또 배려할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관계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또 다른 욕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2번째 결혼 댄스는, 주인공 <마이클>과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아폴로니아>가 시칠리아의 한 시골에서 행한 결혼 장면에 등장한다. 순백하고 청순한 아폴로니아와의 첫 만남부터, 첫 데이트 그리고 마을 전체가 떠들썩한 결혼 장면들도 뭣 하나 빠트릴 것 없이 아름답지만, 무엇보다도 마이클과 그의 아내가 추는 춤 장면은 내겐 황홀감으로 다가오곤 하였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내 여인에 대한 기준을 아폴로니아에게 맞추어 버리는, 다분히 비현실적인 환상에 갇혀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운명적 만남 뭐 그런 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인위적 만남을 줄곧 피해 다녔다. 그러자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은 안달이 나셨다. 하나뿐인 아들이, 번듯한 직장도 있고, 그렇다고 성 기능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한사코 맞선을 안 보려고 하니 꽤 심란하셨나 보다.
16.
“너 혹시 남자 좋아하고 뭐 그런 거냐? 그 뭐라 카더라…. 게이라던가 뭐 그런 거 있다 아이가?” 어느 날 어머니가 걱정 섞인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중반이었으니까 부모로서 뭐 그런 의심을 충분히 가질 만하셨을 것이다. 게다가 한사코 중매를 거부하는 모습이,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으로 어머니 눈에는 충분히 비추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순전히 어머니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공약을 불쑥 내뱉고 말았다.
“올해까지만 좀 자유롭게 있다가 내년부터는 맞선 볼게요….” 그러자 어머니가 안심된 듯 싱긋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게이는 아닌가 베….”
그리고 그해 말, 나는 해외영업부 과장으로 진급을 하면서 송년회 겸 승진 축하 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마음 한쪽 구석은 무겁고 허전하기만 하였다. 회식이 끝나고, 부장이 사라지자, 뒤풀이로 나이트클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곳에서 조용필이라는 명찰을 단 웨이터가 귓속말로 내게 뭐라 속삭이며 손짓으로 어떤 곳을 가리켰다. 나는 찢어질 듯한 소음과 현란한 조명 속에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지만, 어디를 말하는 건지 아리송하기만 하였다. 그러자 조용필이 답답했는지 나보고 따로 오라고 했다. 그는 별실같이 생긴 곳에 이르러 유리문을 공손히 열고는 나를 보면서 가장 중앙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저분이십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쭉 둘러앉은 여자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는 바짝 언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자 중앙에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테이블 위를 성큼성큼 걸어서 내게 다가왔다.
“아저씨 결혼했어요?”
“아 아니 아직은….”
“그럼 됐어요. 춤추러 가시죠.” 그녀는 내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아폴로니아를 황홀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17.
늦은 시각 극장을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네온사인 불빛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썰렁하고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가 저마다의 표정과 모습으로 지나갔다. 외로움과 무서움이 찾아왔다. 나는 잠시 집으로 돌아갈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이내 발길을 친구 집으로 돌렸다. 친구는 학교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의 고향 마을은 낮에도 산짐승들이 어슬렁거리는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도회지에 유학을 나왔다. 그가 마을을 떠나던 날, 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나와 배웅을 하였다고 그는 우스갯소리로 자랑을 하곤 하였다. 그래 봤자 열 분도 안 되는 어르신들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큰맘 먹고 사이다 2병을 사 들고 그의 집을 기습 방문했다. 녀석도 심심하였는지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는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한 이불을 덮고 누운 채, 달콤한 사이다를 홀짝거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는 오늘 내가 보았던 잔혹한 미국 영화를 두서없이 읊조렸다. 그리고 선녀보다 몇십 배 더 이쁜 여주인공을 침이 마르게 찬양했다. 그러자 친구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벌떡 일어나더니 구석에 수북이 쌓아 놓은 잡지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선데이 서울> 한 권을 집어 펼치더니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영화 <대부>의 흑백 스틸 사진들이 쭉 실려 있었다. 잔인하고 음울한 사진들 사이에 마이클의 결혼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웨딩드레스와 하얀 부케를 든 신부는 신랑의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다. 그리고 뒤따른 신부 들러리들이 꽃잎을 그들 머리 위에 뿌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 낮에 본 영화의 결혼식 장면들을 떠올리며 잠시 황홀감에 빠졌다. 그리고 녀석의 허락을 받아 그 사진을 가위로 오려내어 내 책가방에 넣어 두었다. 그러자 친구 녀석이 낄낄거리며 이 세상 최고의 여인을 보여주겠다며 그의 일기장에 스크랩해둔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투명한 실크 망사와 부츠를 신고 앉아 있는 그 모습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 사랑 엠마누엘 부인이다. 인마!” 친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그 순간 녀석이 무척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