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런데 기우가 현실이 되었다. 내 차가 사라진 것이다. 처음엔 내가 주차 장소를 착각하는 줄로 생각하고 주변 일대를 서성거리며 돌아다녔다. 특징 없는 주택가가 이어진 곳이라 어디를 둘러봐도 비슷하였고 영 낯설기만 하였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기억을 최대한 짜내어, 이곳에 그려진 흐릿한 주차 표시가, 내가 주차한 곳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막막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견인하였다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았지만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덧 해도 기울어 사방은 어둑어둑하였다. 나는 일단 뒤셀도르프로 떠난 직원 중 한 명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승합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들은 수 분 내에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경기장 근처에서 안내하는 경찰관에게 다가가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는 안타까운 표정과 함께 메모지에 견인 차량보관소 주소를 적어 주었다. 우리는 차량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해 보았다. 다행히 10km 미만으로 나왔다.
우리 일행은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갔다. 가던 중, 나는 혹시나 차량보관소가 문을 닫았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토로하였다. 그러자 프랑크푸르트에서 견인 당한 경험이 있는 한 직원이 새벽에 차를 찾아왔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도착해서 보니 사무실의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노란 비상등과 가로등만 외롭게 켜져 있었다. 난처함이 몰려왔다.
나는 사무실 옆 마당 입구에 있는 철문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어 내 차의 유무를 일단 확인해 보았다. 희미한 조명 아래 대여섯 대의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나는 할 수 없이 자동차 리모컨 키를 꺼내어 열림 버튼을 눌러 봤다. 그러자 입구 가까이에 있던 차량이 번쩍번쩍했다. 일단 내 차를 확인하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다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의 나의 경험상, 지금 차량보관소가 문을 닫았다는 것은 주말 내도록 열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즉, 월요일 오전이 되어야 자동차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적어도 이틀 밤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면 지금 직장 동료들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내려갔다가 월요일 새벽에 대중교통으로 다시 올라와야 한다. 어느 것을 하든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 결정을 심사숙고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바로 지금 내 앞에는 8명의 직장 동료가, 나 때문에 지연된 금요일 밤의 유흥을 재개하기를 갈망하는 눈빛으로, 나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일단 아내에게 전화해서 지금의 난처한 상황을 토로했다. 그러자 아내 옆에서 듣고 있던 안나가 쾰른에 있는 자기 기숙사 아파트를 이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였다. 방 열쇠는 관리실에 여유분이 있으며, 안나가 미리 관리원에게 양해 전화를 드려 놓겠다고 하였다. 생각해보니, 적지 않은 견인비와 추가 벌금 및 벌점이 예상되는데 거기 다가 이틀 동안의 호텔비까지 지출해야 한다면 너무 속이 쓰릴 것 같았다. 게다가 나 때문에 우리 직원들의 귀한 주말 밤을 이렇게 망치고 있는데,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하지 않는다면, 상사로서 너무 매정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안나의 방을 이용하기로 하고, 지급하지 않아도 될 호텔비로 우리 직원들에게 근사한 저녁을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25.
쾰른 시내의 한 한국 식당에서 우리는 저녁을 함께하였다. 그리고 안나의 기숙사 앞에서 직원들과 헤어졌다. 그들은 다시 애초에 예정했던 뒤셀도르프로 떠났다. 나는 아파트 1층 로비에 있는 관리 사무실로 다가가 청년으로 보이는 관리원에게 나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그는 안나에게서 이미 연락을 받았다며 선뜻 방 열쇠를 내게 건네주었다. 안나의 기숙사 방은 35층 아파트의 32층에 있다. 높은 건물을 찾기 힘든 유럽에서 특이하게 높은 아파트다. 그래서 눈에 잘 띈다. 처음 이곳을 찾은 때는 안나가 대학에 입학하기 며칠 전이었는데 쾰른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이 고층의 아파트가 눈에 탁 들어왔다. "집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네…." 아내의 첫 소감이었다.
안나의 방은 채 4평이 되지 않아 보였다. 마치 홍콩의 유명한 <닭장아파트>를 보는 기분이었다. 책상과 싱글 침대가 거의 맞닿아 있으며, 세 발자국만 가면 간이 싱크대가 있고, 그 바로 옆에 화장실과 세면대가 붙어있다. 우리 가족 세 명이 침대와 의자에 나란히 앉으니 내부 공간이 꽉 찬 느낌이었다. "친구 초청할 일은 없겠구먼…." 아내의 두 번째 소감이었다.
나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는 실내조명 스위치를 찾아서 켰다. 실내는 예상외로 후끈후끈하였다. 난방비가 비싸기로 악명 높은 독일에서 경험하기 힘든 사치임이 틀림없다. 나는 베란다 쪽으로 가서 창문을 살짝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상쾌하게 들어왔다. 나는 창가에 서서 한동안 쾰른 시내의 야경을 감상했다. 저 멀리,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노란 조명의 <호엔촐레른 철교>가 보이고,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 백색 조명으로 치장한, 두 개의 탑이 우뚝 솟은, 거대하기 이를 때 없는 쾰른 대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불을 환하게 밝힌 유람선들이 천천히 강물에 자국을 남기며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었다. 평화롭고 안온한 모습이었다.
그 편안한 광경 속에서 나는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쾰른에 올 때면 언제나 그 사람을 가슴에 담아 두곤 한다. 바로 쾰른에서 나고 자란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다. 심지어 유럽 본사가 있는 독일로 발령을 받는 순간, 나는 그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마치 숙명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그가 걸었던 거리, 그가 올려 다 보았을 대성당을 나도 걷고 보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나의 삶을 바꾸었다.
26.
입대를 앞둔 그 시절, 나는 연거푸 대학 입학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흩어졌다. 아버지는 부동산 사기에 연루되어 도망자 신세였고, 누나는 교환학생 핑계로, 미국으로 도망치듯 가더니 연락 두절이었으며, 어머니는 이모 집에 얹혀살았다. 어머니보다 여섯 살 어린 이모는 시장에서 청과물 가게를 하였다. 맞은편에는 이모부의 어묵 가게가 있었다. 어머니는 착한 이모의 도움으로, 가게 한쪽 구석 자리를 얻어 채소를 팔며 근근이 살았다.
나는 삼촌의 도움을 받았다. 삼촌은 지방의 한 국립대학 정문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식당은, 낮에는 분식점이었지만 저녁에는 주점을 겸하였다. 나는 낮에는 입시 학원에 다니고 밤에는 식당 서빙을 새벽 2시까지 하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해야 할 형편이었다. 부모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은 오래전에 끊어진 상태였다. 내가 기댈 언덕은 여기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들어갈 방법은, 누나처럼, 수석 입학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던가, 아니면 바로 이곳 국립대에 들어가서 삼촌 일을 거들며 학비를 버는 것뿐이었다. 물론 전자의 방법은 내 실력에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음악에 미쳤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을 가려는 이유도, 그때 당시 한창 인기가 있었던 대학 가요제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늘 무대 위에 서서, 반주에 맞추어 고개를 격렬하게 위아래로 흔들며 열창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입시 학원 종합반으로 다니다가 단과반으로 몰래 옮기고 남는 시간에는 기타 학원을 수강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절대 비밀이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뿐인 아들이 딴따라가 된다는 것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삼촌에게 맡기면서 몇 번이고 강조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삼촌이 살뜰하게 나를 챙기거나 꼼꼼하게 감시할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나는 비교적 자유롭게 두 개의 학원을 마치고 제시간에 맞추어 식당에만 나타나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