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og Guy In A Digital World

음악, 상념

by 남킹

Martin Roth - An Analog Guy In A Digital World


https://youtu.be/ZwFbDbETXzM

새벽 1시. 도로는 젖는다. 오래된 도시의 밤은 무관심하다. 어둠이 들면, 사람들은 서둘러 문을 닫고, 거리를 내 버려둔다.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바람. 적막함. 친근한 젖음.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경적. 노란 가로등 불빛 속으로 눈물 같은 비가 쏟아진다.


어둡고도 깊은 재즈바의 입구에서 일행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즐거움에 비실거린다. 그들이 발산하는 깊은 연대감이 부럽다. 껴안거나 치거나 건드리거나 웃고 달아난다. 비에 젖은 도로가 아주 기이하게 축 처져 있다. 그들은 서로를 응시하며 멈칫거린다. 격자무늬 입을 한 차량이 끈적거리며 지나간다. 일행 중 한 명이 주저앉으려 한다. 그를 부축하는 나머지가 뒤엉킨다. 웃음과 묘한 함성이 터진다. 누군가는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비가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진다. 허둥지둥 그가 다시 나온다. 파안대소. 제비꽃이 그려진, 붉은 벽돌집 테라스로 그들이 몰려간다. 인적이 사라진 거리. 비에 젖은 전단이 너덜너덜하게 구석에 처박혀있다. 그들은 담배를 주고받는다. 드디어 누비 잠옷 같은 잠바를 걸친 사람이 내게 비실거리며 다가온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한군데 더 갈 수 있을까요? 추가 요금은 드리겠습니다만….” 재즈 패거리의 리더인 그는 묘한 웃음을 띤다. ‘냉정하게 잘라야 해. 특히 마지막 날. 본전 뽑으려고 득달같이 달려든단 말이야.’ 선임 가이드의 예측대로 그들은 이국땅에서의 마지막 밤을 꼴딱 새울 생각이다. 나는 망설인다. 이 순간, 내 표정이 어떨까? 모든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숱한 작은 것들로 이어진다. 순간은 느리고 말할 수 없이 상세하다. 시간을 곱씹어야 한다. 서두르거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버리면, 하찮은 일들에 익숙해져, 어느새 잊힌다. 기억이 지워진다. 내가 사랑했던 그들의 모습이. 다만 조각만 달라붙어 빗물에 반사될 뿐.


“어디로?”

“...” 이번엔 남자가 망설인다. 그의 표정에 부끄러움이 배어있다. 빗소리가 강해진다.

“혹시 FKK라고 들어 보셨나요?” 잘 알고 있다. 택시 광고판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곳. 시내 대형 세움 간판에도 버젓이 추켜 올라가 있다. 젊은 음악가를 내내 사로잡은 욕망. 성욕. 젊은이여. 부끄러워 마라. 이방인이 맞이하는 마지막 날은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게 되어 있는 법. 그래. 우린 서글프게도 인간이잖아. 당연하게도.


“네, 어느 FKK로?” Freikörperkultur (FKK). Free Body Culture. 나체주의. 독일 나체주의 운동의 한 가닥은 사우나식 매춘으로 변질되었다. 아니 바뀌었다.

“어느 곳이든…. 추천해주세요.”


로마풍의 아치가 입구를 장식했다. 간결하지만 정갈한 모습. 간헐적으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맞은편 거리는 은은한 불빛과 잘 깎여진 수목들이 정연하다. 꼭대기 합각머리에 검투사가 장식되어있다.

“같이 들어가시죠. 어차피 꽤 기다려야 할 텐데…. 입장료는 내 드리겠습니다.” 리더는 어색하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일행의 뒤를 따른다. 구부정하게 이어진 자갈길. 사각거리는 발소리. 담벼락 마디 끝에 장식한 불길이 일렁거린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젊은이들의 감탄이 이어진다. 천국이 따로 없다. 여인들은 모두 벗었다. 가까이 머물던 그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를 향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당혹스럽다. 몇 안 되는 남자들은 수건만 걸친 채 앉아 있거나 돌아다닌다. 심장이 빨라진다. 시선은 끊임없이 사방을 맴돈다. 호사스럽게 장식된 하얀 천장. 각각 다른 각도로 조명하는 갈색 조명.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웠다. 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강하게 파고드는 욕망. 과거 어느 시점에 딱 멈춰버렸던 것이 꿈틀거린다. 여인들은 한결같이 깨끗하고 이쁘다. 주체할 수 없는 욕구가 내 발밑에서 딸각거리며 돌아다닌다. 늘 처져 있던 몸뚱이들이 달아오른다.


사우나에 들어선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열심히 몸을 씻어 재끼더니 서둘러 빠져나간다. 혼자 남겨졌다. 흐린 거울에 닳고 더러워지고 주름이 잡힌 얼굴이 보인다. 세월처럼 늘어진 턱선. 포장 속 내용을 알아 버리자 갑자기 나가기가 두려워진다.


수건을 배에 두른 채 사우나를 빠져나온다. 나는 서둘러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는다. 감미로운 음악이 홀은 적신다. <Martin Roth>의 <An Analog Guy In A Digital World>.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들은 앉거나 서 있다. 걷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는다. 돈과 욕망. 그리고 흥정이 이어진다.


모퉁이에 머뭇거리던 여인이 나체로 다가온다. 짙은 마스카라와 마젠타색 입술을 하였다.

“할로!” 그녀는 막 공허에서 깨어난 듯 몽환다운 미소로 말을 건다. 몸에 걸친 거라곤 팔찌와 달각거리는 슬리퍼뿐. 흥분이 컥 하며 숨을 막아선다.

“할로.”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문장(紋章) 속의 수선화가 그려진 우윳빛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에 일렁이는 야외 수영장 물결. 다리가 짧은 갈색 닥스 개가 벗은 주인 옆에 누워있다. 독특한 발걸음과 특유의 사투리가 섞인 독일어가 전해진다.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그녀가 어색하게 몸을 뒤틀며 옆자리에 앉는다. 몸짓이 표현하는 끈적거림. <마네>의 <올랭피아>를 보는 듯하다.

“한국에서 오래전에.” 나는 비로소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투명한 푸른색 눈이 반짝인다. 빗소리가 들린다. 사람은 추억을 위해 나이를 먹어야 한다. 그녀의 눈이 마치 무지개처럼 느껴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Paolo Conte - It's wonder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