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meji's Theme

음악, 상념

by 남킹

Shigeru Umebayashi - Yumeji's Theme


https://youtu.be/K559UjlOx_M

마침내 그들의 저녁이, 긴 시간 끝에 끝났다. 나는 이제 승객을 태우고 숙소로 향한다. 프랑크푸르트 외곽에 있는 반달 모양의 호텔. 거리는 한산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투박한 야경이 길옆으로 펼쳐진다. 흐릿한 가로등. 젖은 도로. 인적은 사라졌다. 검은 가로수가 펄럭인다. 외로운 차들이 붉은빛을 밝히며 빠른 속도로 스치듯 사라진다.


승객들은 낯선 풍경에 무관심하다. 낮고 긴 톤의 대화가 이어진다. 익숙한 그들의 언어가 생소하게 들린다. 마치 서울의 사무실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하다. 아무도 오랜 시간의 여행 끝에 도착한, 유럽의 도시에, 비 내리는 야경에 대한 호기심을 허락받지 않은 듯하다. 늦은 밤. 그들은 모두 진지하고 심각하다. 조용하던 대화는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점점 커지고 거칠어진다. 질책과 비난, 모호한 반론이 섞인다.


이윽고, 모퉁이를 돌아 호텔 정문이 보이는, 둥근 주차 공간에 차를 멈추었다. 하지만 아무도 내릴 준비를 하지 않는다.


“저 죄송하지만, 가이드 아저씨. 추가 요금은 드릴 텐데, 여기서 회의를 좀 더 하겠습니다.” 그들은 감히 안락한 방으로 가기를 주저한다. 서글픈 인간들. 석고처럼 단단한 얼굴. 그들의 이면을 집어삼키는 살아간다는 행위. 목적을 알 수 없는 구속. 죄송하게도 세상은 당신처럼 천천히 조금씩, 아무도 모르게 찢어지고 있다. 상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처량한 안개 비가 내린다.


나는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린다. 빗방울이 얼굴에 내려앉는다. 백미러에 비친 그들은 온전히 일에 미친 사람이다. 워크홀릭을 삶의 최상위로 떠받드는 나라. 시간도 잊은 듯, 시차도 잊은 채, 오랫동안 그들은 좁은 차 안에서 격정적인 토론을 이어갈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어쩌면 몰아의 행복 같은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호텔 로비에 있는 카페로 향한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주문하고 무거운 눈으로 미팅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서글프지만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기다림은 생각의 방향을 속으로 바꾸어 버린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흘려 놓은, 긴 그림자 속에서, 나의 유년 시절은 미지의 날들을 손꼽았다. 재회의 설렘. 하지만 시간은 그마저 흩어버렸다. 만남은 이별처럼 고통이었다. 그것은 우연하여도, 예정되어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켜켜이 고통을 쌓아둔다.


8일간의 이탈리아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두툼한 편지봉투에는 낯선 주소의 생소한 이름이 찍혀있었다. 마치 기독교 선교 단체 같은 데서 보낸 책자처럼 느껴져 봉투를 뜯지 않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피곤함을 느낀 나는 책상 위에 편지를 휙 던지고는 샤워실로 향하였다.


그렇게 며칠 동안 나는 그 편지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낯선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안녕하세요. 변호사 슈미츠라고 합니다. 통화가 가능하신가요?”

“네 가능합니다만 누구신지?” 나는 변호사란 말에 순간적으로 자동차를 떠올렸다. 작년에 뺑소니차에 연루되어 한동안 변호사 신세를 진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 네, 저는 카타리나 씨의 유언 집행 변호사입니다. 카타리나 씨를 혹시 기억하는지요?”

나는 순간적으로 <유언>이라는 생소한 단어에 혼란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독일어가 좀 서툽니다. 이해해주시고요. 하지만 유언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혹시 유언이라면….”

“아 네 먼저 그 말씀부터 안 드렸군요. 불행하게도 카타리나 씨가 4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죽었다고요?”

“네 고인이 되셨습니다. 혹시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지병으로 몇 년간 고통받으셨습니다. 일종의 신장 쇼크사로….”


가슴이 휑하니 사라진다. 나는 그날 밤, 그녀와 보낸 마지막 하루를 몸으로 끄집어내곤 한다. 새큰거리는 숨소리. 시계는 멈추고, 시간은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처럼, 애정을 담은 채, 간절하게 흐른다. 시린 무릎에 감긴 여인은 나직하게 웅얼거린다. 알 수 없는 말. 그러나 그녀가 내뱉는 탄성은 지루한 나를 깨운다. ‘삶은 그냥 딱 한 번이야! 그러니 그다지 미련스럽게 주저할 필요 없잖아.’ 부드러운 그녀의 손끝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으며 아래로 내려간다. 내 몸에 새겨진 길을 따라 환희가 번진다. 그냥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내 속을 채우던 격정이 아낌없이 삐져나온다. 비틀고 뒤틀리고 쏟아진다. 방안을 채우는 격렬한 소리. 여자는 무섭게 안긴다. 그녀가 부르르 떤다.


세월은 내 기억에 대한 확신을 가렸다. 무엇이든 남겨진 것은 그리움뿐. 조각조각 그저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순간. 그 찰나는 이제 이슬이 되고, 엮이고 줄이 되어 비로 흘러내린다. 가닥 가닥을 수 놓은 후회 덩어리.


내가 봉투에서 꺼내 든 것은 낡은 일기장이었다. 중간을 펼치자 다양한 크기의 단어들이 여러 방향으로 그려져 여백을 꽉 채우고 있다. 불어와 영어, 독일어가 마구 섞였다.


나는 한 장씩 읽어나간다.

‘나는 사랑하고 널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싶은데…. 코제트야.’

나는 서둘러 다른 장을 이곳저곳 펼친다.

‘어쨌거나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을 거야. 코제트.

그러니 엄마를 애써 기억하는 수고는 하지 말길.

하지만 엄마의 진짜 이름 정도는 알아 두어도 무방하겠지.

박순임 (Park Soon Im)’


비가 5번 아우토반을 적신다. 낮이지만 어두운 거리. 나는 무언가에 끌리듯, 그 어두운 공간을 뚫고 간다. 마치 온전한 그리움으로 가는 느낌이다. 비가 창에 톡톡 튀며, 내 곁을 지나 빠르게 흩어진다. 나는 그저 외로움과 그리움에 합당하게 반응한다. 그건 세상이 내게 준 의미이자 비밀스러운 약속이다. 스치는 숲. 바람. 조각구름. 끝을 알 수 없는, 구부러진 길. 완곡의 산을 지나 소담스럽게 마주치는 작은 마을. 벽돌집. 골목과 성당. 카페와 사람. 그리고 추억.


누구든 그리움은 있는 거니까. 너 또한 그리움의 대상일 거야. 그리고 이건 아주 짧게 끝날 거야.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니까.


점점이 흩어지는 아름다운 여인. 어머니, 할머니, 이모, 아내, 딸, 안나 그리고 순임. 나는 그저 이방인의 도시에 남아 거리를 달린다. 흐름에 떠내려갈 뿐. 그리고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


지그문트 거리의 카페에 다시 왔다. 변호사의 편지에 적힌 그곳. 박순임의 딸, 코제트가 입양된, 그 집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나는 지금, <우메바야시 시게루(Shigeru Umebayashi)>의 <유메지의 테마(Yumeji's Theme)>를 듣고 있다.


내 그리움의 종착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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