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5

by 남킹

건너 주차장 쪽에서 과장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는 우산을 펼치고 차에 탄 누군가에게 손을 흔든 뒤, 차 문을 닫는다. 차는 천천히 오던 길을 돌아서 대로를 꽉 채운 차들 홍수 속으로 빠져든다.


과장은 본사에서 좌천된 인물이다. 좌천이라는 표현에 약간의 의구심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입사 동기 중 가장 빨리 과장으로 승진했고 본사 인사 부처라는 핵심 요직에 근무하던 이가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와 한직에 불과한 품질관리 부서를 맡게 되었다면, 누가 봐도 이건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꼴이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여러 가지 설과 알 수 없는 풍문들이 꼬리를 물고 돌아다닌다.


그의 독주를 두려워한 동기들의 모함이라는 설에서부터 회사 실세인 부회장의 딸을 건드렸다는, 터무니없는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소문까지 퍼졌다.


여직원들은, 화장실, 복도, 계단, 옥상, 탕비실, 혹은 회식 자리에서든 가리지 않고 그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전파하고 채색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 이면을 잡아끄는 이러한 관심에는 틀림없이 그가 아직 미혼이고 한때 전도유망한 젊은이였으며, 추락이 가져다준 동질감 내지는 연민이 짙게 깔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태연하다. 상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직원에게 친절하며 또한 성실하다. 그는 본래부터 이 자리가 그의 것이었으며 세상의 야망이나 욕심에는 태연한 듯 살짝 비켜주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열 명쯤 모인 회식 자리에서 그는 항상 미소진 모습으로 앉아 있다. 낯가림이 심해, 이야기를 이끌지도, 주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농담도 주고받지 않은 채, 귀를 기울이고 조용히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모두가 웃으면 함께 웃기만 한다.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태생의 기품이 서려 있다.


그래서 나의 사무실에 있는 남자 둘은 한직으로 밀려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으나, 그 분자는 판이하게 상반되었다.


하나는 말초적 본능에 사로잡혀 혀끝과 손끝을 잘못 놀리는 바람에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혀 끝없는 입방아에 올라 있다면, 나머지는 세상의 모함과 부조리에 희생된 양으로 전락하여, 여자들의 지속적 동정과 관심을 한몸에 받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과장에게 여자가 나타났다.


그 징조는 그의 책상에 라벤더가 놓이고 나서다. 두 달 전 어느 날 갑자기 여자가 나타나서는 그 곁에 계속 머무는 것이다. 여자는 오전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남자를 회사에 데려다주고 퇴근 시간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나타나 그를 데려간다. 즉, 동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둘 직원들의 목격담이 늘어나고 그에 곱절이나 해당하는 소문들이 무성하게 부풀려 번져갔다. 가뜩이나 눈엣가시처럼, 저와 다른 부류의 인간들에게 느끼는 시기와 질투로 똘똘 뭉쳐, 탐탁지 않게 여기던 부장은, 과장이 자리를 비우면, 예의 그의 내연녀에게 전화를 걸어, 어둡고 칙칙한 온갖 종류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의 입에서 과장은 천하의 호색한으로 그려지고 반사회적 불륜으로 총칭되는 것이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부장의 태도는 불량스러워지고 말버릇도 고약하여 요즈음은 노골적으로 깔보는 듯하여 지켜보는 나를 안쓰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홀대를 바보라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장은 여전히 온화하고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러기에 미스테리한 그 여인에 대한 궁금증만큼이나 나는 그의 처지가 너무도 안타깝다.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나쁜 놈 전성시대가 되었다.


나쁜 놈이 더 잘 벌고 더 잘살고, 나쁜 놈이 권력을 더 많이 지닌 것처럼 보였다. 비열한 거리에는 비열한 인간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많이도 활개 치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


피곤한 몸을 겨우 이끌고 집으로 갔을 때, 아버지가 전기밥솥에 쌀을 안치는 모습을 보았다. 거적때기 같은 옷. 눈가에 몰린 잔주름과 이마를 덮은 굵은 주름, 잠을 잘 자지 못한 듯한 퀭한 눈을 나는 물끄러미 쳐다봤다. 갑자기 콧날이 메워져 나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밥을 한다는 것은 오빠가 돌아왔다는 뜻이다. 오빠는, 부엌에서 꺾여 붙은 뒷간 방 침실에 널브러져 자고 있다. 땀에 전 잠바가 구석에 내팽개쳐 있다. 눅눅해진 이불 냄새와 지린내가 코를 얼얼하게 만든다.

아궁이에서 퍼져 나온 연탄 냄새와 도살장에서나 맡을 수 있는 비릿한 피 냄새도 섞여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잠바를 집어 벽에 박은 못에다 걸었다. 빨지 않은 옷에서 나는 악취가 마치 내 몸을 홡아 내리는 듯 소름이 끼쳐 온다.


오빠의 몸은, 싹이 터서 썩기까지의 모든 생명의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모든 냄새를 흡입한 해면동물처럼 느껴졌다.


밥 냄새를 맡았는지 오빠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눈을 뜬다. 잠깐 눈을 껌뻑거리더니 부스스 일어나 밥상 곁으로 다가온다. 오빠가 나를 보고는 싱긋 웃더니 가져온 가방을 열어 보라고 한다. 한 뭉치의 돈다발이 나왔다.


가끔 돈뭉치를 들고 개선장군처럼 올 때가 있다. 큰 거 한방 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제 완전히 손 끊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나의 폐부만 찌른다. 그는 절대 끊지 못할 것이다.


그는 며칠 뒤 다시 떠날 것이고 예전처럼 빈털터리로 돌아올 것이다.


오빠는, 수 없이 반복했고 또 앞으로도 더 많이 반복할, 실행 불가능한 그 결심을, 마치 처음인 양, 기대에 부푼 표정을 오롯이 담은 얼굴로, 게걸스럽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유심한 나날을 사느라고 각축하고 고달픈 내 가족들의 저녁 시간은 이렇게 무심한 동상이몽으로만 흘러가고 있다.


저녁이 끝나자 부자는 서둘러 집을 나선다. 그들은 새벽 어스름이 될 때까지, 너무도 사랑하는 개 수육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실 것이다. 떠나기 전 오빠는 용돈 하라고 한 뭉치의 돈을 내게 던져 준다. 순간 오빠의 표정에서 묘하게, 떠나간 남자의 실루엣이 교차한다.


그들은 내게 준 돈보다 더욱 많은 돈을 두고두고 내게서 빼가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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