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빅토르 흘라디는 담배 냄새에 눈을 떴다. 이어 딸깍거리는 소리에 진한 커피 향이 몰려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늘 익숙한 아침 풍경이지만 그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소피아! 제발 창문 좀 열고 담배 피워!
지금 창문을 연다고? 맙소사! 당신, 날아가고 싶은 거야?
빅토르는 눈을 살짝 떴다. 그리고 좌측 전면을 온통 차지하는 창을 바라봤다.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 놓은 가로수가 미친 듯 춤을 췄다. 멀리 보이는 숲은 웅성거리고 있었다. 가까이에는,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 몇 명이 벽면 구석에 둘러선 채 불안한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휴, 중독이 뭔지? 이런 날에도 저렇게 한 모금 빨려고 저 고생을 하고 있으니.
빅토르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는 새벽 다섯 시에 겨우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실험이 계속해서 실패했다. 머릿속이 마치 스파게티처럼 얽히고설켰다. 미적분학, 행렬 대수학, 상미분 방정식, 푸리에 변환 등의 수학적 도구와 알고리즘이 그를 갉아 먹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시한폭탄 같았다. 그런데 담배 냄새가 다시 그의 후각을 맹공격했다.
소피아! 제발! 담배 좀 끄란 말이야! 내 머리가 터질 지경이야!
빅토르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손가락에 달린 담배를 뺏어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담배꽁초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듯 한줄기의 푸른 연기를 뿜으며 숨을 거뒀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소피아의 입술이 빈정거림으로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이 저급한 사기꾼 같은 녀석아!
뭐? 사기꾼이라고?
그래! 이 변태 같은 자식아! 이 집에 올 때 너 입으로 뭐라고 씨부렁거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 이 바보 새끼야!
빅토르는 그녀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3년 전, 술집에서 첫눈에 소피아에게 홀딱 빠졌던 그는 이내 그녀의 상태를 파악하였다. 그녀는 술과 담배, 커피와 섹스에 빠져 있었다. 이미 예정된 불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미치도록 좋았다. 마치 좌석 같다. 정확히 정반대의 세상에 사는 음극. 양극의 무모한 끌림은 모든 것을 포용했다.
소피아! 이 집에서 내 눈치 볼 것 없어. 알았지! 너 하고 싶은데로 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너만 있으면 돼!
*************
다섯 형제 중 넷째인 빅토르는 다른 형제와 달랐다. 그는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외톨이였다. 외모도 달랐다. 그는 작고 깡마르고 약간 구부정했다. 다섯 형제 중 누가 봐도 그는 돌연변이였다. 그의 출생은, 그러므로 부모에겐 갈등의 씨앗이었다. 그가 세 살이 되던 해, 막내 세르게이를 출산 한 어머니는 집을 나가 버렸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빈 보드카 병이 집안 곳곳을 채웠다. 그러므로 집안의 중심은 첫째 형 니콜라이였다. 그는 폭력으로 동생을 다스렸다.
빅토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쯤, 흘라디 형제는 시시포스 시에서 두 가지로 꽤 유명하였다. 니콜라이의 뛰어난 사업 수완과 빅토르의 천재성. 빅토르는 물리학과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는 집이 무서웠다. 아버지와 형 니콜라이가 두려웠다. 그는 학교가 파하면 도서관과 실험실에 틀어박혀 뉴턴의 운동 법칙, 키네마틱스, 다양체와 벡터 해석을 공부하고, 토르크 및 관성 모멘트, 제어 이론과 같은 엔지니어링 수학 개념도 들여다봤다. 그는 더 나아가 상태 공간 모델링, 라플라스 변환, PID 제어 등의 수학 개념을 응용하기 시작했고, 확률과 통계, 최적화 이론 등의 수학적 기법을 활용하고 디지털 신호 처리, 필터링, 확률론적 신호 처리 등의 수학적 원리를 응용했다. 이 외에도 전기공학, 물리학, 컴퓨터 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파고들었다. 그는 춥고 쓸쓸한, 도서관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악착같이 공부했다. 그는 현실의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해결했다.
이즈음, 그의 학문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정육점 주인 딸, 이리나였다. 초등학교 단짝이었던 그녀와의 인연은 중학교, 고등학교에도 같은 반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외골수 천재였던 빅토르와는 달리 그녀는 무척 활달하고 외향적이었다. 그녀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차고 넘쳤다. 그 틈을 비집고 빅토르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는 늘 그녀를 바라보지만, 그녀의 반짝이는 눈은 항상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 머물렀다.
*************
소피아! 미안해. 그냥 일이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빅토르가 한발 물러서며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소피아의 시선은 오른쪽 벽면을 꽉 채우고 있는 와인 진열대로 쏠렸다. 그녀는 진열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로얄 드마리아 병을 잡더니 익숙하게 병을 땄다. 그리고 와인 잔에 가득 부었다.
미안해 여보. 정말 미안해.
빅토르가 소피아의 목에 키스했다. 그리고 손끝으로 그녀의 앞머리를 살며시 쓸어 넘겼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한 어떤 반응도 없이 와인을 맥주 마시듯이 꿀꺽꿀꺽 삼켰다. 그리고 빈 잔을 탁하고 탁자에 놓았다. 그녀는 다시 잔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뺨이 씰룩였다.
소피아. 이제 그만해. 제발.
빅토르가 그녀의 허리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리고 술잔을 뺏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와인 잔이 그녀의 손에서 튕겨 나와 사방에 피를 토하며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내게 손대지 마! 이 더러운 개자식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 소피아는 이제 와인 병을 통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이 일정한 간격으로 꿀떡꿀떡했다. 비가 바람을 안고 격렬하게 쏟아졌다. 입에서 삐져나온 한줄기 와인이 그녀의 목을 타고 피처럼 흘렀다. 피는 그녀의 반투명 실크 잠옷을 적시고 가슴을 물들이고 다리를 쓰다듬으며 마침내 바닥에 고여 똬리를 틀었다. 그동안 빅토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빈 곳. 텅 빈 가슴. 그곳으로 그에게 익숙한 고통이 채워졌다.
*************
빅토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초청장을 받았다. 학교가 들썩거렸다. 개교 이래 이런 경사는 처음이었다. 유럽 변방의 자그마한 도시이기에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그는 이제 시시포스에서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불안하고 슬펐다. 그의 마지막 학기였다. 어쩌면 이리나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급했다. 그는 생에 처음으로 연애편지를 썼다.
그 편지의 내용을 아는 이는 그의 동생 세르게이뿐이다. 왜냐면 그가 직접 이리나에게 편지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이후 세르게이는 형의 심부름을 몇 번 더 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리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녀는 빅토르를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여인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시간은 겨우 한 달이었다.
짧은 시간은 그들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빅토르는 처음으로 형 니콜라이 사무실로 찾아가 돈을 빌렸다. 금반지와 꽃다발을 샀다. 그리고 둘째 형 올리거에게 부탁하여 근사한 레스토랑과 호텔을 한 달 예약했다. 그가 영국으로 가기 전, 한 달은 그의 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
빅토르는 무겁고 지친 걸음으로 실험실로 향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의식이 회오리치다 이내, 통증으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통은 혈관을 타고 몸 전체로 내려가면서 세포를 쥐어짜고 있었다. 그는 자조 섞인 신음을 냈다. 소피아는 그에게 늪이고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곧 버림받게 되리라는 것도 직감하였다. 이리나처럼.
실험실 책상에는 신입연구원 이력서가 놓여 있었다. 세 명의 각기 다른 후보자들의 신상이 관련 연구 논문과 함께 인쇄되어 곱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빅토르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수개월째 실패로 이어지고 있는 자신의 실험과 소피아 문제만 해도 머리가 빠개질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니터에 달린 세 개의 카메라에 얼굴과 두 손바닥을 갖다 대어 인증 절차를 수행했다. 곧이어 일곱 개의 모니터에는 수많은 데이터가 각자의 양식으로 펼쳐졌다. 그는 빠르게 모니터를 훑어가며 전날 실험의 오차에 관한 교정 작업을 시작했다. 익숙함과 편안함이 묘하게 그를 위로했다.
그래, 수학만이 나를 위로해주지.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오직 숫자만이 나를 알아보지.
그는 점점 숫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계산과 수식을 읽고 있는 동안 반짝이며 차분하고 집중력 있게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숫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를 보여주었다. 마치 무한한 우주 속에서 은하들을 탐험하는 이들처럼, 그의 사고는 끊임없이 추상적인 개념과 논리적인 규칙들 사이를 여행했다. 논리적인 접근과 분석적인 사고가 그의 특기였고, 수학의 신비한 세계에 푹 빠져 있을 때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고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숫자와 수식은 그에게 익숙하고 친숙한 언어였지만,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인간의 감정과 상호작용은 그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수학과 숫자에 빠져 있는 동안 흔히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의 제약과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그는 숫자와 수식을 통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마음속에 있는 무한한 아이디어들을 형상화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로소 페가수스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날갯짓은 연구소장 블라디미르의 등장으로 곧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흘라디 박사님. 이번 신입연구원 누가 마음에 들어요?
아, 네, 그게, 저, 그러니까….
빅토르는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난 아이처럼 제대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력서를 보지 않았군요?
블라디미르는 빅토르의 표정을 정확히 해석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 연구소 창립 멤버로 지금까지 동고동락하고 있었다.
네, 아직….
두 시간 뒤에 면접이 잡혀 있는 것은 알고 계시죠?
연구소장은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소장님.
빅토르는 모니터 한쪽 귀퉁이에 표시되어있는 디지털시계를 확인하며 답했다.
이번에 아주 흥미로운 친구가 지원했어요. 아마 흘라디 박사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아, 그런가요?
네, 확신합니다. 이력서 한 번 보세요. 우리 박사님만큼 화려합니다. 수학 관련 상이란 상은 모조리 싹쓸이 한 친굽니다.
연구소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빅토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실험실 문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돌아서며 말했다.
아, 그 친구 출생지가 우리 박사님과 같더군요.
그럼, 시시포스?
네, 맞아요. 시시포스. 아무튼 축복받은 도시라니까. 코딱지만 한 시에서 이렇게 천재가 줄줄이 나오다니….
연구소장은 혀를 끌끌 차며 실험실을 나갔다. 빅토르는 황급히 이력서를 찾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름 : 나타샤 필라토바
나이 : 17세
성별 : 여자
출생지 : 시시포스
오데사 중앙 고등학교 졸업.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 학사.
ETH 취리히 인공지능학과 석, 박사….
*************
빅토르는 옥스퍼드에서 무척 단순하면서도 바쁘게 살았다.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틈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모았다. 사실 그의 학비는 첫째 형 니콜라이가 매달 보내는 돈으로 충분하였다. 그가 따로 모으는 돈은 순전히 이리나와 함께 하기 위함이었다. 방학 때 그들은 영국 전역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일종의 신혼여행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이리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정육점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틀어졌다.
동네에 대형 할인점이 생겼다. 지하, 지상 5층, 옥외 주차장을 제외한, 4층까지 매장으로 가득 채운 할인점은 그야말로 제품의 천국이었다. 정육 할인 코너에는 유럽 전역에서 생산한 값싸고 품질 좋은 육가공품이 신선한 냉장고 바람 속에 고객을 유혹했다. 그 여파로, 성당 앞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줄지어 늘어섰던 작은 가게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리나 아버지는 사채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육점 직원이 모두 떠났다. 그 자리를 이리나가 메웠다. 자연히 빅토르와의 만남이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빅토르는 이리나에게서 결별 편지를 받았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지 2개월 후였다. 빅토르는 만사를 제쳐두고 시시포스로 향했다. 절망과 분노가 그를 휘어잡았다.
*************
그런데 왜 그레고리야? 왜 하필이면 형을 택한 거냐고?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 형이 어떤 인간인지. 시시포스에서 형이 집적거리지 않은 여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왜 하필이면 그런 인간을 사랑하는 거냐고?
당신 말이 맞아요. 빅토르. 그레고리는 천하의 바람둥이죠. 하지만….
하지만?
내 아버지를 살린 사람이잖아요.
그깟 돈! 내가 갚는다고 했잖아! 조금만 참으면 내가 다 갚는다고 했잖아!
당신이 갚을 수 있을 만큼의 적은 돈이 아니에요! 빅토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형 니콜라이에게 찾아가서 사정할 수도 있었단 말이야!
바보같이. 당신도 알잖아요. 니콜라이는 우리가 사귀는 것을 싫어해요. 불쌍한 빅토르.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줄을 모르고 있어요. 당신은 시시포스가 선사한 축복이에요.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당신만 모르는 거예요. 저는 그냥 하찮은 정육점 집 딸일 뿐이에요. 언젠가 당신의 발목을 붙잡을 거예요.
멍청한 소리.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오직 너뿐인 거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하지만 당신은 내가 임신한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였잖아요.
그건, 젠장. 이리나. 내가 아직 학생이고 여전히 니콜라이에게 손을 벌리는 신세잖아. 내가 자립하게 되면, 그때가 되면, 우리는 얼마든지 아기를 낳을 수 있잖아.
불쌍한 빅토르! 나는 단지 그날, 당신에게 임신한 사실을 말했을 때 그때의 당신 표정을 본 거예요. 빅토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그 어두운 표정을 본 거란 말이에요. 당신은 너무 순진해요. 당신 얼굴은 숨김없이 당신을 나타내요. 알겠어요? 당신은 혼란스러워했어요. 우리의 첫 번째 아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레고리를 찾아간 거야? 그 바보 같은 바람둥이에게 간 거냐고? 응? 말해봐! 그래서 그가 네 아버지 빚을 탕감해준다는 조건으로 당신을 호텔로 불러내 당신을 짓밟도록 놔둔 거야? 그런 거야?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그는 그날 내게 손조차 잡지 않았어요! 당신 형은 내가 누군가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정적으로 도와주려고 했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매달렸어요. 제가 같이 살자고 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나는 그레고리의 선한 마음을 그날 본 거예요.
*************
면접장은 연구소장실 옆 회의실이었다. 세 명의 후보자가 정장 차림으로 대기실에서 서성거렸다. 빅토르는 그들을 한 번씩 훑어보고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연구소장과 부소장은 이미 중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빅토르는 연구소장 옆에 앉아 이력서를 펼쳤다. 곧이어 안내원이 후보자 한 명을 호출하였다. 왜소한 체격의 어린 소녀가 살포시 들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연구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름은?
나타샤 필라토바입니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곳 섬까지 오신다고 수고했습니다. 뱃멀미는 하지 않았나요?
네 하지 않았습니다. 제 조상이 어부인지라 유전적으로 멀미에는 강합니다. 아무튼 덕분에 흑해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실컷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연구소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옆에 앉은 빅토르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여기가 무엇을 연구하는 곳인지는 알고 있나요?
네, 오기 전 인터넷을 좀 뒤졌습니다.
좋습니다. 공개된 자료 외에 이곳 연구소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우선, 흑해 연안 기업이 공동 출자한 군사학 연구소입니다. 그렇다고 무기를 직접 만들거나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반이 되는 기초 학문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ICBM. 즉 대륙간 탄도 미사일 (ICBM)을 개발한다면 우리는 미사일의 운동, 비행경로, 궤도 추적, 힘의 역학적 요소, 엔진 추진제와 제어 시스템, 회로 설계, 연소화학 반응,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구현하기 위한 물리학, 역학, 수학, 전기공학, 물리화학, 컴퓨터 과학과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와! 무척 많은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군요.
그렇죠. 그래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기 모여 있는 겁니다. 나타샤 씨는 인공지능에 대하여 무척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네, 맞습니다. 어릴 때는 벡터, 행렬, 선형 변환 등 선형 대수학과 미적분학, 확률 및 통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에서는 정보 이론과 최적화 이론, 그래프 이론들을 배웠습니다. 취리히에서는 선형 회귀 및 분류 모델에 관한 기초적인 수학 개념과 알고리즘을 연구하였고요, 최근에는 딥러닝 알고리즘에 대한 이해와 자료 구조를 연구하면서….
혹시 아버지 이름이?
드디어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빅토르가 그녀에게 물었다.
네? 아 아버지는 일리아 필라토바입니다.
나타샤는 느닷없는 질문에 살짝 당황하였다.
연구원을 뽑는데 아버지 이름을 왜 물어보지?
혹시….
빅토르는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듯 질문을 이어갔다.
혹시, 이런 질문을 하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 혹시 생부인가요?
...생부가 아닙니다. 저의 생부는 꽤 오래전에 실종되셨습니다.
혹시, 그분의 성함은?
그레고리입니다. 그레고리 흘라디입니다. 그런데 혹시 저를 아시는 건가요?
나타샤는 미소를 풀지 않은 채 빅토르를 쳐다봤다. 나타샤의 눈이 무척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