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시포스

시시포스 1

by 남킹


1부

세르게이 흘라디는 진동에 눈을 떴다. 하지만 한참을 누워 있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입에서 시멘트 가루가 씹혔다. 천장을 보니 어제보다 더 갈라져 있었다.

젠장 여기서 더 자기는 글렀네.

그는 억지로 상반신을 세웠다. 발밑에 검은 비닐이 채였다. 하얀 구더기 몇 마리가 한가로이 비닐 속과 겉을 돌아다녔다.

구더기보다 못한 인생.

그가 막 일어서려는 순간, 폭발음과 함께 맞은편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속절없이 쓰러졌다. 눈이 따끔거리더니 세상이 붉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이 온통 유리 조각이었다.

젠장, 그냥 방공호에서 자는 거였는데.

그는 바닥을 짚은 손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억지로 다시 몸을 세웠다. 공간이 온통 저녁노을에 싸인 것처럼 보였다.

*************

세르게이는 절뚝거리며 거리로 나섰다. 유리 조각을 빼낸 무릎에서 피가 흘렀다. 도시는 어제보다 좀 더 망가졌다. 교회 종탑이 구겨진 채 보도에 뒹굴었다.

이제 시끄러운 교회 종소리를 들을 일은 없겠구먼.

거리는 조용했다. 움직이는 것은 그와 개뿐이었다. 앙상한 몰골의 개는, 세르게이의 피 냄새에 끌려, 본능적으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세르게이는 주머니에 있는 칼을 만지작거렸다. 녀석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면 칼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그는 사흘을 내리 굶었다. 그저 보드카 한 잔 얻어 마신 게 다였다.

제발 가까이 다가오너라. 네 놈 피라도 마셔야겠다.

하지만 녀석은 그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일정한 간격에서 머물렀다. 할 수 없이 세르게이가 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의 느린 발걸음에 비해 녀석은 아직 민첩했다. 당최 간격이 줄어들지 않았다.

뭔가 미끼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세르게이는 흐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숨어 있던 인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부서진 건물 더미에서 뭔가를 찾는 듯 보였다. 다들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도 그곳으로 가려고 도로를 막 건너려는 순간, 폐차 직전의 모습을 한 트럭 한 대가 털털거리며 그의 앞에 섰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자 두 명이 내렸다. 낡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성큼성큼 개에게 다가갔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개는 크게 짖으며 물러섰다. 그때, 키가 큰 여자가 품에서 권총을 꺼내 개에게 발사했다. 빵 하는 소리에 작은 새들이 후드득 날아갔다. 그들은 쓰러진 개를 질질 끌고 가더니 트럭 짐칸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서둘러 차를 몰고 사라졌다. 세르게이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트럭이 사라진 곳을 한동안 쳐다봤다.

*************

세르게이는 그날 오후 운이 좋았다. 폐허 더미에서 뜯긴 커피콩 한 봉지를 발견하고 비닐봉지에 잽싸게 넣었다. 그는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고 외진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이, 친구!

그가 뒤돌아보니 이반이었다. 세르게이는 봉지를 꽉 움켜쥐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게 얼마 만이지? 이반.

글쎄, 족히 일 년은 넘은 것 같은데. 세르게이.

이반은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을 드러내며 합죽하게 웃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세르게이는 이반과 헤어진 그 날을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얬다.

너 기억력은 여전하구나. 하늘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백린탄 기억 안 나?

이반은 그날이 마치 어제였던 것처럼, 하얗게 질린 표정을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맞아. 그랬지. 하늘을 온통 다 덮고도 남았지.

세르게이는 하얀 눈송이가, 하늘에 흔적을 남기며, 포물선으로 떨어지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때 너가 외쳤잖아. 구경나온 주민들에게. 빨리 피하라고. 저거 맞으면 살이 쪼그라드는 고통 속에 죽게 된다고. 기억 안 나?

그래 맞아. 내가 그랬지. 아무도 몰랐지. 나만 알고 있었지.

세르게이는 이제 눈 앞에 펼쳐진 곳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그날을 생생하게 끄집어냈다.

그래, 특수 공작원 출신은 너뿐이었으니까.

*************

세르게이가 군에 자원입대한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그는 다섯 형제의 막내였다. 집은 가난했지만, 형제간 우애는 두터웠다. 그는 특히 셋째 형 그레고리를 좋아했다. 그레고리는 형제 중 유일하게 어머니의 투명한 푸른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는 금발에 콧날은 오똑하고, 얄팍한 입술에는 늘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누구를 만나던지 항상 속삭이듯 말하였고,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녹아낼 줄 알았다. 그는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들은 그를 무척 따랐다.

그는 열여덟에 옆집에 사는 옥사나를 임신시켰고, 스물셋에 정육점 주인 딸, 이리나가 배가 불러오자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이때쯤 세르게이는 그레고리 집에 더 자주 머물렀다. 이리나가 아침에 차려주는 향긋한 고기 수프의 맛을 세르게이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부분 잡뼈에 살점이라곤 쥐꼬리만큼 붙어 있는 멀건 국이었지만, 그는 목구멍으로 따스한 국을 넘길 때마다, 흐릿하게 흔적만 남아있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곤 하였다.

그레고리는 직업이 없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건달이었다. 그리고 그는, 체질적으로 어디에 소속되어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것을 극히 싫어하여 늘 혼자 다녔다. 가끔 동생 세르게이가 따라오면 마지못해 같이 다니곤 하였다. 그런데도 동네에서 그에게 시비를 거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세르게이의 첫째 형, 니콜라이 때문이었다. 그는 흑해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에서 이름이 알려진 보스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다. 비록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존경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레고리의 일상은 단순했다. 그는 집에서 오전 내내 뒹굴다, 오후 늦게 두 블록 떨어진 전당포로 가서 일거리를 받았다. 그 전당포 주인은 유대인으로 악성 고리대금업자였다. 그는 니콜라이에게 매달 일정 금액을 상납하여 보호받았으며, 그레고리에게 돈이 될만한 일거리를 줌으로써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어갔다. 그레고리가 주로 하는 일은, 제때 돈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를 찾아가서 협박하여 돈을 받아 내는 거였다. 그는 폭력적이었지만 주먹을 자주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는 채무자의 집이나 가게를 방문하면, 우선 내부를 샅샅이 뒤져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먼저 챙겼다.

그레고리는 가치 있는 고문서나 골동품, 미술품들을 알아보는 안목이 좋았다. 보통 채무자의 주거 공간에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귀한 물건들이 한두 개 정도는 방치된 채 처박혀 있기 마련이었다. 그마저도 발견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는 약간이라도 돈이 될만한 물건들은 모두 쓸어 담았다. 그런데도 변제액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그레고리는 채무자의 가족을 살폈다. 그들 중 제법 마음에 드는 이가 보이면 그는 조용히 따로 불러 종이쪽지를 건네며 속삭였다.

돈을 갚을 기회를 너에게 주겠다. 꼭 시간을 지키도록.

종이쪽지에는 약속 장소와 날짜, 시간이 적혀있었다. 장소는 주로 호텔이었다. 그레고리는 채무자의 아내 혹은 성숙한 딸과 관계를 맺고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는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와 잠자리를 한 여인에 관한 특징을 작은 수첩에 기록하여 늘 품속에 넣어 다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것을 자랑하지는 않았다. 오직 세르게이만 알고 있었다. 세르게이는, 수첩이 꽉 차면 그레고리가 비밀리에 그 수첩을 보관하는 장소를 공유하는 유일한 형제였다. 그곳에는 수십 개의 수첩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레고리는 마치, 세상의 모든 여인을 탐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자 자부심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세르게이는 존경했다.

그레고리는 행복했다. 그는 두 명의 사랑스러운 자식이 있고, 착한 여자 친구가 있으며, 머잖아 자신의 욕구를 채워 줄 여인들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세르게이가 스물두 살이 되던 그해,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유난히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레고리는 그날, 허름한 호텔에서 막 뜨거운 정사를 끝내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러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이 조금 전에 머물렀던 호텔이 바라다보이는 곳이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그는 상쾌하다고 느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비음을 내던 그녀는 보기 드물게 청순했다. 그는 그녀의 반짝이는 녹색 눈에서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여인이라면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도 남지.

이윽고 그레고리 앞에 큰 맥주잔이 놓였다. 그는 서둘러 맥주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기분 좋은 찬 기운이 목구멍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맥주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다시 들어 올려 꿀꺽꿀꺽 맥주를 더 삼켰다. 그리고 탁자에 맥주잔을 내려놓고 호텔을 바라봤다.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기회가 되면 또 만나야겠어. 그런 멋진 여자를 그냥 한 번으로 끝내기는 아쉽지.

그는 습관대로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수첩을 펼치고 그는 그녀에 대한 느낌을 적으려고 볼펜을 막 들었다. 하지만 그는 한 글자도 적을 수가 없었다. 호텔 5층 베란다에 어떤 여인이 서성거리는 모습이 그레고리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호텔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얼굴. 바로 조금 전 그레고리의 품에 안겼던 그녀였다. 그는 기쁜 마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에게 소리쳐 부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베란다에서 뛰어 내렸다.

그의 발 앞에 그녀는 철퍼덕거리며 부서졌다. 그녀의 팔과 다리가 기괴한 모습으로 부러졌다. 머리는 깨져 골수가 흘러나왔다. 배는 터져 창자가 쏟아졌다. 얼굴 반쪽은 심하게 찢어졌고 눈알은 으깨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그레고리를 응시하며 저주 섞인 말을 내뱉었다.

안돼! 이 더러운 개자식아!

사람들이 몰려나와 그녀 주변을 에워쌌다. 하지만 그녀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중얼거리며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한쪽 눈은 그레고리를 응시한 채,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의사로 보이는 이가 달려와 그녀의 코와 목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 누군가 손수건을 덮었다. 어떤 이는 성호를 그었고 어린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레고리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에 빠진 듯, 무겁고 참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세르게이는 지금껏 그런 모습 그런 표정의 그레고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레고리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도도한 자존감을 늘 풍기고 다녔다. 하지만 그날, 집으로 어기적어기적 들어온 그레고리는 가족의 반가움도 외면한 채 곧바로 세면대로 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물소리만 들렸다. 세르게이와 이리나는 감히 그레고리에게 다가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뭔가 크게 잘못된 게 틀림없어!

세르게이는 형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형수님,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세르게이는 잠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래, 전당포부터 가야겠다. 그 늙은 유대인 영감탱이가 뭔가 나쁜 짓을 한 게 틀림없어.

하지만 세르게이가 전당포 쪽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그는 두 명의 경찰과 마주쳤다. 세르게이는 그들이 반가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달 한두 차례 형 집을 방문하여 돈을 받아 가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중에 한 사람은 그레고리의 친구이기도 한, 파울로였다. 그레고리는 그동안 수익의 일정 부분을 경찰 입막음으로 상납하였다.

세르게이! 마침 잘 만났다. 그레고리 지금 어디에 있어?

파울로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그레고리 집을 방문할 때면, 늘 지나치게 반가운 표정으로 들어와 이것저것 실없는 농담을 하다가 그레고리가 건네는 돈을 잽싸게 주머니에 넣고 사라지곤 하였다. 세르게이는 뭔가 불길함을 직감했다.

형은 왜 찾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세르게이는 굳은 얼굴로 파울로를 바라봤다.

응, 여자가 호텔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죽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세르게이는 단박에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형이 그 여자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죽은 여자는 누구야?

세르게이는 그레고리가 건드린 동네 여자들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우리 동네 여자가 아냐.

파울로도 세르게이가 묻는 의도를 알아챈 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설마 우리 형이 그 여자를 베란다에서 떠밀기라도 했다는 거야?

세르게이는 삐딱한 표정으로 경찰들을 째려봤다.

아니, 그건 아니야. 여자가 스스로 뛰어내렸어. 왜냐하면 그레고리는 그 시간,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카페 종업원이 이미 증언했어.

그런데?

세르게이는 이제 건방진 표정으로 그들 앞에서 건들거렸다. 조금 전의 불길함이 기우였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문제는 그 여자의 친척 중 한 사람이 정보국 소속 고위 간부라는 거야. 한마디로 잘못 건드린 거지.

파울로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세르게이를 쳐다봤다.

*************

그레고리는 강간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를 돕기 위해, 세르게이의 둘째 형, 올리거가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수감 중인 니콜라이 형을 대신해 시시포스 지역 마피아 총책을 맡고 있었다. 그는 지역 정치인, 유력 인사, 경찰 관계자, 법조인들을 두루 만나고 다녔다. 세르게이는 형의 차를 운전하며 줄곧 그와 동행했다. 그들의 만남은 매우 짧았다. 대화한다기보다는 협박성 회유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지역 출신 인사 중 형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다. 감옥 대신 군에 입대하여, 그레고리가 시시포스를 당분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비가 피처럼 끈적거리며 내리던 날이었다. 구름이 어둑어둑하게 끼어 그레고리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세르게이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레고리는 무거운 배낭을 트렁크에 던지듯 집어넣고 세르게이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를 따라 나온 이리나는 이미 눈두덩이 퉁퉁 부어있었다. 비는 구부정하게 뻗은 길과 풀밭을 적시고, 그녀의 부풀어 오른 배를 감싼 얇은 임신복을 적셨다.

세르게이는 기나긴 길에 놓인 무정형의 불안을 보았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불길함과 안타까움이 한꺼번에 솟아났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마치 흐려진 방에 꺼진 불꽃에 대한 어떤 미련도 두지 않은 것처럼 무심하게 밖을 쳐다봤다. 무엇으로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연기만 허공에 낮게 날렸다.

이리나는 점점 멀어졌다. 차는 좁은 도로를 벗어나 경사가 완만한 길을 따라 상점, 카페,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는 시내로 접어들었다. 거리는 붐비고 음악은 산만하게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번화가를 벗어나며 도시의 풍경이 조금씩 변해갔다. 시내의 공원과 정원이 사라지고, 늙은 농부가 구부정한 시선을 가득 채운 벌판이 나타났다. 세르게이는 속도를 높였다. 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

훈련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떨어졌다. 비는 그쳤다. 그레고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내렸다. 세르게이가 짐을 들고 입구에 있는 헌병 초소에 다가갔다. 모든 것이 정지한 공기 속에 머무는 듯, 그들의 모습은 인형처럼 보였다. 간단한 조서가 이루어졌다. 반가운 얼굴을 짓는 접수처의 그녀는 그레고리를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빤히 쳐다보며, 그가 내민 서류에 대해 눈짓을 이어갔다. 그녀의 볼이 꽤 볼록하다고 느낀 세르게이는 뒤편에 붙은 포스트를 하나하나 유심히 지켜보며 잠시 후 벌어질 형과의 작별을 마음속에 그렸다.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은 이별. 그레고리는 마침내 세르게이의 손을 잡으며 오랫동안 간직한 말을 쏟아 냈다.

형수를 잘 부탁해!

그레고리는 검은 커튼이 두텁게 내려온 방으로 사라졌다. 세르게이는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마치 그는 다음의 행동이 어떻게 이어져야 할지를 모르는 초등학생처럼 서성거렸다.

그러고 보니 형이 없는 세상을 살아 본 적이 없었구나

세르게이는 벽을 장식한 포스터를 하나하나 다시 짚어 가기 시작했다. 검은 하늘은 쌀쌀한 날을 예고했다. 더위는 한풀 꺾였다. 습도는 높으나 숨쉬기에 적당한 온도가 무엇이든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혼란이 다가왔다. 세르게이는 마침내 접수처에 앉은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특수 부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여인은 그가 내민 주민증을 비딱한 각도로 쳐다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의 신상을 적고 서류를 세르게이에게 내밀었다.

여기, 여기, 여기 서명을 하세요.

세르게이가 서명한 서류를 내밀자 그녀는 무채색의 표정으로 말했다.

전과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조회를 통해 다 드러납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전과는?

없습니다.

세르게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크고 붉은 도장을 서류의 중간에 눌렀다.

저기 저 검은 문으로 들어가세요.

세르게이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또 다른 정적 위에 다른 문이 놓였다. 잠시 망설인 그는, 이곳을 지난 그레고리의 숨결을 느끼듯 익숙하게 다시 문을 열었다. 지나치게 큰 연병장이 나왔다.


남킹 이야기 - 2024-01-19T153635.841.jpg
남킹의 음악과 글 - 2024-01-15T192519.793.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블라드 체페슈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