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빅토르 흘라디는 옥스퍼드에서도 여전히 외톨이였다. 그리고 단순한 삶을 살았다. 장소만 시시포스에서 영국으로 옮긴 것뿐이었다. 그는 강의실, 실험실, 도서관, 아르바이트 공간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돌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사적인 만남은 존재했다. 한 달에 한 번 <니힐>이라는 모임에 참석했다. 니힐은 무의미함을 나타내는 라틴어로 시시포스 신화와 관련이 있다. 즉, 신들을 기만한 죄로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된 시시포스에게 바위는 정상에 오면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올려야 하는 영원한 노동이었다. 바로 이 무의미함이 인간의 삶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다분히 철학적인 요소를 품고 있지만, 모임의 성격은 시시포스 출신 옥스퍼드 재학생의 향우회로, 그냥 먹고 마시고 떠들다 헤어지는 거였다.
회원은 고작 세 명이었다. 그것도 빅토르가 입학하여 한 명 추가가 된 거였다. 그런데도 모임의 형식은 다 갖추고 있었다. 회장과 총무가 있고 회칙과 회비가 엄연히 존재했다. 니힐의 회장은 아르템으로 정치학과 학생이었다. 그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고향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용히 살 수도 있었으나 다분히 선동적이고 혁명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꽤 많은 모임에 참석했고 항상 모임을 주도했다. 그는 논쟁을 좋아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니힐의 총무는 블라디미르로 컴퓨터 공학 학생이다. 아르템과는 고등학교 동기였다. 그는 빅토르보다 세 살이 많았다. 사실 빅토르가 시시포스에서 수학 천재로 이름을 떨치기 전까지 그 유명세는 블라디미르의 것이었다. 블라디미르도 아르템처럼 금수저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 형제들은 모두 시시포스의 유명 법률가였다.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법관의 길을 포기하고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그는 이미 10살 때부터 해커였다. 해킹이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오락이었다.
니힐의 회장과 총무는 빅토르가 옥스퍼드에 입학하자 뛸 듯이 기뻤다. 왜냐하면 2년 만에 처음으로 회원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빅토르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특히 빅토르의 아르바이트 자리는 늘 아르템이 물어다 주었다. 빅토르도 그들을 형처럼 따랐다. 마치 그들은 올리거와 그레고리 형의 자리를 대신한 것처럼 그는 느꼈다.
빅토르가 1학년을 끝낼 때쯤 니힐이 교내에서 꽤 유명해지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르템의 지도 교수가 같은 성가대 소속 어린 소녀를 교회에서 성추행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피해자들이 나오면서 교수는 법정 구속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학교는 입을 다물고 피해 여학생 모두 증인 출석을 거부하면서 판결은 싱겁게도 무혐의 처리가 되어 버렸다. 아르템이 이런 거를 그냥 넘길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을 끌어모아 교내 시위를 주도했다. 당연히 그는 데모 주동자로 학내징벌위원회에 의하여 무기정학을 받았다. 하지만 아르템이 그 정도로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더욱 많은 학생을 끌어들여 학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일주일 만에 시위 진압 경찰이 동원되어 그는 구치소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 반전이 일어났다. 교수의 노트북에서 수백 개의 어린이 나체 사진과 동영상이 발견되었다. 여론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결국 학교 이사회는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해당 교수를 파직 및 고소했다. 아르템은 당연히 풀려났다. 그는 이제 학내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 향한 곳은 니힐 모임 장소였다. 그는 그곳에서 블라디미르에게 감사를 표했다. 왜냐하면 그 교수의 노트북을 해킹한 사람이 바로 블라디미르였기 때문이었다.
아르템은 그때부터 아마 자신을 불타오르게 하는 혁명적인 사상과 민족주의적 자존심에 바탕을 둔 정치적 야심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느끼는 그의 나라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러시아 속국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종속적이었다. 그러므로 정치인 대부분이 친러 색채를 띠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지녔지만,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였다. 그는 서유럽 선진국에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그들의 기술과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야만 자신의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러시아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뒤이어 벌어졌다.
아르템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이상한 서류를 발견했다. 얄팍한 몇 장의 종이였지만 일급 비밀이라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소련 서기장 사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내용은 무슨 프로젝트에 관한 전반적인 일정이었는데, 인터넷에서 해당 내용은 전혀 검색되지 않았다. 아르템은 이 서류를 블라디미르에게 보였다. 그리고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정보기관을 해킹하여 해당 프로젝트의 내용을 몇 시간 만에 파악했다. 한마디로 그 프로젝트는 시시포스 시의 탄생 배경이었다. 서유럽 혹은 흑해 연안 국가와 전쟁 발발 시 사용하게 될 무기 공급처였다.
아르템은 이 놀라운 발견으로 자신의 진로를 완전히 확정 지었다. 러시아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자주국방이었다. 그는 블라디미르와 빅토르를 설득했다. 블라디미르는 원래부터 민족적인 성향이 강하였으므로 손쉽게 아르템과 손을 잡았다. 빅토르는 그때 이리나에게 실연을 당한 상태였다. 그는 아무도 없는 오지에 꼭꼭 틀어박혀 연구만 하고 싶었다. 아르템은 이 점을 노렸다. 그는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흑해의 한 조그마한 섬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곳에 무기 개발 연구소를 만들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기초 과학 연구소로 등록했다. 결과적으로 빅토르에게 그곳은 직장이자 정신적 피난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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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흘라디는 계속해서 시간을 쳐다봤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의 시간은 무척 더디기만 하였다. 그는 지금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바뀌는 실험 데이터 숫자들을 쳐다보고는 있지만 몇 시간째 거의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경우가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치 이리나와 첫 데이트를 하던 때 같았다. 그는 나타샤의 모습에서 이리나를 떠올렸다. 게다가 그를 쏙 빼닮은 수학적 재능에 그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이리나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잘 키워줘서 고맙다. 내 사랑. 이리나.
빅토르는 나타샤와 저녁 약속을 하였다. 나타샤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녀도 어느 정도 직감은 하는 상태였다. 사실 그녀는 면접이 끝나자마자 숙소에서 빅토르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그리고 그가 적어도 자신의 생부인 그레고리와 밀접한 관계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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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흘라디는 오데사에 48시간째 머물고 있다. 그는 섬으로 가는 보트를 빌리려고 하였지만, 사정이 여의찮았다. 왜냐하면 정부군과 반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오데사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선주들이 선뜻 그레고리에게 배를 내놓지 않았다. 그의 속만 타들어 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사비를 털어 소형 고무보트를 구매했다. 이 배를 끌고 섬까지 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약간의 강풍만 불어도 배가 뒤집혀 물고기 밥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험을 걸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러시아 용병 그룹이 그 섬을 첫 번째 타겟으로 삼고 있다는 거였다. 빅토르에게 이 사실을 꼭 알려야만 하였다.
다행히 바다는 잔잔했다. 그는 방파제를 벗어나자마자 고무보트의 속도를 최대한 올렸다. 배가 먼바다로 갈수록 파도가 점점 커졌다. 그레고리는 이를 악물고 파도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따금 휴대폰을 꺼내 지도에 기록된 섬과의 거리를 확인하곤 하였다. 앞으로 50km는 더 가야만 했다. 보트로 족히 3시간 이상은 운전해야만 했다. 그것도 최대 속도로 말이다. 그는 엔진이 그때까지 버텨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레고리가 거의 2시간 정도 보트를 운전하였을 때, 그는 하얀 거품을 길게 그리면서 섬으로 이동하는 전함을 목격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러시아 전함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빨리 보트를 몰아 섬에 도착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보트는 그의 조급한 마음은 외면한 채 바닷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그레고리가 섬에 거의 도착했을 때, 그는 전함에서 수십 대의 드론이 날아 육지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 누가 봐도 공격용 드론이 확실했다. 그는 해변에 고무보트를 내팽개치듯이 던져 놓고는 죽을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연구소의 흰 건물을 보았을 때는 이미 드론의 공격이 절정에 올라 있었다. 건물 대부분이 화염에 휩싸였다. 그는 절망적으로 그의 동생 빅토르를 찾기 시작했다. 무너진 빌딩 잔해 사이를 힘겹게 걸으며 빅토르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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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는 이른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갔다. 섬에서 거의 유일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풍경 좋은 절벽에 세워진 이곳은 빅토르가 지금까지 소피아와 외식할 때만 찾는 곳이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전면 유리창을 가득 채운 푸른 바다를 기분 좋게 바라봤다. 저녁노을이 한쪽 지평선에서 살짝 붉은 모습으로 그를 응원하는 듯하였다. 그는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그는 추억에 젖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감상은 나타샤의 등장으로 곧 사라졌다. 그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빅토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타샤 님, 오늘 첫 출근은 어땠나요?
글쎄요, 뭐가 뭔지 모르게 그냥 흘러갔어요. 모든 게 서툴고 생소한지라….
네, 처음에는 그럴 거예요. 하지만 곧 익숙해질 겁니다. 이곳 생활이 비교적 단순한 편이라 적응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네, 아무튼 많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흘라디 박사님.
네, 열심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 연구소에 모처럼 만에 무척 똑똑한 분이 오셨으니….
빅토르와 나타샤는 동시에 소리 내 웃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곧 웅 하는 엔진소리에 묻혔다. 빅토르가 호기심으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는 창으로 다가서는 드론을 목격했다. 드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때 빅토르의 휴대폰이 울렸다. 동시에 레스토랑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거친 폭발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빅토르는 올 것이 결국 왔다고 직감했다. 그는 최근에 블라디미르 연구소장으로부터 지속해서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교전 상황을 걱정하는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빅토르는 나타샤에게 외쳤다.
나타샤! 피신해야겠어! 날 따라와!
빅토르는 나타샤와 함께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뒷문으로 같이 나갔다.
나타샤! 우선 대피소로 같이 갑시다! 거긴 안전해요.
빅토르가 앞장서서 거의 뛰듯이 걸어갔다. 나타샤가 그의 뒤에서 숨을 헉헉거리며 쫓아왔다. 그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블라디미르였다. 빅토르는 걸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박사님! 지금 연구소가 폭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디 계시는가요?
네, 지금 나타샤와 함께 레스토랑에서 나와 대피소로 이동 중입니다. 소장님은 다친 데는 없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저도 지금 대피소로 가고 있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조심해서 오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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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는 화염과 연기에 휩싸인 건물 잔해 사이를 힘겹게 이동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빅토르의 행방을 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빅토르의 연구실 비서와 마주쳤다.
흘라디 박사님은 지금 레스토랑에 있습니다.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 조금 일찍 나갔습니다.
그 레스토랑이 어디인가요?
저기 저쪽 절벽 쪽입니다.
그레고리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봤다. 저녁노을이 온통 빨갛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좁은 흙길이 고불고불 언덕을 따라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그는 땅과 절벽을 번갈아 보며 있는 힘껏 뛰었다. 그가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방이 어두웠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레스토랑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곳이었다. 그곳으로 고통이 밀려왔다.
빅토르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는 한동안 레스토랑을 살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인기척을 느꼈다. 몸을 어둠에 숨기며 그곳을 쳐다봤다. 군인들이었다. 몇 명의 러시아 용병들이 완전무장을 한 채 레스토랑으로 살금살금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급히 주방에 있는 대형 냉장고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군인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얼마 동안 주위를 샅샅이 살핀 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음료수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캔을 꺼내 급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숨에 캔 서너 개씩 비웠다. 그리고 그들은 지도를 펼쳐놓고 뭐라고 떠들더니 곧바로 레스토랑을 나갔다. 러시아어에 능한 그레고리는 그들이 대피소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곳에 빅토르가 피신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 군인들을 살금살금 미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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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가 대피소에 도착해 보니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이었다. 그중에 몇몇은 다쳤는지 찢어진 옷에서 핏자국이 보였다. 빅토르와 나타샤는 천천히 그들 사이를 헤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빅토르는 나타샤가 매우 걱정이 되었다.
미안해요. 출근 첫날부터 이런 변을 겪게 되어서.
아니에요. 전쟁이 매우 심각하게 커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다만 이런 작은 섬을 공격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그래서 미안한 거예요. 이제 이렇게 된 이상 사실대로 말해야겠습니다. 사실 우리 연구소가 민족해방전선의 자금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네? 그럼 저들이 우리 연구소를 노리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혹시 저들에게 붙잡히면 절대 연구소에 근무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빅토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누군가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소피아였다. 헐렁한 잠옷 차림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그녀는 두려움에 떨면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 소피아. 이제 안심해도 되.
빅토르는 소피아에게, 마치 어린이를 달래듯이 토닥거렸다. 그는 소피아를 쳐다보면서 자신이 이 난리 통에도 그녀를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놀라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내 꼴이 말이 아니지? 자다가 너무 놀라 그냥 뛰쳐나왔단 말이야. 바보같이. 신발도 안 신고. 심장이 하도 뛰어 죽는 줄 알았어. 정말이지. 내가 여기서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응? 자기야?
어디선가 서늘한 기운이 들어 왔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 자국이었다. 빅토르는 그녀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당최 빅토르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 나타샤에게로 갔다. 나타샤도 지금 상황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게 그들은 소피아의 울음이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소피아에게서 떨어진 빅토르는 나타샤를 그녀에게 소개했다.
오늘 처음 출근한 신임 연구원 나타샤야.
나타샤가 소피아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소피아는 더러운 손을 옷에 한번 쓱 닦고는 악수에 청했다.
여기는 내 아내인 소피아.
어떡해요?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소피아는 나타샤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제 부모님이 더 걱정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미 1주 전부터 전투가 발생했거든요.
어디에 사시는가? 부모님은?
빅토르는 줄곧 가슴에 품었던 질문을 나타샤에게 던졌다.
코린토스입니다.
이리나가 코린토스에 살다니….
빅토르는 갑자기 멍한 상태로 이리나를 가슴에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생각 난 듯이 나타샤에게 물었다.
다친 데는 없고? 그러니까 그…. 부모님은 다치지 않으셨고?
네, 무사하십니다. 그리고 국경 근처로 피난을 가려고 합니다. 무사할지 그게 걱정입니다. 어머님 혼자서….
어머니 혼자서? 왜? 아버지는?
아버지는 지난달에 정부군에 편입되셨습니다.
이리나가 혼자서 그 먼 길을 간다고? 이건 안 될 말이야. 누군가가 꼭 있어야 해. 내가 아니면 형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빅토르는 다시 멍하게 이리나의 걱정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소피아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자기야! 나 무서워. 우리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응?
빅토르는 어쩔 수 없이 소피아와 나타샤를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빅토르가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블라디미르가 그를 반겼다.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안색도 창백하였다.
다리를 다쳤군요?
네, 하지만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떡하다가?
개자식들이…. 글쎄 드론이 연구소를 빙 둘러싸고 무차별 총격을 가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벽을 손으로 쳤다.
그만하기 다행입니다. 소장님.
네,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건졌습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의 안전이 걱정입니다.
드론 외에 다른 공격은 없었나요? 예를 들면 함포 사격이라든지….
네, 함정에서 포격은 없었습니다. 다만 상당수의 러시아 용병들이 상륙했습니다. 아마 연구소 직원들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럼 큰일이군요. 우리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젊은 친구들을 시켰습니다. 여기 대피소에 비축해둔 무기 정도면 대응 사격은 가능할 겁니다.
잠시 후 여섯 명의 젊은 연구소 직원들이 소총 및 방탄조끼 등 무기와 보조 장비들을 가지고 나타나 남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빅토르도 소총과 권총 한 자루를 받았다. 그리고 헬멧과 방탄조끼를 입고 수류탄도 2개 받아 어깨에 달았다. 탄약도 한 줄 받아 어깨에 둘러멨다. 전투용 나이프는 허리에 둘렀다. 장비를 다 갖추고 나니 영락없는 군인이었다. 사실 설립 초기부터 이런 날을 대비하여 직원들은 군사 교육을 꾸준히 받았다.
연구소장의 지시에 따라 여자와 어린이, 노인과 부상자들은 대피소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피아와 나타샤도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피소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방어벽을 만들었다. 연락병과 정찰병을 선발하여 대피소 주위에서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빅토르는 방어벽 틈 사이에 AK-47 소총을 찔러 넣고는 전방을 주시했다. 대피소의 조명을 매우 어둡게 낮췄다. 그러자 대피소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침묵은 마치 무게를 가진 실체처럼 공간을 메우고, 어둠과 함께 그를 쓰다듬었다. 동료의 조용한 숨결만이 귀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빅토르의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만감이 교차했다. 이리나와의 사랑, 갈등, 헤어짐 그리고 우리의 딸 나타샤까지. 그 모든 서정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하지만 그런데도 적들을 마주하는 시간은 오고 말았다. 정찰을 나간 이들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그들이 오자마자 폭발음이 들렸다. 빅토르는 어둠 속에서 하나둘 적의 모습을 간파했다. 그는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고막이 찢어지는 굉음이 대피소를 꽉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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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는 대피소 근처에서 폭발음과 화염이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내 동생 빅토르가 저곳에 있을 거라는 것을. 그는 살금살금 기어서 용병에게로 접근했다. 그들은 대피소에 집중적으로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뒤에서 그레고리가 턱 밑까지 접근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레고리는 볼펜을 꺼내 손에 꽉 쥐었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는 그것뿐이었다. 그는 용병 한 명 뒤로 가서 왼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 오른손으로 그의 목을 볼펜으로 힘껏 쑤셨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녀석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피를 심하게 뿌리며 죽었다. 그레고리는 죽은 용병의 소총과 탄환을 챙겨 다른 용병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공격받은 용병들은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본 나머지 용병들은 당황하여 급하게 뒤로 물러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깥 사정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은 빅토르는 동료들에게 사격 중지를 요청했다. 갑자기 또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빅토르 흘라디 있나요? 빅토르 흘라디 있으면 대답하세요!
당신은 누군가요?
빅토르가 물었다.
저는 그레고리 흘라디입니다. 빅토르 형입니다.
빅토르는 어둠 속에서 형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