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내리는 빗물

Svefn-g-englar (몽유천사)

by 남킹

지그문트 거리의 한적한 주택가를 걷다 발견한 카페는, 그리 넓지 않고 어두운 편이다. 지붕에 난 사각 창을 투과한 가느다란 자연광에 더하여, 흐릿한 갈색 꼬마전구가 듬성듬성 박혀있다. 그리고 천장을 따라 낡은 목제 기둥들이 교차한다. 회칠한 사각 벽면에는 <Egon Schiele>의 작품이 한 면에 한 개씩 매달려 있다. 모두 다양한 모습의 비틀린 나체 여인이다.

나는 <Sigur Ros>의 <Svefn-g-englar>가 흐르는 홀을 지난다. 가장 구석진 곳. 채광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손바닥 크기의 창가 옆 테이블에 앉는다. 커피를 주문하고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입구를 응시한다. 투명에 가까운 출입구 유리. 12월의 잿빛 하늘이 가라앉는다.

유리를 투과한, 성기게 돋아난 서릿발로 세상이 꽁꽁 멈추었다. 바람이, 일렬로 길게 늘어선, 높고 앙상한 미루나무 가지를 톡톡톡 건드리며 지나간다. 그리고 가늘게 떨고 있는 잔가지들 사이로 붉은 지붕이 보인다. 그 너머 구릉 사이로 제멋대로 펼쳐진 들녘은 황량하다. 세상의 진화가 멈춘 듯하다.

잠시 의식이 사라진다. 돌과 나무처럼. 그저 밖을 바라본다. 음악이 꿈속인 듯 들려온다.

‘…. 그저 얼굴에 비가 내릴 뿐이다.’

오후 4시가 넘어가자, 세상은 천천히 붉어진다. 저 멀리, 행글라이더 모양으로, 정연하게 대오를 지어 날아가는 철새가, 얼마 남지 않은 빛에 반짝인다. 어스름한 기운이 홀을 메우기 시작한다. 유럽에 머문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겨울의 짧은 햇살은 당혹스럽다.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난 느낌이다.

독일에 온 첫해, 겨울이 떠오른다.

경사가 거의 없는 낮은 산과 앙상한 나무들로 채워진 공원 사이로, 눈들이 많이도 내렸다. 어떤 날은 함박눈이, 어떤 날은 싸라기눈이, 어떤 때는 눈인지 빈 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내렸다.

족히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은 왔다. 하지만 그다지 춥지 않은 기온 탓에, 도로 위 눈들은 금방 시커먼 흙탕물로 변했다. 회사 가까이에 숙소가 있었다. 나는 매일 질퍽한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하였다. 짧은 낮과 긴 밤으로 구성된 곳. 출근길은 어두웠고 퇴근길은 깜깜하였다. 나는 노란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여, 바지춤을 추켜올리고 까치발을 하고선, 거리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고인 물과 눈 무더기, 혹은 가끔 개똥을 피하여, 조심스럽게 걷곤 하였다.

회사 건물은, 밀밭과 공원 입구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리고 낡았다. 지은 지 100년은 더 되어 보였다. 뼈만 남은 담쟁이덩굴이, 한쪽 벽과 지붕을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중세 수도원 같았다. 흐린 날, 달빛에 쳐다보면, 공포 영화에서나 나옴 직한, 음산하고 기괴한 정신병원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낡은 외벽과는 달리, 실내는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개축되었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는 깨끗하고 단순하였다. 높은 천장에는, 환기구와 동그랗고 세련된 조명이 일렬로 일정하게 박혔다. 그리고 하얀 벽면을 따라, 손바닥 2개 정도 크기의 사진 액자가 듬성듬성 달렸다. 묘하게도 모든 작품에는 한 사람만 등장하였다.

"<Henrik Knudsen> 작품이에요." 작은 키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한 낯선 여자가, 출근 첫날,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자판기에서 막 뽑은 커피를 한 손에 든 채, 복도를 서성거리다, 사진 하나를 무심하게 쳐다보던 중이었다. 그 속에는, 버스 맨 뒤 칸에 홀로 앉은 흑인 청년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느꼈다. 쓸쓸하기보다는 따뜻했다.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나의 질문에 그녀는 고민 없이 "애인 생각이죠. 당연히…"

"행복해 보이잖아요.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일 거예요. 틀림없이…."

나는 미소로 수긍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통성명을 하였다.

"송안나에요." 그녀는 작고 가느다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 네, 저는 박칠규입니다." 긴장이 되었는지 가래 끓는 소리가 올라왔다.

"철규 씨요?"

"아, 아니, 칠규입니다. 일곱의 칠입니다." 따뜻한 손의 감촉과 함께, 짙은 화장품 향이, 살짝 설레는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혹시 일곱 번째 아들은 아니겠죠?" 그녀는 농담조의 비딱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 네…. 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음…. 아버지의 일곱 번째 자식이지만,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입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짓궂은 질문이 돼 버렸네요." 그녀의 당황스러움이 왠지 정겨워 보였다. 그러자 긴장은 누그러지고 장난기가 올라왔다.

"안나 씨는 그럼 형제가 어떻게 되시나요? 실례가 아니라면."

"언니만 둘이에요. 두 살 터울로"

"아, 그럼 그 셋째딸?" 그녀는 활짝 웃었다.

"네, 바로 그 셋째 딸이에요.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높은 천장에 메아리쳤다.

그녀는 디자인 팀장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머지 작품에 대해서도,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사무실 안내를 하였다.

나는 그날, 20명 남짓의 회사 직원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하실에서부터 2층까지, 탕비실에서부터 시스템실, 심지어 화장실까지, 안내받았다. 게다가,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곳곳을 장식한 작품의 해석도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4명의 창립 구성원이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방치된 건물 중 한 곳이었던, 이곳의 내부 인테리어를 모두 손수 도맡아 꾸몄다고 한다. 그리고는 매우 만족스러웠는지, 이곳에 새로운 직원이 나타나면, 사무실 안내는 으레 그녀가 맡는다고 하였다.

그녀는 나와 같은 방을 사용하였다. 즉, 우리 방에는 디자인 팀과 웹 개발팀으로 양분되었다. 웹 개발 팀장으로 오게 된 나는, 그녀와 나란히 책상이 배치되었다. 나의 오른쪽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복도가 훤히 보이는 큰 창문들이 두 개씩 짝을 이루고 있었다. 창으로, 복도에 걸어둔 사진들이 온전하게 다 보였다. 나는 작품들의 높이와 간격이,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바라본 창의 너비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았다. 세심한 그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의 왼쪽에도 창들이 있었다. 겨우내 정사각형의 창을 통하여 매일 일출을 맞이했다. 출근과 동시에, 따끈한 자판기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든 채, PC의 전원을 켜고는, 여전히 덜 깬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무거운 하늘과 낮은 산들이 맞닿은 곳이 언제나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해돋이를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나는 전형적인 올빼미형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해가 뜨는 모습을 여태껏 지켜본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학생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기숙사에서 포커 게임을 하거나 당구장 혹은 노래방에서 밤샘한 적은 있지만, 그때도 바라본 건, 푸른 기운이 도는 빨간 창을 힐끗 한번 쳐다보는 정도였다. 일찍 잠드는 게 어려웠고 일찍 깨는 건 괴로웠다.

그러고도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아니,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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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예언서 떠오르는 위협 2 (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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