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es Love
허름한 입구만큼 내부는 작고 단출하였다. 흐린 조명이 적갈색의 벽을 물들였다. 일행은 객석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았다. 어쩔 수 없이 몇몇은 벽에 기대거나 포개 앉았다. <September in the Rain>이 홀에 흘렀다. 갈색 머리의 여인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흥겨움이 절로 묻어났다. 일행은 벌써 드럼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거나, 발을 바닥에 가볍게 두드렸다. 젊고 구부정한 백인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콘트라베이스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몇몇은 자신의 술잔을 홀짝거렸고, 가수로 보이는 흑인 여성은, 검은 파이프가 드러난 천장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그녀의 손에는 굵고 독특한 반지가 모든 손가락에 끼워져있었다. 요란한 장식의 팔찌와 목걸이도 그녀의 하얀 이빨처럼 반짝였다. 홀의 중앙에는 유난히 다정스러운 커플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이제 막 사랑의 열정에 빠진 듯, 서로를 손으로 감싸고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의 살갗을 비벼대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에게서 떨어지는 순간은, 연주가 끝났을 때뿐이었다. 손뼉을 치기 위해서. 그 순간에도 그들의 눈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조금 지나지 않아, 바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색소폰을 들고 홀에 나타났다. 그리고 가수는 무대 중간에 있는 마이크로 이동하였다. 그녀는 좌중을 빙 둘러보며 고개를 숙였다. 간간이 박수가 다시 터졌다. 드럼연주자의 신호에 따라 연주가 다시 시작되고 커플은 다시 붙었다. 익숙한 노래가 흘렀다. <Comes Love>. <Billie Holiday>가 부른 이 노래는 가사를 외우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재즈곡이다. 안나의 베스트 곡이었다.
Comes love, nothing can be done.
“사랑이 오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요?” 그녀는 내게 이어폰을 건네며 그냥 흘리듯 속삭였다. 지독하게 노란 유채꽃이 세상을 덮은 4월이었다. 폭설이 유난을 떨었든 그해 겨울, 첫 만남을 지나면서, 우리는 벤치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주로 음악과 소설 이야기였다. 그녀는 독일과 프랑스 작가에 푹 빠져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읽기를 원하는 책을 돌려가며 읽었다. 행복했다. 오랜만에 삶의 기쁨을 느꼈다.
정말이지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나는 하루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냈다. 다른 이들처럼.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일을 많이 하는 인간을 존경하는 사회에서 태어나 교육받았다. 삼시 세끼를 바깥에서 해결할 때도 많았다. 아침은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마가린과 설탕이 범벅된 토스트로 때웠다. 점심은 직장 동료와 함께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저녁에는 고기 안주에 소주와 맥주를 함께 먹었다.
치열했던 직장생활은, 내 속에 남은 선한 마음을 뺏어갔다. 지나치게 긴 근무 시간과 냉담한 아내의 반응에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나중에는 너무 지친 나머지 고통과 행복의 경계선도 모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즈음 무수히 많은 상상을 하곤 했다.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그즈음 나는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었다.
“팀장님 커리어에 비해 페이가 형편없이 작은데 괜찮으시겠어요?” 헤드헌터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중소 온라인 게임 회사라 언제 문 닫을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한국과 비교하면 유럽 PC 게임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게 사실인지라…. 조금 더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요?” 그의 말투에 진심 어린 충고가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절망적이었다. 무조건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우려대로, 내가 선택한 한국계 독일 회사는 2년을 채우지 못하고 파산했다. 안나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남았다. 그녀가 두고 간 책들이 내 서재를 가득 채웠다. 외로움과 그리움, 행복했던 추억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공항에서 맞이한 손님들은 무척 빠듯한 일정이었다. 숙소 체크인이 끝나자마자 휴식도 없이 곧바로 시내 모처에 있는 한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저녁 겸 회의가 잡혀있었다. 나는 마인강 변에 있는 임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적어도 서너 시간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였다. 준비한 햄버거와 콜라를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나는 어슬렁거리며 강변을 걸었다. 얕은 바람이 잿빛의 강 수면에 잔잔한 물살을 일으켰다.
아내가 떠나자 나는 곧바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실업급여자 생활을 하였다. 일종의 방만한 자유를 누린 셈이다. 그러다 축구동호회 지인의 소개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놀면 뭐 해, 푼돈이나 벌지….” 축구장 옆, 오래된 소나무 아래 마련된 간이 식탁에, 각자의 맥주병을 들고 둘러앉은 회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가 내게 말했다. 그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아들로 십 대 때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의 아내와 함께 통역과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그는 매주 토요일마다 개최되는 한인 축구 모임에 자주 참석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놈들이 꼭 주말만 되면 몰려와. 그 많고 많은 평일은 놔두고 말이여.” 그래서 그런지 모처럼 일없는 토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맥주 한 상자를 들고 축구장을 찾았다.
“영어는 좀 하지?” 그가 다시 물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며 “아, 네 조금은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속으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참 많은 시간 동안 영어를 해 왔지만, 아직도 나는 내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는 데 아주 답답하다.
학생 때는 물론 이려니와 첫 직업이었던 인스턴트커피 연구원 시절에, 나는 틈만 나면 영어 논문을 탐독했다. 프로그래머로 직업을 바꾸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웹 개발 신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나는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여 각종 영어 아티클을 섭렵했다.
독일에서의 회사 생활은 또 어떠했는가? 사내 소통의 공통 언어는 영어였다. 스무 명 안팎의 조그마한 게임 회사였지만 다양한 국적의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주변 국가인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뿐만 아니라 그리스, 불가리아, 저 멀리 남미의 칠레 출신도 있었다. 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이, 국내 사정이 어려운 그들을 마치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미팅뿐만 아니라 인트라넷, 업무용 문서, 이메일, SNS 등 모든 것을 영어로 주고받았다. 줄곧 그렇게 해 왔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더듬거리며 영어를 할까? 도대체 나의 두뇌는 어디서부터 고장 난 걸까?
처음에는 용돈이나 벌어 보자는 속셈으로 가볍게 시작하였다. 하루 12시간 이상을 꼼짝없이 모니터만 바라보며, 복잡한 프로그래밍 코드와 풀리지 않는 버그를 해결하기 위하여 머리를 쥐어짜던 예전의 고통을 생각하면 이건 신선놀음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몸을 움직인다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인지를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하늘과 구름, 나무와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또한 대단한 기쁨이었다.
나는 유럽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발끝마다 마주치는 낯선 공간에 설렘과 신비로움을 체험했다. 겨울의 회색 하늘이 정겨웠고 여름의 짙은 녹음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비로소 자유를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