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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시

by 남킹

사흘을 시 외곽에서 보낸 나는 지나치게 긴 터널을 빠져나와 감각이 향하는 곳으로 정처 없이 걷고 있다. 여전히 검은 바람이 날리는 날이다. 이곳은 <난다스>라고 알려진 도시이다. 그리고 다른 도시와 비슷했다. 흉물스러웠다. 모든 게 망가졌고 부서졌으며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남아 있던 이들은 모두 흩어지거나 숨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해를 넘어선 것이다.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 상상조차 못 한 미래가 현실이 되었다.

아직은 장막에 덮인 세상. 날은 더워지기 시작한다. 도시의 적막은, 그렁거리는 드론 소리와 작은 새의 지저귐으로 흔들렸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골목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도로는 젖었고 가랑비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검은 연기가 스멀거리며 주위를 맴돈다. 코끝의 역한 내를 감지한 짐승들이 황급히 숨기 시작한다. 사방에 진동이 땅으로 스며들었다.

인간은 걷기 위해 태어났다.

한 모금의 물과 단백질을 찾기 위해 내 두뇌와 다리는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한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내 앞에 펼쳐진 폐허 속 작은 움직임조차 빨아들이듯 지켜본다. 극한의 생존 환경은 긴장을 극도로 올려놓는다.

모든 삶은 한순간의 방심으로 끝나버린다.

늘 그렇듯 버려지고 파괴된 길모퉁이가 나타난다. 성한 게 남아 있다면, 우리는 감히 3년 전에 있었던 일을 아포칼립스라고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누구는 마지막 전쟁이라고 했고, 단지 선순환의 끝이므로 시작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였다. 아무튼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거의 멸족하였고 남은 이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도시의 인간은,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얕은 숨을 쉬며, 심장을 뛰게 할 만큼의 영양분만 섭취하였다. 그 외의 시간은 그저 웅크린 채, 두려움과 긴장으로 하루를 보냈다.

계절의 변화는 썩어가는 땅속에서 비죽이 고개를 내미는 어린싹이나 서둘러 핀 야생화에서만 감지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씨를 맺기 전에 시들어 다시 오염된 땅으로 사라졌다.

비는 자주 오거나 한동안 오지 않거나를 반복하였는데, 우기와 건기를 구분하는 명확한 패턴은 그다지 분명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분명한 것은 연한 갈색에서 짙은 흑색의 비가 내렸다.

계절이 있긴 하였다. 무척 뜨거웠던 날이 사라짐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낮은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 달아올랐다. 어쩔 수 없었다. 조상이 남겨준 유산은 후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이 몇 년 며칠인지 아는 이는 지극히 드물었다. 알 필요가 없으니, 그저 낮과 밤이 교차하는 반복된 하루의 나열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세상에 생존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저 숨을 쉬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모든 생존자처럼, 모든 것을 빨거나 흡입하고 다녔다. 비참한 현실은, 비록 순간적이지만, 환각으로 통하는 통로를 아무 거리낌 없이 넓혀 놓았다. 환각물질.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 시대의 화폐가 되었다. 모든 가치의 기준은 이제 약물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로 오기 전, 모든 독약을 끊었다. 그동안 마약에 절은 내 몸은 나의 의지를 꺾기 위하여 극심한 고통을 선사했다. 나는 극복했다. 삶의 목적이 생긴 것이다.

나는 늘 아이 생각으로 가득하다. 고사리 같은 10개의 손가락과 발가락, 두 개의 귀, 눈, 코, 입. 어느 것 하나 비뚤어지지 않고 제대로 된 채였다. 하지만 아이를 볼 때마다 절망이 다가온다. 나는 지나치게 큰 욕심을 채우고 말았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종말의 시대에 자식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지른 걸까?

아이는 언제나 바람을 피하여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오염물질로 포화가 된 공기는 태양을 앗아갔다. 무너져 내린 담벼락, 앙상하게 그을은 나무들이 뒤엉켜있는 구석진 공간에서 아이는 늘 세상을 불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사냥을 하거나 식료품을 찾기 위해 어디든지 뒤져야만 했다. 내게 아이는 욕구이자 사랑, 삶을 이어주는 희망이자 무겁기 짝이 없는 짐이기도 하였다. 하자가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 말이다.

그때부터 즐거웠던 일 기쁨이 충만했던 순간을 늘 기억하고 되새기는 버릇이 생겼다. 극도로 제한된 즐길 거리에서는 추억이 한몫을 담당한다. 나는 내 아이가 온전한 모습으로 태어난 순간을 늘 떠올린다.

그것만이 나를 걷게 했다.

센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여의고 마른 생물들을 날릴 정도의 격한 바람들이다. 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는 이곳이 폐허의 도시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줄 정도로 선명하다.

귓전을 때리던 세찬 바람은 으르렁거리며 몰려다닌다. 양 사방에서 할퀴듯 대든다. 바람은 지친 낙엽과 해진 비닐을 그냥 두지 않는다. 기어이 들어 올려 먼지 속으로 던지듯 날리며 성난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비쩍 마른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천천히 나아간다. 바람을 버티거나 혹은 잘 피하지 못하면 멸종의 세상을 살기가 힘들다.

이파리들은 뜨거운 열기에 말라갔다. 그리고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올라온 풀들을 짓이기는 듯한, 심한 마찰을 느낄 수 있는 광풍이 불곤 하였다. 뻥뻥 구멍이 뚫린 앙상한 잡초들이 마지막 숨을 껄떡거렸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죽은 자식을 먹어야 했고 빈약하게 나오는 젖을 남자에게 팔아야 했다.

나는 배낭에서 자그마한 빵 봉지를 꺼내 한 조각을 베어 문다. 이빨이 아플 정도로 딱딱한 방이지만 나는 꾹꾹 씹으며 단물이 나올 때까지 삼키지 않고 입속에서 굴렸다. 절대로 몇 번 씹고 꿀떡 삼키면 안 된다.

이 한 조각으로 반나절을 견뎌야 한다. 우연히 내게 단백질 덩어리가 떨어질 확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적게 먹고 오랫동안 입속에서 음미하여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내게 큰 위안과 힘을 주는지…. 그것을 처절하게 느껴야만 한다.

배고픔이 주는 일상의 고통은 다른 정신적 고통을 사치로 바꾸어놓았다. 세상의 우울은 자신의 우울을 상쇄한다.

음식이 사라진 세상은 지극히 효율적이다. 이제 음식에서 찌꺼기라는 단어는 사라졌다. 찌꺼기가 있을 리가 없다. 아낌없이 모든 살 조각이 깨끗이 발라져 사라진다.

박테리아도 그걸 느낀다. 수명이 다한 생물은 지독하게 빠르게 썩어간다. 썩기 전에 모든 것을 내 배 속에 채워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몇 주 동안의 굶주림을 버틸 기력이 없어진다.

마지막 남은 기력. 먹을 것을 채집할 수 있는, 단 한 톨의 힘을 위해 몸을 돌보아야 한다. 이제 굶주림은 익숙하다 못해 편리하기도 하다.

부족함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부족하다고 해서 만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격을 동반한 격한 만족을 느낄 때도 있다. 극단적으로 부족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적응한다. 덜 원하고 덜 요구한다. 만족의 기대치를 내리는 것이다.

폐허가 주는 교훈이다.

거미줄처럼 가늘고 길게 얽힌 도로의 끝에 광장이 펼쳐졌다. 지친 발걸음이 맞닿은 그곳은, 한때 높고 빛나는 빌딩이 병풍처럼 타원형으로 둘러쳐져 마치 세상의 중심이 옮겨진 듯한 느낌을 받는 곳이었다.

나는 배낭에서 마른고기 한 조각을 떼어내 컵에 넣는다. 심하게 건조되어 공기처럼 가볍고 고유의 형태라곤 찾아볼 길이 없지만, 나는 탁한 물을 조심스레 컵에 부었다. 부정형의 단백질 조직이 검붉은 빛을 띠며 뒤엉킨 사슬을 풀어내듯 천천히 부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겨운 피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나는 꾹 참고 손가락으로, 풀어진 고기 조각 한 점을 집어 입에 넣는다. 그리고 혀를 이용해 몇 개 남지 않은 이빨 사이로 고기를 몰아넣은 뒤, 조심스레 씹는다. 향긋한 행복이 올라온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나는 무성한 풀 사이에 흐릿한 팻말을 마침내 발견했다.

‘자비로운 자의 회당’

거의 반나절을, 이 폐허의 도시를 헤맨 끝에, 나는 비로소 쉴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무거워진 발을 질질 끌고 검은 옻칠이 비교적 최근에 된 듯한 대문 앞에 도달한 나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건물을 올려다봤다.

비록 처참하게 부서졌지만, 무척 높고 아름다웠다.

수천 년 동안 이곳은 신의 영역이었다.

수많은 교회, 수도원, 성, 궁전, 회관, 대학, 그리고 주택에 이르기까지, 죄지은 인간을 용서한 신의 영광을 표현하는 양식으로 건물들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그런 하늘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티 없이 맑은 날, 누군가 이 고딕 건축의 유물인, 하늘로 솟구친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외벽을 장식한, 아름다운 대칭과 정교한 조각들을 본다면, 절로 감탄이 나와 성호를 그었을 거다.

‘신의 축복이 그대와 함께…’

거친 곳이지만 잠을 자 두어야 한다. 몸뚱이가 잠을 요구한다. 나는 모포를 깐다. 그리고 조심스레 몸은 뉜다. 정적은 어둠처럼 긴장을 동반한다.

지친 몸으로 누운 자리는 다양한 종류의 불편함을 풍기지만 어쩔 수 없다. 항상 고단하다는 것은 아주 잠시나마 편안함의 행복을 극대화한다.

삶의 고단함은 오히려 그 삶을 놓지 않으려는 욕망을 극단적으로 높인다. 모든 고통은 이제 <피할 수 없음>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즐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결국 견디고 버티는 것만이 남았다.

나는 잠을 사랑한다. 아니 어쩌면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은 잠을 갈구하는지도 모르겠다. 잠 속에서 비로소 자유가 된다. 꿈속은 무수한 상황의 단절과 영속을 체험하지만, 그런데도 오직 하나, 절대 죽지 않는다는 장점은 근사한다.

그리고 나는 돔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그리고 소원한다. 꿈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

죽음의 도시가 끝나는 지점. 마치 아마겟돈을 알기라도 한 듯, 반짝이는 13개의 반월형 돔. 이스트 델타곤 지역. 오염물질 방지를 위한 거대한 방벽이 겹겹으로 쌓인 곳. 버려진 땅의 죽어가는 이들은 늘 이곳을 갈망한다. 모든 오염과 치명적인 방사선을 차단하는 곳.

소위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극소수의 부자들이 거주하는 하베스트 프로텍터 돔. 아이의 생명을 지켜줄 유일한 대피처.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파괴하고 어떤 의도로 종말을 계획하였는지는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내 아이가 그의 자연적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곳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나의 여정은 오로지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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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갑자기 눈을 떴다. 섬뜩함이 몸을 감싼다.

폐허의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나는 몸으로 진동을 먼저 느꼈다. 뒤이어 소리를 들었다. 땅의 흔들림은 미세하지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신속하다.

유기체는 죽어가고 기계는 섬뜩하리만큼 활발하다. 공포가 내려왔고 혼란과 반목이 뿌리를 내리고 약탈과 은둔, 반성과 냉혈이 공존한다.

셉터지역에서 울리는 둔중한 쇳소리. 세르지역을 순찰하는 용병대가 분명했다. 움직이는 모든 차량은 두꺼운 철갑을 두르고 앞뒤로 무장을 했다. 그들은 우선 강한 굉음으로 환기를 준다. 쥐들처럼 숨어들은 외부인들은 황급히 자리를 뜬다. 하지만 아직 식량을 구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삶을 담보로 숨바꼭질을 하기 시작한다. 나의 유년 시절은 숨기와 달리기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수많은 질곡과 난관이 부딪쳐 만든 개인사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성장기 대부분을 폭력의 그늘에 지낸 나에게 남은 과거는, 내 몸뚱이에 새겨진 어그러진 그림이다. 거친 붓 그림의 용.

내 몸을 휘감고 내 삶을 관통하고 걸음걸음의 고통에 아로새겨진 족쇄. 염료와 황산바륨에 산을 녹여 만든 용액. 붓끝이 닿는 곳이 타들어 가며 새겨진 고통으로, 그 시절, 나는 타인을 오로지 증오와 폭력의 대상으로 치환하고 말았다.

헝클어짐 혹은 파괴에 대한 집착. 끝없는 갈증에 길듦 혹은 종속. 욕망은 즉흥적이고 짧은 속죄는 늘 타인으로 눈을 돌려 투영시켰다. 적어도 내가 난독증 치료를 받기 전까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행위는 반성이 없었다.

나는 해밀건 박사의 오픈에어칩을 뇌 속에 박았다. 대부분 환자가 치료 후, 칩 제거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생 간직하고 있다. 간직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다.

나는 내 생각이 글로 표현되는 장치를 이용하여 끊임없이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글에 대한 애착이, 비로소 나를 과거로부터 단절시켰다.

하지만 신은 사람들의 오만과 함께 결국 영원히 사라졌다. 거친 폐허에 내몰린 인간은 애초의 야수로 돌아갔다. 그리고 세상에 널려있는 잿더미는, 재밌게도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가치의 차이, 숭고함의 깊이, 고상함의 넓이가 떠나간 자리는, 처절한 생존 의식이 바람 속 비린내로 번져온다. 생존만이 유일한 목적이다. 한 톨의 쌀알이 우리의 신앙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죽음의 도시에서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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