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커플

by 남킹


위험한 커플

EP 001. "아무거나"의 저주

등장인물:

수현 - (20대 후반)

지훈 - (20대 후반)

장소:

수현과 지훈의 아파트 - 침실, 거실

#1. 수현과 지훈의 아파트 - 침실 (NIGHT)

어둑해진 침실. 수현이 침대 옆에 서서 침대에 대자로 뻗어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는 지훈을 내려다본다.

수현

> 저녁 뭐 먹을까?

지훈,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지훈

> 아무거나.

수현의 미간에 아주 미세한 경련이 인다. 이놈의 '아무거나'. 연애 초반엔 쿨해 보였지만, 3년 차에 접어든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하고 짜증 나는 네 글자다.

수현

> ( 애써 차분하게 )

> 그래, 아무거나. 그럼 떡볶이?

지훈

> ( 폰을 보며 )

> 어우, 어제 먹었잖아. 속 쓰려.

수현

> 피자는?

지훈

> ( 폰을 보며 )

> 밀가루 좀 그런데. 요즘 소화가 영…

수현

> 그럼 한식? 김치찌개 어때?

지훈

> ( 폰을 보며 )

> 나쁘지 않은데… 뭔가 확 당기진 않네.

수현

> 파스타?

지훈

> ( 폰을 보며, 귀찮은 듯 )

> 크림? 토마토? 아, 로제? 모르겠다, 뭔가 헤비해.

수현, 슬슬 열이 받기 시작한다. 그녀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려 애쓰며.

수현

> ( 이를 악물고 )

> 야, 장지훈. 너 아까 분명히 '아무거나'라고 했다?

지훈

> ( 여전히 폰을 보며, 배를 긁적이며 )

> 엉. 아무거나 괜찮아.

수현

> 근데 내가 말한 떡볶이, 피자, 김치찌개, 파스타는 왜 '아무거나'에서 자꾸 제외되는 건데? 얘네 뭐 유령 메뉴야? 슈뢰딩거의 아무거나야?

지훈

> ( 폰을 보며 )

>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지금 딱히 안 땡겨서 그렇지.

그 태평함에 수현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다.

수현

> 와, 네 ‘아무거나’는 무슨 플래티넘 등급이라도 있냐? 일반 ‘아무거나’랑은 차원이 달라? ‘프리미엄 아무거나’ 뭐 그런 거야?!

지훈

> ( 폰을 보며 )

> 비꼬지 마라.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거잖아.

수현

> 솔직?! 이게 솔직한 거야?! 이건 그냥 네 안에 있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데 네가 알아서 내가 원하는 걸 딱 맞춰줬으면 좋겠다'는 심보를 '아무거나'라는 네 글자로 포장한 거잖아! 소비자를 기만하는 과대포장이라고, 이 인간아!

수현이 랩처럼 쏘아붙이자, 그제야 지훈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쳐다본다.

지훈

> ( 조금 놀란 표정 )

> 와, 말 한 번 살벌하게 한다. 내가 뭐 죽을죄를 졌냐?

수현

> 죽을죄? 아니. 근데 내 속에서 천불이 나게 한 죄는 졌지. 너 때문에 내 저녁 메뉴 고민하다가 하루 다 가겠다. 이러다 우리 굶어 죽으면 사인은 '아무거나'야, 알겠냐?

지훈

> ( 한숨 )

>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내가 정할게.

수현

> ( 팔짱을 끼고 지훈을 노려보며 )

> 오, 드디어? '아무거나'의 신께서 강림하시나? 뭔데, 말해봐.

지훈,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는 시늉을 한다. 이윽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지훈

> ( 심각하게 )

> 음… 역시…

잠시 침묵 후, 씨익 웃으며.

지훈

> 아무거나?

수현, 할 말을 잃는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수현

> 됐다, 이 자식아! 나 혼자 컵라면 먹을 거다! 넌 평생 '아무거나'나 고민하다 굶어 죽어라!

수현, 침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SOUND

> 쾅! (문 닫히는 소리)

침실 문 너머로 지훈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훈

> ( 문 밖으로 대고 )

> 야, 강수현! 컵라면도 '아무거나'에 포함되는 거 아니냐? 같이 먹자!

수현, 닫았던 방문을 벌컥 열고 다시 침실 문 앞에 나타나서 소리친다.

수현

> 이건 '아무거나'가 아니라 '내 최후의 선택'이거든?! 그리고 네 '아무거나' 리스트엔 없어, 이 웬수야!

지훈, 낄낄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문 앞에 선 수현에게 다가선다.

지훈

> ( 수현의 어깨를 살살 치며 )

> 삐졌냐? 삐졌네, 삐졌어. 알았어, 내가 맛있는 거 시킬게. 진짜 '네가 좋아하는 아무거나'로.

수현, 잠시 망설이다가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온다.

수현

> ( 작게 중얼거리듯 )

> …치킨.

지훈, 활짝 웃으며.

지훈

> 콜. 역시 우린 치킨으로 대동단결이지.

결국 그들의 '아무거나'는 오늘도 치킨으로 귀결되었다.

#2. 수현과 지훈의 아파트 - 거실 (NIGHT)

수현과 지훈이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치킨을 먹고 있다. 지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치킨을 뜯고, 수현은 아직 약간 뚱한 표정이지만 치킨을 먹기 시작한다.

어쩌면 '아무거나'의 저주는, '결국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과정은 늘 이렇게 살벌했지만.

FADE OUT.

EP 002. 넷플릭스 알고리즘보다 어려운 너

등장인물

시간: 금요일 밤

장소: 수현과 지훈의 집 거실

씬 1. 수현과 지훈의 집 거실 - 밤 (FRIDAY NIGHT)

금요일 밤. 거실 테이블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찜닭이 놓여있다. 매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수현, 비장한 표정으로 넷플릭스 리모컨을 들고 TV 앞에 서 있다.

소파에 반쯤 누워 닭다리를 뜯던 지훈, 심드렁한 표정이다.

수현

> 자, 오늘은 뭘로 우리 영혼을 정화해 볼까나?

지훈

> (닭다리 뼈를 발라내며)

> 아무거나.

수현

> (한숨)

> ‘아무거나’ 대첩으로 지난주에 한바탕 난리를 치렀건만, 레퍼토리가 여전하시네요, 장지훈 씨.

수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리모컨 버튼을 누른다. 넷플릭스 메인 화면이 TV에 뜬다.

수현

> 오늘은 좀 가볍게 로맨틱 코미디 어때?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시리즈 정주행?

지훈

> (입맛을 다시며)

> 어우, 간지러워. 내 손발 오징어 되는 거 보고 싶냐? 좀 더 박진감 넘치는 거 없냐?

수현

> 박진감? 그럼 액션? '익스트랙션'? 크리스 헴스워스 오빠 근육 감상이라도 할래?

지훈

> 음… 총소리 너무 시끄러울 것 같은데. 오늘 좀 피곤해서.

수현

> 피곤하면 힐링물? '슬기로운 의사생활' 같은 거. 훈훈하고 좋잖아.

지훈

> 나 병원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그거 너무 길어. 시작하면 주말 순삭이야.

수현의 손가락이 넷플릭스 화면 위를 방황한다. 스릴러, SF, 다큐멘터리, 예능… 다양한 포스터가 스쳐 지나간다. 지훈은 미동도 없다.

수현

> (어이없다는 듯)

> 야, 장지훈. 너 진짜 넷플릭스 알고리즘보다 더 어렵다. 걔는 내가 본 거라도 분석해서 추천해주지, 넌 뭐 기준이 뭔데? 혹시 네 머릿속에 '오늘의 지훈이 기분 맞추기'라는 숨겨진 카테고리라도 있냐?

지훈

> (능글맞게)

> 까칠하기는. 그냥 딱 꽂히는 게 없는 걸 어떡해.

수현

> 꽂히는 거? 네 취향은 넷플릭스 미스터리 장르보다 더 예측 불가능해. 범인이 누군지 맞히는 게 네가 뭘 보고 싶어 하는지 맞히는 것보다 쉽겠다, 이 인간아!

수현, 리모컨으로 지훈의 이마를 콩, 때린다.

지훈

> (이마를 문지르며)

> 아! 왜 때려! 폭력 반대!

수현

> 네 우유부단함이 폭력이다, 이놈아! 이러다 찜닭 다 식겠다. 그냥 내가 본 거 또 볼란다. '브리저튼' 시즌 3 복습이나 해야지.

수현이 '브리저튼' 포스터로 커서를 옮기자, 지훈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다.

지훈

> (질색하며)

> 잠깐! 스톱! 그걸 또 보겠다고? 그 느끼한 공작 나리 얼굴을? 차라리 다큐멘터리 '지구의 눈물'을 보고 펑펑 울겠다!

수현

> (콧방귀를 뀌며)

> 흥, 네가 뭘 알아! 이건 역사와 로맨스가 어우러진 예술작품이거든? 네 메마른 감성으로는 이해 못 할 고품격 드라마라고.

지훈

> 고품격? 그냥 예쁜 옷 입고 연애하는 거잖아! 그리고 너 그거 이미 세 번이나 봤잖아. 대사까지 외우겠더만.

수현

> 네가 좋아하는 게임도 맨날 똑같은 맵에서 똑같은 캐릭터로 하잖아! 그건 괜찮고 이건 안돼? 내로남불 쩌네!

결국 리모컨을 두고 옥신각신 쟁탈전을 벌인다. 엎치락뒤치락, 티격태격.

수현은 '브리저튼'을 사수하려 하고, 지훈은 리모컨을 뺏으려 한다.

찜닭은 점점 식어간다. 넷플릭스 화면은 추천작 목록만 하염없이 보여주고 있다.

지훈

> (버둥거리며)

> 아무거나 괜찮다니까! 그냥 아무거나!

수현

> (힘주어)

> 아, 진짜! 너 때문에 드라마 한 편 보려다 내가 드라마를 찍겠다!

지훈

> 네가 하도 유난을 떠니까 그렇지! 그냥 아무거나 틀면 되잖아!

그때, 지훈의 손이 미끄러지며 리모컨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쿵, 떨어진다.

동시에 TV 화면이 바뀐다.

(SOUND EFFECT: 채널 변경되는 소리, 촌스러운 트로트 반주 시작)

화면이 바뀌며, 다소 촌스러운 무대 배경과 함께 뽕짝 느낌의 트로트 반주가 흘러나온다. 지역 방송국 노래자랑 프로그램이다.

화면 속, 한 할머니가 구성진 꺾기 창법으로 열창하고 있다.

수현과 지훈, 잠시 말을 잃고 화면을 응시한다.

몇 초간 정적.

이윽고 둘 다 피식, 웃음이 터진다.

지훈

> (배를 잡고 웃으며)

> 푸하하! 이게 뭐야! 할머니 꺾기 예술이신데?

수현

> (웃음을 참으며)

> 야, 저분 최소 결승감이다. '아무거나' 보다가 '전국노래자랑' 볼 줄이야.

두 사람,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이내 나란히 소파에 앉아 식어가는 찜닭을 다시 집어든다.

화면 속 할머니는 여전히 열정적으로 노래를 이어가고,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웃기고 정겹다.

지훈

> (찜닭을 우물거리며)

> …근데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

수현

> (고개를 끄덕이며)

> 그러게. 오늘 우리의 '아무거나'는 이거였나 보다.

넷플릭스 알고리즘도 예측하지 못한 선택.

두 사람은 말없이 찜닭을 먹으며 화면 속 노래자랑에 빠져든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그러나 어딘가 웃긴 금요일 밤 풍경.

수현 (N)

> 넷플릭스 알고리즘도 예측하지 못한 선택. 결국 그들의 금요일 밤은, 예상치 못한 '아무거나'로 채워지고 있었다. 물론, 다음 주 금요일엔 또 다른 리모컨 전쟁이 벌어질 테지만 말이다.

화면, 노래자랑을 보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FADE OUT.

EP 003. 세탁기 속 핑크 양말의 비밀

시간: 일요일 아침

장소: 수현과 지훈이 함께 사는 집 (거실, 욕실)

S#1. 아파트 거실 - 아침

일요일 아침의 햇살이 거실을 비춘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멈춘 직후.

수현, 세탁기 앞에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그녀의 손에는 원래 새하얀 색이었을 티셔츠가 들려있는데, 지금은 연분홍빛으로 얼룩덜룩 물들어 있다.

수현

>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폭발하듯)

> 으아아아악! 장지훈! 너 이리 안 와?!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지훈, 잠옷 차림에 부스스한 머리로 허둥지둥 뛰쳐나온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듯, 아직 잠이 덜 깬 표정이다.

지훈

> (눈을 비비며)

> 왜, 왜! 무슨 일이야? 집에 불이라도 났어?

수현

> (물든 티셔츠를 지훈의 눈앞에 들이밀며)

> 이거… 이거 내 최애 흰 티인데… 이게 지금 무슨 꼴이냐고!

수현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린다. 지훈, 그제야 상황 파악을 위해 세탁기 안을 들여다본다. 다른 빨랫감들 사이로 앙증맞은 핑크색 양말 한 짝이 보인다.

지훈

> (양말을 발견하고, 멋쩍은 표정으로)

> 아… 저건 내 양말인데…

지훈의 말에 수현의 눈에 불꽃이 튄다.

수현

> (기가 막힌다는 듯)

> 네 양말? 그래, 네 핑크 양말 테러리스트 때문에 내 아끼는 흰 티가 순교하셨다! 이 핑크색 물 빠지는 양말을 왜 흰 빨래랑 같이 넣는데! 너 혹시 색맹 테스트에서 빨간색 초록색 구분 못 하는 그런 거냐?!

지훈

> (억울하다는 듯)

> 아니, 나는 그냥… 양말 한 짝이라 괜찮을 줄 알았지. 그리고 그거 그렇게 물 빠지는 양말 아니었는데…

수현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증거가 여기 떡하니 있는데! (티셔츠를 흔들며) 이게 네 눈에는 흰색으로 보이냐? 필터 낀 인스타그램 사진으로 보여? 이건 명백한 핑크색 테러야! 내 흰 티 돌려내!

지훈

> (한숨)

> 야, 진정해. 세탁 한번 잘못했다고 사람을 아주 살인범 취급하네. 내가 뭐 일부러 그랬겠냐?

수현

> 일부러가 아니면 뭔데! 과실치사? 아니, 이건 과실염색이지! 너 앞으로 빨래 금지야! 세탁기 접근 금지! 반경 5미터 이내로 얼씬도 하지 마!

수현, 씩씩거리며 핑크빛 티셔츠를 다시 흔든다. 지훈,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인다.

지훈

> 아, 진짜 미안하다. 내가 새로 사줄게. 똑같은 걸로.

수현

> 똑같은 거? 이건 한정판이었다고! 이제 어디서도 못 구해! 네 핑크 양말 한 짝 때문에 내 패션 자부심이 나락으로 떨어졌어! 너 오늘 점심 없어!

지훈

> (심각한 표정으로)

> 아니, 왜 내 점심까지… 양말이 잘못했지 내가 잘못했냐? 핑크 양말한테 따져!

수현

> (눈을 가늘게 뜨며 지훈을 쏘아본다)

> 그 핑크 양말 주인은 너거든? 연대 책임이야! 그리고 그 핑크 양말, 너 설마… (지훈의 발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거 내 거 아니냐?!

지훈, 뜨끔하여 슬그머니 발을 뒤로 숨긴다.

지훈

> (시선을 피하며)

> 무, 무슨 소리야! 남자 발에 맞는 핑크 양말이 얼마나 많은데!

수현

> (확신에 찬 목소리로)

> 너 저번에 내 서랍에서 뭐 뒤적거리는 거 봤는데! 그때 훔쳐 신었지! 이 양말 도둑놈아! 내 양말로 내 옷을 망쳐? 완전 자폭 테러잖아!

지훈

> (어색하게 웃으며)

> 아니, 그게… 네 양말이 예뻐서… 한번 신어봤는데… 깜빡하고 같이 빨래통에 넣었네. 하하.

수현

> (어이없다는 듯)

> 하하? 웃음이 나와? 내 소중한 핑크 양말로 내 최애 흰 티를 핑크색으로 물들여 놓고 웃음이 나오냐고! 너 진짜… 오늘 나랑 끝장 볼래?

지훈

> (다급하게 수현을 진정시키려 하며)

> 워워, 진정해. 강수현. 내가 진짜 잘못했다. 내가 저 티셔츠, 어떻게든 원상복구 시켜볼게. 인터넷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거야.

지훈, 황급히 수현 손에서 핑크빛 티셔츠를 받아들고 욕실로 뛰어 들어간다. 수현,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본다.

S#2. 아파트 욕실 - 잠시 후

욕실 안. 지훈이 세면대에서 티셔츠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잠시 후, 다급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훈 (O.S)

> 야! 강수현! 락스 어디 있어? 락스!

거실에 있던 수현, ‘락스’라는 말에 경악하며 욕실로 뛰어 들어간다.

수현

> (소리치며)

> 뭐? 락스? 야! 그거 쓰면 완전 망해! 그냥 걸레 되는 거야!

욕실 문이 열리고, 수현이 들어선다.

지훈은 이미 락스 병을 찾아 들고 티셔츠에 부으려는 참이다.

핑크빛으로 물든 티셔츠와 락스 병, 그리고 두 사람의 아연실색한 얼굴이 교차된다.

욕실 안에 락스 냄새가 살짝 풍기기 시작한다.

(FADE OUT)

S#3. 에필로그 (음성 내레이션 위주, 짧은 몽타주 화면 가능)

내레이션 (수현, 혹은 제3자)

> 세탁기 속 핑크 양말의 비밀은 결국 '지훈의 양말 도둑질'과 '수현의 최애 흰 티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그들의 일요일 아침은, 핑크빛 분노와 락스 냄새로 얼룩졌다. 물론, 이 소동 후 장지훈은 한동안 빨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화면: 지훈이 세탁기 근처에만 가도 질색하는 수현의 모습, 혹은 빨래 금지 구역 표지판이 붙은 세탁기 모습 등 코믹한 장면 스케치 후 FADE TO BLACK.)

EP 004. 샴푸 뚜껑은 누가 닫나

FADE IN:

SCENE 1

INT. 욕실 - 아침

음악) 경쾌하고 발랄한 BGM.

수현(30대 초반), 젖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샤워 가운 차림으로 서 있다. 그녀의 손에는 뚜껑이 활짝 열린 샴푸통이 들려 있고,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다.

수현

> (짜증 섞인 고함)

> 아, 진짜! 장지훈!

SCENE 2

INT. 거실 - 아침

지훈(30대 초반), 막 샤워를 끝낸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온다. 해맑은 표정.

수현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지훈

> (능글맞게 웃으며)

> 또 왜 그래, 아침부터. 혹시 내 미모에 또 반했냐?

수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친다. 그녀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진다.

수현

> 미모? 네 뻔뻔함에 질렸다, 이 인간아! 이거 안 보여? 샴푸 뚜껑! 또 안 닫았지!

수현이 샴푸통을 지훈 코앞에 들이민다.

지훈

> (시큰둥하게)

> 아… 그거. 깜빡했네. 이따 닫으려고 했는데.

수현

> (목소리 톤이 한껏 올라가며)

> 이따? 네 ‘이따’는 ‘다음 생’이랑 동의어냐? 샴푸 뚜껑 닫는 게 그렇게 어렵냐? 세종대왕님이 한글 창제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 아니면 뭐, 뚜껑 닫으면 손가락에 알레르기라도 생기냐?

지훈

> (귀찮다는 듯)

> 야, 쪼잔하게 샴푸 뚜껑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내가 뭐 샴푸를 다 쏟기라도 했냐?

수현

> 쪼잔? 이게 쪼잔한 거야? 뚜껑 열어놓으면 샴푸 굳고, 먼지 들어가고, 심지어 물 들어가서 변질될 수도 있는 거 몰라? 네 머리는 장식이냐? 뇌 대신 우동사리 넣고 다니냐고!

지훈

> (발끈하며)

> 와, 말 심하게 한다. 우동사리라니. 그리고 샴푸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냥 새로 사면 되지.

수현

> 새로 사? 네 돈으로 사! 내 돈으로는 한 방울도 아까워! 그리고 이건 돈 문제가 아니잖아. 기본적인 매너, 습관의 문제라고! 너 혹시 화장실 변기 뚜껑도 열어놓고 다니는 그런 부류냐?

지훈, 순간 흠칫하며 시선을 피한다.

지훈

>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 …아니거든! 변기 뚜껑은 꼬박꼬박 닫거든!

수현

> (의심의 눈초리로)

> 수상한데? 목소리 떨리는 거 보니 백퍼센트네. 너 진짜… 기본적인 생활 예절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유치원 다시 보낼까?

> (유치원 선생님 흉내를 내며, 과장된 몸짓으로)

> '지훈아, 샴푸 뚜껑은 꼭 닫아요~ 안 그러면 맴매!' 이렇게?

지훈,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지훈

> (버럭)

> 아, 그만해! 알았어, 다음부터 꼭 닫을게. 됐냐?

수현

> (단호하게)

> 다음? 다음이 어디 있어! 지금 당장 가서 닫아! 그리고 앞으로 샴푸 뚜껑 열린 채로 발견되면, 네 용돈에서 샴푸값만큼 차감이다. 이건 경고가 아니라 통보야.

지훈

> (억울하다는 듯)

> 치사하다, 진짜. 샴푸 뚜껑 하나에 무슨 용돈까지… 너 완전 짠순이 다 됐네.

수현

> (의기양양하게)

> 짠순이? 아니, 난 합리적인 소비자이자, 너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정당한 페널티를 부과하는 정의의 사도다! 그리고 넌 그냥… 뚜껑 하나 제대로 못 닫는 생활력 제로인 루저고.

지훈, 수현의 팩트 폭격에 할 말을 잃고 입을 삐죽인다.

SCENE 3

INT. 욕실 - 아침

지훈,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간다.

샴푸 뚜껑을 집어 "딱!"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나도록 닫는다.

지훈

> (거실의 수현을 향해 소리치며)

> 됐냐? 닫았다! 아주 꽉 닫았다! 이제 만족하냐, 샴푸 경찰 나으리?

SCENE 4

INT. 거실 - 아침

수현, 팔짱을 끼고 욕실 쪽을 보다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수현

> 어쭈, 반항하는 거야? 좋아. 그럼 앞으로 린스 뚜껑, 바디워시 뚜껑, 치약 뚜껑까지 전부 검사 대상이다. 하나라도 열려 있으면 그날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지훈, 욕실 문 앞에 서서 기가 막힌 표정을 짓는다.

지훈

> 와… 너 진짜 독하다. 나랑 살림 합치더니 아주 군기반장이 다 됐어. 이러다 나중에 숨 쉬는 것도 허락받고 쉬어야 하는 거 아니냐?

수현

>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샴푸통을 제자리에 놓으며)

> 네 생활 태도를 보면 그럴 날이 올지도 모르지. 똑바로 해, 장지훈. 안 그러면 내 잔소리 폭격에 네 고막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지훈, 깊은 한숨을 쉰다.

지훈 (V.O)

> 아, 연애 초반엔 천사 같았는데… 지금은 샴푸 뚜껑 단속반이라니.

지훈, 잠시 생각하더니 수현에게 다가간다.

지훈 (V.O)

>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잔소리 속에는 결국 나를 향한 애정과 관심이 숨어있다는 것을. 물론, 그 표현 방식이 좀… 격해서 그렇지.

지훈, 수현 옆에 서서 슬쩍 미소를 짓는다.

지훈

> 알았어, 알았다고. 샴푸 뚜껑, 내가 책임지고 닫는다. 대신… 오늘 저녁은 네가 쏘는 걸로.

수현, 어이없다는 듯 지훈을 쳐다보며 웃는다.

수현

> (코웃음치며)

> 웃기시네. 샴푸 뚜껑 닫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리고 저녁은 당연히 네가 사야지. 오늘 아침부터 나한테 잔소리 폭탄 맞았잖아. 정신적 피해보상 청구한다.

지훈,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훈 (V.O)

> 샴푸 뚜껑 닫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바로 수현이의 잔소리를 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 또 깨달았다.

수현은 의기양양하게 커피를 따르러 주방으로 향하고, 지훈은 그런 수현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지만, 어딘지 모르게 애정이 담긴 눈빛이다.

FADE OUT.

EP 005. 새벽 3시, 배달의 민족 VIP

등장인물:

시간: 새벽 3시

장소: 수현과 지훈이 함께 사는 아파트

SCENE #1

INT. 수현의 방 - 밤 (새벽 3시)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수현,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수현, 코를 킁킁거리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수현

> (잠결에 중얼거리며)

> 으음… 무슨 냄새지?

수현, 천천히 눈을 뜬다. 어둠 속에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으려는 듯 집중한다. 고소하면서도 기름진, 치명적인 냄새.

수현

> (낮게)

> …치킨?

수현,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온다. 살금살금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아주 살짝 연다.

SCENE #2

INT. 거실 - 계속

거실은 어둡지만, TV 화면의 불빛이 은은하게 공간을 밝히고 있다.

소파에 지훈의 실루엣이 보인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수현, 눈을 가늘게 뜨고 지훈을 살핀다.

수현

> (낮고 싸늘하게)

> 장지훈…?

지훈, 움찔하며 어깨를 떤다. 황급히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등 뒤로 숨기려 하지만, 어색한 동작이 다 티가 난다.

수현,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 나온다.

수현

> 너… 지금 뭐 먹냐?

지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지훈

> 아,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물 마시고 있었어.

수현

> (기가 막힌다는 듯)

> 물? 그 향긋한 치킨 냄새는 환각이고, 네 입가에 묻은 기름기는 신기루냐? 손에 들고 있는 건 뭔데, 투명 치킨이라도 개발했어?

수현, 매섭게 쏘아붙이며 지훈의 등 뒤로 잽싸게 손을 뻗는다.

지훈,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수현의 손에 바삭한 튀김옷을 자랑하는 닭다리가 들려 나온다.

수현

> (닭다리를 지훈 눈앞에 흔들며)

> 이게… 이게 바로 네가 말한 '물'이냐? 이 배신자! 우리 같이 다이어트하자며! 야식 절대 금지라며! 네 의지는 두부보다 더 물렁하냐?

수현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듯하다. 지훈, 닭다리를 든 채 쩔쩔맨다.

지훈

> 아니, 그게… 오늘따라 유난히 치킨이 당겨서… 딱 한 조각만 먹으려고 했는데…

수현

> (어이없다는 듯 치킨 박스를 곁눈질하며)

> 한 조각? 이게 어딜 봐서 한 조각이야! 거의 반 마리는 먹은 것 같은데! 너 혹시 밤마다 몰래 배달의 민족 VIP 등극하고 있는 거 아니냐? 내 눈을 속이고 야식 파티를 벌여?

지훈

> (시선을 피하며)

> VIP는 무슨… 그냥… 가끔… 아주 가끔 시켜 먹는 거야.

수현

> (팔짱을 끼며)

> 아주 가끔? 지난주에도 족발 시켜 먹다 걸렸잖아! 그 전주에는 보쌈이었고! 네 '아주 가끔'의 기준은 일반인이랑 다른가 봐? 혹시 '매일'을 '아주 가끔'으로 착각하는 희귀병이라도 앓고 있냐?

지훈, 닭다리를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다.

지훈

> 미안하다… 내가 다이어트의 적이다… 유혹을 이기지 못했어.

수현

> 유혹? 이건 유혹 수준이 아니라 거의 생존 본능 아니냐? 네 위장은 블랙홀이야? 밤만 되면 음식물을 빨아들여?

지훈

>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 아, 배고픈 걸 어떡해… 낮에 네가 하도 쪼아서 저녁도 조금밖에 못 먹었더니…

수현

> (목소리가 높아지며)

> 뭐? 내 탓이라고? 지금 이 상황이 내 탓이라는 거야? 내가 너 살 빼라고 잔소리하는 게 죄냐? 네 건강 생각해서 그러는 거잖아!

지훈

> 알아, 아는데…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 풀만 먹고 어떻게 살아. 인간적으로 닭가슴살은 너무 퍽퍽하다고.

수현

> 그래서 몰래 치킨을 뜯어? 그것도 새벽 3시에? 너 진짜… 괘씸해서라도 용서 못 해!

수현, 씩씩거린다. 지훈, 슬그머니 치킨 박스를 수현 앞으로 민다. 치킨의 고소한 냄새가 더욱 강하게 풍긴다.

지훈

> …한 입만 먹어볼래? 진짜 맛있는데… 바삭함이 살아있어.

수현, 잠시 고민한다. 코를 자극하는 냄새, 눈앞의 바삭한 튀김옷. 갈등하는 표정.

수현

>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 됐어! 안 먹어! 난 너처럼 의지박약 아니거든?

지훈

> (능글맞게 웃으며 치킨 조각 하나를 집어 수현 입가로 가져간다)

> 에이, 그러지 말고. 딱 한 입만. 진짜 후회 안 할 텐데. 이 집 양념이 기가 막히거든.

수현, 지훈이 내민 치킨 조각과 지훈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잠시 망설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수현

> (눈이 커지며)

> …음!

입안 가득 퍼지는 바삭한 튀김옷, 촉촉한 속살, 매콤달콤한 양념의 조화.

수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진다.

지훈

> (만족스럽게)

> 거봐, 맛있지?

수현

> (입가에 양념을 묻힌 채)

> …흥! 맛은 있네. 하지만 이건 이거고, 넌 여전히 유죄야!

수현,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느새 치킨 박스에서 다른 조각을 집어 든다.

결국 두 사람, 새벽 3시에 나란히 소파에 앉아 치킨을 뜯는다. TV에서는 의미 없는 화면이 흘러나온다.

수현

> (우물거리며)

> 근데… 진짜 맛있다. 어디 치킨이야?

지훈

> (의기양양하게)

> 비밀. 나만의 야식 성지거든.

수현

> 치, 알려주지도 않을 거면서. (한숨) 근데 우리 다이어트는 어떡하냐?

지훈

> (비장하게 치킨 뼈를 내려놓으며)

> 내일부터.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하자.

수현, 지훈의 말에 피식 웃는다.

수현 (NARRATION)

> 새벽 3시의 야식 파티는 그렇게 또 한 번의 '내일부터 다이어트' 약속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우린 알고 있었다. 아마 다음 주 이 시간에도, 둘 중 누군가는 배달의 민족 앱을 켜고 있을 거라는 것을. 그게 바로 '위험한 남과 여'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 서로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화면, 천천히 어두워진다.

FADE OUT.

EP 006. 길치의 변명

등장인물

네비 언니 (목소리 출연): 네비게이션 안내 음성

S#1. 지훈의 차 안 - 낮

햇살 좋은 오후. 지훈이 운전대를 잡고 있고, 수현은 조수석에 앉아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수현

> (불안한 목소리로)

> 야, 장지훈. 여기 어디야?

지훈

> (애써 태연한 척, 룸미러로 수현을 힐끗 본다)

> 어? 거의 다 왔어. 이쪽 길이 좀 더 빠르다고 해서.

수현

> 빠르다고? 아까 네비 언니는 직진하라고 했는데, 너 갑자기 우회전했잖아. 지금 네비 언니랑 기 싸움하는 거야? 아니면 혹시… 네비 언니랑 싸웠냐?

> (눈을 가늘게 뜨고 지훈을 쏘아본다)

지훈

>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핸들을 꽉 잡으며)

> 아니, 싸우긴 뭘 싸워. 그냥… 내 감이 이쪽이라고 말해주길래. 가끔은 기계보다 인간의 직감이 더 정확할 때도 있잖아.

수현

> (어이없다는 듯)

> 네 감? 네 감 믿고 따라갔다가 미아 될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네 방향 감각은 거의 신의 영역이야. 인간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지훈

> 와, 너무하네. 내가 그렇게까지 길치는 아니거든?

수현

> 아니라고? 지난번에 우리 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너 30분 동안 같은 골목만 뱅뱅 돌았던 거 기억 안 나? 그때 네 별명이 '골목길의 유령'이었잖아.

지훈, 할 말을 잃고 슬쩍 백미러로 자신의 초조한 얼굴을 확인한다.

지훈

> 그건… 그날따라 유난히 골목이 헷갈려서 그랬던 거고. 오늘은 진짜 자신 있다고.

수현

> 자신? 네 자신감의 근거는 뭔데? 혹시 네 머릿속에 자체 GPS라도 탑재되어 있냐? 근데 그 GPS 고장 난 지 꽤 된 것 같은데?

수현, 팔짱을 끼고 창밖을 내다본다. 점점 더 생경한 풍경. 논과 밭이 보이고, 저 멀리 야트막한 산도 보인다.

수현

> …장지훈. 우리 지금 혹시… 귀농 체험하러 가는 거니? 흙냄새가 정겹네, 아주.

지훈

> (당황하며)

> 아니, 그럴 리가!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지훈, 결국 차를 길가에 세우고 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한다. 그의 미간이 점점 좁아진다. 수현은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수현

> 왜, 뭐래? 네비 언니가 화 많이 났대? '이 길치 녀석아,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 뭐 이런 메시지라도 보냈어?

지훈

> (어색하게 웃으며)

> …조금… 돌아온 것 같네. 하하.

수현

> (깊은 한숨)

> 조금? 이게 조금 돌아온 거야?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지금 우리 혹시 서바이벌 게임이라도 시작한 거냐? 최종 목적지는 '문명사회로의 귀환' 뭐 이런 건가?

지훈

> 미안하다… 내가 길을 너무 얕봤네.

수현

> 길을 얕본 게 아니라, 네 능력을 과대평가한 거겠지. 너 그냥 앞으로 운전대 잡지 마. 내가 할게. 아니, 그냥 우리 뚜벅이로 다니자. 그게 제일 안전하겠다.

>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 시늉을 한다)

지훈

> (다급하게 수현을 말리며)

> 아, 진짜 미안!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아니, 오늘 카페는 내가 다 쏜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수현

> 기회? 너한테 기회를 줬다가 우리 오늘 안에 카페 구경도 못 할 것 같은데? 이러다 해 질녘에 노을 맛집 찾아다니는 거 아니냐?

지훈

> (비장한 표정으로)

> 아니야! 진짜 이번엔 제대로 찾아갈 수 있어! 아까 잠깐 정신이 다른 데 팔려서… 집중하면 나도 길 잘 찾는다고!

지훈, 다시 시동을 건다. 수현은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다시 조수석에 앉는다.

수현

> 두고 보자. 이번에도 딴 길로 새면, 너 진짜 각오해야 할 거야. 내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거든.

S#2. 지훈의 차 안 - 낮 (시간 경과)

지훈,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네비게이션 안내에만 집중한다.

네비 언니 (V.O)

> 잠시 후 우회전입니다.

지훈, 네비 언니의 목소리를 신처럼 받들며 조심스럽게 우회전한다.

네비 언니 (V.O)

> 300미터 앞에서 좌회전입니다.

지훈, 긴장한 채 운전한다. 수현은 말없이 창밖을 보거나 지훈을 힐끔거린다.

(MONTAGE)

차가 여러 번 좌회전, 우회전하는 모습.

시간이 흘러 해가 살짝 기울어지는 모습.

지훈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

(/MONTAGE)

S#3. 목적지 카페 앞 / 카페 내부 - 낮

드디어 차가 핫플레이스 느낌의 카페 앞에 멈춘다. 하지만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흘렀다.

카페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창가 자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수현

> (카페 안을 둘러보며, 지훈에게 툴툴거린다)

> 거봐, 내가 뭐라고 했냐. 네 덕분에 황금 같은 주말 오후를 길바닥에서 다 보냈네.

지훈

> (멋쩍게 웃으며 수현의 손을 잡는다)

> 미안해. 대신 내가 여기서 제일 비싼 케이크 사줄게. 그리고 다음부턴… 그냥 얌전히 네비 언니 말 잘 들을게.

수현

> (지훈을 쳐다보며)

> 흥. 그 약속 꼭 지켜라. 안 그러면 다음엔 진짜 너 혼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찍게 될 줄 알아.

지훈

> (진심으로 반성하는 표정. 속마음 V.O)

> 내 방향 감각은 정말이지… 넷플릭스 미스터리 드라마보다 더 예측 불가능하다. 그리고 수현이의 잔소리는, 어쩌면 길 잃은 나를 위한 가장 정확한 네비게이션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네비는 가끔 너무 시끄럽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훈, 수현의 손을 잡고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수현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지훈의 손길에 살짝 미소짓는다.

FADE OUT.

EP 007. 분리수거 올림픽

시간 및 장소

수요일 저녁, 수현과 지훈의 집 현관 앞 분리수거함 & 거실

S#1. 아파트 복도 분리수거함 앞 – 저녁

수요일 저녁. 수현, 잔뜩 찌푸린 얼굴로 플라스틱 배달 용기를 들고 서 있다. 용기 안쪽에는 떡볶이 국물 자국이 선명하다. 집 안에서 TV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수현

> (집 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 야, 장지훈! 너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잠시 후, 지훈, 마지못해 잠옷 차림으로 현관 쪽으로 걸어 나온다. 소파에서 막 일어난 듯 부스스한 모습.

지훈

> (귀찮은 듯)

> 아, 왜 또… 나 지금 드라마 중요한 장면인데.

수현

> (용기를 지훈 코앞에 들이밀며)

> 이게 더 중요해! 이거, 네가 어제 먹고 내놓은 거지? 내가 플라스틱에 음식물 묻히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냐! 이거 완전 재활용 불가 판정이다, 이 인간아!

매콤한 냄새가 확 풍긴다. 지훈,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지훈

> (시선을 피하며)

> 아… 그거. 대충 물로 헹궜는데, 덜 씻겼나 보네.

수현

> 대충? 네 눈에는 이게 대충 헹군 걸로 보여? 이건 거의 떡볶이 국물 샤워를 한 수준인데? 이러면 다른 깨끗한 플라스틱까지 오염시키는 거 몰라? 너 때문에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고!

지훈

> (뒷걸음질 치며)

>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냐? 이거 하나 때문에 지구가 어떻게 파괴돼. 그리고 분리수거 업체에서 알아서 다 처리해 줄 텐데.

수현

> 알아서 처리? 네 안일한 생각이 바로 쓰레기 대란을 일으키는 주범이야! 이건 분리수거가 아니라 그냥 일반 쓰레기라고! 너 때문에 소중한 자원이 낭비되는 거야! 너 혹시 분리수거계의 빌런이라도 되려고 작정했냐?

지훈

> (어이없다는 듯)

> 빌런은 무슨… 그냥 좀 귀찮아서 그랬지. 다음부터 잘할게.

수현

> 다음? 네 ‘다음’은 믿을 수가 없어! 너 지난번엔 페트병 라벨도 안 떼고 버렸잖아! 비닐이랑 종이도 막 섞어서 버리고! 이건 뭐 분리수거 올림픽에 출전해서 반칙으로 실격당할 수준이야!

수현, 분리수거함 뚜껑을 거칠게 열어젖힌다. 그 안에는 지훈의 만행(?)으로 보이는 잘못 분류된 쓰레기들이 뒤섞여 있다.

수현

> 봐라, 이게 네 작품이다! 캔이랑 플라스틱이랑 종이가 한데 엉켜서 댄스파티라도 벌이는 줄 알겠다! 너 혹시 분리수거 방법을 글로만 배웠냐? 아니면 그림판으로 배웠어?

지훈

> (한숨)

> 아, 알았어! 내가 다시 제대로 할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수현

> 화낼 일이지! 이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네가 이렇게 대충 버리면, 결국 다 우리한테 돌아오는 거야! 미세 플라스틱 먹고 싶냐? 쓰레기 섬에서 살고 싶어?

지훈, 수현의 잔소리 폭격에 두 손 두 발 다 든 표정이다.

지훈

> 알았어,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다. 지금 당장 다시 분리수거할게. 아주 완벽하게, 교과서적으로다가.

수현

> (팔짱을 끼며)

> 흥! 말만 번지르르하게. 어디 한번 지켜보겠다.

지훈, 투덜거리면서도 수현의 매서운 눈초리 아래 땀을 뻘뻘 흘린다.

플라스틱 용기를 화장실로 가져가 박박 닦아오고, 페트병 라벨을 칼까지 동원해 꼼꼼히 제거한다. 신문지를 펼쳐 종류별로 칼같이 분류한다. 그 모습이 마치 분리수거 능력 시험이라도 보는 수험생 같다.

수현, 매의 눈으로 그 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지훈, 이마의 땀을 훔치며 정리된 분리수거함 앞에 선다.

지훈

> (으쓱하며)

> 자, 됐냐? 이 정도면 합격이지? 분리수거 장인으로 인정해 주냐?

수현, 잠시 지훈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본 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수현

> 음… 일단 오늘은 합격. 하지만 방심하지 마라. 불시점검은 계속될 테니까.

지훈

> 아, 진짜 깐깐하네. 이러다 우리 집 분리수거함이 아니라 분리수거 박물관 되겠다.

수현

> 그만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이건 너랑 나, 우리 둘만의 올림픽 같은 거라고 생각해. 금메달은 깨끗한 지구고.

수현, 비장하게 말한다. 지훈,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진다.

지훈

> 올림픽? 푸핫. 그럼 나는 분리수거계의 우사인 볼트가 되어주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완벽 분리수거를 선보이겠다!

수현

> (어이없다는 듯 보다가 살짝 미소 지으며)

> 헛소리하지 말고, 손이나 깨끗이 씻어. 그리고 다음 주 분리수거 당번은 너다.

수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먼저 집 안으로 쏙 들어간다.

S#2. 아파트 복도 분리수거함 앞 – 저녁 (계속)

혼자 남은 지훈, 분리수거함 앞에 서서 긴 한숨을 내쉰다.

지훈

> (혼잣말로)

> 결혼은 현실이라더니… 분리수거까지 이렇게 빡셀 줄이야.

> (잠시 생각하다 피식 웃으며)

> 하긴…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올림픽이라…

지훈,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정리된 분리수거함을 한번 쓱 보고, 그도 집 안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다음 주 수요일 저녁이 그려지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지만 입가엔 작은 미소가 걸려 있다.

(FADE OUT.)

EP 008. 양치컵 vs 칫솔꽂이

S#1. 수현과 지훈의 집, 욕실 – 아침

쨍한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욕실.

수현, 한 손에는 자신의 하늘색 양치컵을, 다른 한 손에는 지훈의 노란색 칫솔을 들고 부글부글 끓는 표정이다. 칫솔에는 물기가 채 마르지 않았다.

수현

> (카랑카랑하게)

> 야, 장지훈! 너 또 내 양치컵에 네 칫솔 넣었냐?!

막 잠에서 깬 지훈, 눈을 비비며 부스스한 모습으로 욕실 문 앞에 선다.

지훈

>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능글맞게)

> 무슨 일이야, 자기야. 아침부터 목청 한번 우렁차네. 혹시 성악이라도 전공했어?

수현

> (어이없다는 듯)

> 웃음이 나와? 이게 안 보여? 왜 내 양치컵에 네 칫솔을 넣어! 영역 표시하냐? 여기가 나미비아 초원이야? 네 칫솔이 사자고 내 양치컵이 바오밥 나무냐고!

수현, 지훈의 칫솔을 그의 코앞에 홱 들이민다. 칫솔모에 맺힌 물방울이 지훈의 인중에 살짝 튄다. 지훈, 인상을 찡그린다.

지훈

> (인중을 닦으며)

> 아, 그거. 그냥 칫솔꽂이가 좁아서 잠깐 넣어둔 건데. 뭘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어.

수현

> 잠깐? 네 ‘잠깐’은 거의 영구 임대 수준이던데? 그리고 칫솔꽂이가 왜 좁아? 네 칫솔만 뚱뚱한 거 아니야? 다이어트 좀 시켜!

지훈

> (억울)

> 내 칫솔이 뭘 어쨌다고! 그리고 양치컵 좀 같이 쓰면 어때서 그래.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따져.

수현

> 우리 사이? 우리 사이에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야! 이건 엄연한 사생활 침해라고! 내 양치컵은 나만의 신성한 공간이란 말이다! 네 칫솔모에 묻은 정체불명의 세균들이 내 양치컵을 오염시키는 거, 상상만 해도 끔찍해!

수현,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치컵을 수돗물에 격하게 헹군다.

지훈

> (기가 막힌다는 듯)

> 정체불명의 세균? 야, 내 입안이 무슨 세균 배양지냐? 나름 매일 치카치카 열심히 하는 건전한 시민이거든?

수현

> 건전? 네 생활 습관을 보면 전혀 건전해 보이지 않는데? 그리고 네 칫솔, 가끔 변기 옆에 떨어져 있는 거 내가 몇 번이나 봤는데! 그 칫솔을 내 양치컵에? 완전 세균 폭탄 테러잖아!

지훈, 순간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헛기침을 한다.

지훈

> (시선 회피하며)

> 아, 그건… 가끔… 아주 가끔 실수로 떨어뜨리는 거지. 그리고 바로 주워서 씻거든!

수현

> (눈을 가늘게 뜨고)

> 실수? 네 실수는 왜 이렇게 빈번한 건데! 그리고 씻으면 다야? 이미 변기 주변의 온갖 비말들이 네 칫솔에 내려앉았을 텐데!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수현, 몸서리를 치며 양치컵을 뜨거운 물로 다시 한번 박박 헹군다. 지훈, 그 모습이 못마땅하다.

지훈

>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니냐? 그럼 넌 뭐, 네 칫솔은 무균실에 보관이라도 하냐? 어차피 입안에 들어가는 건데 뭘 그렇게까지.

수현

> 유난? 이건 유난이 아니라 청결의 문제야! 그리고 난 내 칫솔, 꼬박꼬박 칫솔꽂이에 잘 보관하거든? 너처럼 아무 데나 방치하거나 남의 영역 침범 안 한다고!

지훈

> 칫솔꽂이 그거 얼마나 넓다고. 내 칫솔 하나 더 들어간다고 큰일 나냐? 너 완전 쪼잔하다, 강수현.

수현

> (단호하게)

> 쪼잔? 아니, 난 내 영역을 소중히 여기는 자주적인 현대 여성이다! 그리고 넌 그냥… 남의 물건 함부로 쓰는 개념 없는 무단 침입자고!

지훈, 잠시 할 말을 잃고 수현을 바라본다. 이내 묘한 미소를 짓더니 수현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지훈

> (장난스럽게)

> 그렇게 내 칫솔이 싫어? 그럼… 차라리 내 입술은 어때?

지훈, 입술을 쭉 내민다. 수현, 질색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수현

> (손으로 밀어내며)

> 저리 안 가?! 지금 장난이 나와? 그리고 네 입술도 못 믿겠어! 방금 그 세균 가득한 칫솔로 양치했을 거 아니야!

지훈

> (시무룩한 표정으로)

> 에이, 너무하네. 나름 아침부터 키스 시도한 건데, 이렇게까지 철벽을 치다니. 상처받았어.

수현, 지훈의 시무룩한 표정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수현

> (웃음을 참으며)

> 흥, 엄살은. 아무튼, 다시는 내 양치컵에 네 칫솔 넣지 마. 경고했다. 안 그러면 네 칫솔, 변기 청소용으로 강제 전직시켜 버릴 줄 알아.

지훈

> (두 손 들며)

> 알았어, 알았다고. 내 칫솔은 소중하니까. 그럼… 우리 그냥 양치컵 하나로 같이 쓸까? 커플 양치컵 어때?

지훈이 능글맞게 제안하자, 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수현

> 됐거든? 난 그냥 내 하늘색 양치컵 솔로로 쓸란다. 넌 네 노란색 칫솔이랑 잘 해보든가.

수현, 자신의 양치컵에 물을 담아 양치를 시작한다.

지훈, 자신의 노란색 칫솔을 들고 칫솔꽂이를 힐끗 본다. 좁긴 좁아 보인다. 조심스럽게 자기 칫솔을 칫솔꽂이에 꽂는다.

지훈 (E)

> (혼잣말 혹은 생각)

> 강수현은 진짜… 넷플릭스 비밀번호 공유는 하면서 양치컵 공유는 안 되는 이상한 여자야.

지훈, 거울 속 양치하는 수현을 보며 슬쩍 미소 짓는다. 수현도 거울을 통해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는다.

아침 햇살 아래, 티격태격하지만 어딘가 평화로운 욕실 풍경.

S#2. 같은 날, 거실 – 아침 (시간 경과)

수현과 지훈, 나란히 앉아 토스트를 먹고 있다.

여전히 수현은 살짝 삐친 듯 입을 삐죽 내밀고 있고, 지훈은 그런 수현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본다.

지훈 (E)

> 하지만 알고 있다. 수현의 이런 까칠함조차 사랑스럽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사소한 영역 다툼이 우리 관계에 소소한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주는 양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훈, 수현의 토스트 접시에 딸기잼을 듬뿍 발라준다. 수현, 못 이기는 척 토스트를 받아먹는다.

지훈 (E)

> 물론, 내일 아침 또 다른 생활 습관 문제로 욕실에서 고성이 오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두 사람, 말없이 토스트를 먹다가 동시에 눈이 마주치고는 피식 웃는다.

아침 햇살이 그들을 부드럽게 감싼다.

[FADE OUT]

EP 009. 라면 물 조절 장인 납시오

시간: 일요일 오후

장소: 지훈과 수현의 집 주방 겸 거실

(SCENE START)

INT. 주방 겸 거실 - 일요일 오후

햇살이 적당히 들어오는 거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 하나가 놓여 있다.

지훈, 야심 찬 표정으로 냄비 뚜껑을 연다.

수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냄비 안을 들여다본다. 이내 그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냄비 안에는 면발보다 국물이 훨씬 많아 보이는, 거의 '국'에 가까운 라면이 담겨 있다.

수현

> 와… 이게 뭐야?

지훈

>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 라면이지, 뭐야. 내가 특별히 너 생각해서 끓인 사랑의 라면.

수현, 믿을 수 없다는 듯 지훈을 쳐다본다. 표정이 점점 굳어간다.

수현

> 사랑의 라면? 이게 라면이냐, 한강물이냐? 너 혹시 라면 끓일 때 정수기 필터 고장 나서 물 폭탄이라도 맞았냐?

수현이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어본다. 힘없이 풀어지는 면발과 멀건 국물.

지훈

> 왜 그래? 물 좀 넉넉하게 넣었을 뿐인데. 국물 좋아하잖아, 너.

수현

> 국물을 좋아하긴 하는데, 이건 국물이 아니라 그냥 맹물에 라면 스프 살짝 푼 거잖아! 너 혹시 라면 레시피 '물 550ml'를 '물 5.5L'로 잘못 읽은 거 아니야? 아니면 눈 감고 물 부었냐?

지훈

> 아니거든! 나름 황금비율로 맞춘 거거든? 그리고 요즘 싱겁게 먹는 게 건강에 좋대. 싱겁게 먹으면 오래 산다더니, 너 혹시 나랑 같이 무병장수 프로젝트라도 하려고?

수현,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수현

> (비꼬듯)

> 무병장수? 네가 끓인 이 '건강 라면' 먹다가 내가 스트레스로 먼저 쓰러지겠다! 이건 라면에 대한 모독이야! 라면 장인들이 통곡할 맛이라고!

지훈

> 와, 너무하네. 먹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일단 한번 먹어봐.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잖아.

지훈이 젓가락으로 면을 한 움큼 집어 수현의 입가로 가져간다.

수현, 마지못해 한 입 먹어본다.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수현

> …이건… 라면이 아니라… 라면 향 첨가된 밀가루 풀인데? 너 혹시 미각을 잃었냐?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관대해진 거야?

지훈

> (당황하며)

>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냥 좀 삼삼한 거지. 여기에 김치랑 같이 먹으면 딱 좋아.

지훈, 애써 태연한 척하며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온다.

수현

> 김치가 만병통치약이냐? 이 라면은 김치 할아버지가 와도 못 살려! 너 그냥 앞으로 라면 끓이지 마. 이건 재능 낭비가 아니라 그냥 재능 부재야.

지훈

> (상처받은 표정으로)

> 너무하네, 진짜.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끓였는데. 너는 맨날 내 요리에 불만만 많아.

수현

> 불만? 이건 정당한 비판이거든? 그리고 네 요리 실력은… 솔직히 말해서 '라면 물 조절'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너 혹시 '요리 파괴왕' 뭐 그런 타이틀이라도 노리는 거야?

지훈, 수현의 팩트 폭격에 입을 꾹 다문다. 젓가락으로 멀건 국물만 휘적거린다.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수현도 조금 미안해졌는지 한숨을 내쉰다.

수현

> …알았어, 알았어. 너무 심하게 말했네.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잖아. 다음부터는 그냥 내가 끓일게.

지훈

> (삐친 듯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 됐어. 안 먹어.

수현

> (난감한 표정으로)

> 야, 장지훈. 삐졌냐? 라면 물 좀 많이 넣었다고 삐지기 있냐?

지훈

> (고개를 돌리며)

> …안 삐졌거든.

수현

> 삐졌네, 삐졌어. 목소리 톤부터 다른데?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래도 이건 진짜 너무 싱거워서… (잠시 생각하다) 차라리 여기에 밥 말아 먹으면 괜찮을지도?

지훈, 수현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슬쩍 수현을 쳐다본다.

지훈

> 밥…?

수현

> 응. 국물이 넉넉하니까 밥 말아 먹기에는 딱이네. 거의 라면 국밥 수준인데?

결국 두 사람, 어색하게나마 밥솥에서 밥을 퍼 와 싱거운 라면에 말아 먹기 시작한다.

지훈, 한 숟갈 떠먹어 보더니 의외라는 표정이다.

지훈

> (웅얼거리며)

> …음, 밥 마니까 좀 낫네.

수현

> (능글맞게 웃으며)

> 거봐. 내 말이 맞지?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야. 라면도 결국 밥이랑 먹어야 완성된다니까.

지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은 풀린 표정.

지훈

> 다음부터는 그냥 레시피대로 끓일게. 정량 계량컵 사서.

수현

> 오, 드디어 '라면 물 조절 장인'께서 항복 선언하시는 건가? 잘 생각했어. 안 그러면 우리 집은 맨날 한강물 라면 파티 열릴 뻔했네. (장난스럽게 웃는다)

지훈, 멋쩍게 웃는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하지만 이전보다는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라면 국밥'을 먹는다.

지훈 (NARRATION)

> 나의 요리 실력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수현이의 잔소리는, 때로는 쓰지만 결국 맛있는 결과를 위한 필수 양념이라는 것도.

두 사람, 서로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다음번 지훈이 끓일 라면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살짝 긴장하는 수현의 표정 위로.

(SCENE END)

EP 010. 알람 스누즈 지옥

시간: 월요일 아침 7시

장소: 지훈과 수현의 방 안

S#1. 지훈과 수현의 방 안 - 아침

어두컴컴한 방 안. 침대 두 개가 놓여 있다.

한쪽 침대에서 지훈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지훈의 핸드폰에서 요란한 알람 소리가 울린다.

SFX. 핸드폰 알람 소리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지훈, 미동도 없다.

옆 침대에서 자던 수현, 잔뜩 찌푸린 얼굴로 뒤척이다가 간신히 눈을 뜬다.

수현

> (잠꼬대처럼 중얼거린다)

> 으… 장지훈… 알람 좀 꺼…

하지만 지훈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알람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잠시 후, 알람이 스누즈 모드로 잠시 멈췄다가, 5분 뒤 다시 울린다.

SFX. 알람 소리 멈춤 (스누즈) … 잠시 후, 다시 알람 소리 (따르르르르릉!)

수현, 베개로 귀를 막아보지만 소용없다.

이 패턴이 한 번 더 반복된다. 알람이 울리고, 스누즈 되고, 다시 울린다.

SFX. 알람 소리 멈춤 (스누즈) … 잠시 후, 세 번째 알람 소리 (따르르르르릉!)

수현,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헝클어진 머리, 잔뜩 잠이 덜 깬 부은 얼굴로 지훈의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수현

> (고함을 지르며)

> 야! 장지훈! 너 진짜 안 일어날래?! 네 알람 소리에 내가 더 빨리 일어나겠다!

그제야 지훈, 부스스 눈을 뜬다. 멍한 표정으로 수현을 바라본다.

지훈

> (잠이 덜 깬 목소리로)

> …왜 그래, 아침부터. 무슨 일 있었어?

수현

> (기가 막힌다는 듯)

> 무슨 일? 네 알람 소리가 내 고막을 테러하고 있잖아! 지금 몇 번째 스누즈인지 알아? 네 폰 스누즈 버튼에 네 지문 닳아서 없어지겠다, 이 인간아!

수현, 지훈의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낚아채 화면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끈다.

순간 방 안에 평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수현의 분노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수현

> 아니, 알람을 맞췄으면 좀 바로 일어나든가! 왜 맨날 스누즈 지옥을 만드는 건데! 너 혹시 스누즈 버튼 누르는 게 아침 루틴이야? '굿모닝 스누즈' 뭐 이런 거냐고!

지훈

> (눈을 비비며)

>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5분만 더 자려고 했는데…

수현

> 5분? 네 ‘5분’은 거의 무한대에 수렴하는 거 몰라? 네 5분 때문에 내 아침잠 다 망쳤잖아! 오늘 아침 컨디션 완전 최악이라고!

지훈

> (웅얼거리며)

>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그냥 알람 소리 좀 더 들은 것뿐인데. 그리고 난 원래 아침잠이 많아서…

수현

> (팔짱을 끼고 쏘아붙이며)

> 아침잠? 그건 핑계고! 넌 그냥 게으른 거야! 그리고 네 알람 소리, 무슨 사이렌 소리 같아서 심장이 벌렁거린다고! 이러다 내가 노이로제 걸려서 병원 신세 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지훈, 침대에 걸터앉아 하품을 쩍 한다.

지훈

>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터는 바로 일어날게. 아니면 알람 소리를 좀 부드러운 걸로 바꿀까? 새소리나 물소리 같은 걸로.

수현

>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 새소리? 네가 새소리 알람으로 일어날 인간이었으면 진작에 일어났겠지! 넌 그냥 알람 자체를 못 듣는 척하는 거잖아! 아니면 혹시 귀에 솜이라도 박고 자냐?

지훈

> (억울하다는 듯)

> 아니거든! 듣긴 듣는데… 그게… 너무 졸려서 몸이 안 움직이는 걸 어떡해.

수현

> 몸이 안 움직여? 그럼 내가 움직이게 해줘? '강수현표 기상 서비스' 한번 받아볼래? 아주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줄 수 있는데.

수현, 주먹을 불끈 쥐며 험악한 표정을 짓는다.

지훈, 그 모습에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다시 파고들려 한다.

지훈

> 아, 됐거든! 나 이제 진짜 일어날 거야! 봐, 일어났잖아!

지훈, 마지못해 침대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쭉 켠다.

수현,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훈을 째려본다.

수현

> 두고 보자. 내일 아침에도 스누즈 지옥 펼쳐지면, 그땐 진짜 네 폰 압수다. 아니, 그냥 네 폰을 저 멀리 던져버릴 거야. 그럼 강제로라도 일찍 일어나겠지.

지훈

> (툴툴거리며)

> 치사하다, 진짜. 폰 없이 어떻게 살아. 그리고 내일은 진짜 바로 일어난다니까.

수현

>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 그 약속, 꼭 지켜라. 안 그러면 다음엔 알람 대신 내 잔소리 풀코스로 아침을 맞이하게 될 줄 알아. 그건 스누즈 기능도 없어.

지훈,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훈

> (속마음 N.)

> 아, 월요일 아침부터 제대로 걸렸네. 차라리 그냥 30분 일찍 일어나는 게 나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수현의 잔소리 폭격이 시작되면, 그 어떤 알람 소리보다 더 강력한 기상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수현

> (지훈을 보며 피식 웃는다)

> 뭐 해, 빨리 씻지 않고.

지훈, 멋쩍게 웃으며 욕실로 향한다.

수현,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며 작게 중얼거린다.

수현

> (혼잣말)

> 정말이지… 저 인간 때문에 못 살아. (피식) 그래도 뭐, 이게 우리 집 아침이지.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려 한다.

하지만 내일 아침, 지훈이 스누즈 버튼을 누르지 않을 확률은…

여전히 희박해 보인다.

FAD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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