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지독한 가벼움
원작: 이름 모를 한 철학도의 검사님께 보낸 서신 기반
등장인물:
철학자: 중년 남성. 깊은 고뇌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현재 도피 중. 그의 목소리는 이성과 감성,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검사: 철학자의 상상 또는 내면에 존재하는 인물. 날카롭고 심문하는 듯한 어조. 물리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제니아: 철학자의 과거 사랑. 순수하고 따뜻하며 지혜롭다. (회상/환영 속 인물. 짧은 대사 혹은 무언의 연기)
노금희 (제니): 탐욕스럽고 인공적인 인물. (회상/환영 속 인물. 짧은 대사 혹은 무언의 연기)
그림자들: 노금희 주변의 '텅 빈 영혼들'과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상징하는 군중. (무언의 역할, 주로 움직임과 실루엣으로 표현)
무대:
중앙에 낡은 의자 하나와 작은 테이블. 테이블 위에는 짐가방 하나와 구겨진 종이 몇 장이 놓여 있다. 무대 배경은 추상적이며, 조명과 프로젝션을 통해 시공간, 내면 상태, 회상 등을 표현한다. 한쪽에는 책 더미나 칠판 같은 학문을 상징하는 소품이 흐릿하게 보인다. 다른 한쪽에는 퇴폐적이거나 인공적인 느낌의 오브제들이 희미하게 놓여 있다.
(무대가 어둑하게 시작된다. 기차의 불규칙한 덜컹거림 소리, 혹은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바람 소리, 혹은 차갑고 불규칙한 전자음 같은 것이 배경에 깔린다. 철학자가 무대 중앙 의자에 앉아 짐가방과 테이블 위의 종이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고뇌가 드리워져 있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날카롭고 차가운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꽂힌다. 검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검사 (목소리): 소환장을 받았다면 응하는 것이 법이다. 알면서도 불응했지. 이유를 대라. 이 도피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법치주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자, 사법 절차에 대한 오만한 무시라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철학자: (고개를 숙인다. 목소리에 진심 어린 유감과 사죄가 섞여 있다.) 존경하는 검사님… 저의 불찰입니다. 깊고 진솔한 유감과…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의 침묵과 부재가… 검사님의 엄정한 권위에 대한 오만한 도전으로 비춰졌을까… 염려되는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검사: 염려만 한다고 해결되나? 왜 오지 않았지? 변명은 사양한다. 당신의 고뇌나 내면의 격랑 따위는 법정에서 통하지 않아.
철학자: (잠시 침묵한다. 고개를 들어 허공 어딘가, 검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곳을 응시한다.) 제가 평생토록 경계하고 혐오해 마지않는… '권력'이라는 허울 좋은 환상에… 잠시라도 취해… 검사님을 가벼이 여기거나 기만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 스스로에게 부여한… 가장 기본적인 경계였습니다. 저의 고뇌 어린 결단 뒤에는… 제 삶의 모든 국면을 예기치 않게 뒤틀어 온… 우연과 필연의 실타래… 그 불가해한 운명의 장난 속에서 파생된… 깊은 혼돈과 내면의 격랑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검사: 운명론자 행세는 그만둬. 범죄자가 즐겨 쓰는 수법이지. 당신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져야 한다. 당신의 '혼돈' 때문에 수사가 방해받고 있어.
철학자: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려… 속수무책으로 떠도는… 한낱 낙엽처럼… 저는 그저… 잠시 숨을 고르고… 흩어진 생각의 편린들을 그러모아… 모든 것을… 온전히 정리할 시간이… 절실했을 뿐입니다. 마치… 산산조각 난 거울의 파편들을… 다시 맞춰보려는 노력처럼 말입니다. 법의 신성한 경계를 넘어서려는 불순한 의도는… 단 한 순간도 품지 않았습니다.
검사: 말뿐인가. 행동으로 보여야지. 언제 나타날 건가?
철학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그 적절한 시기가 도래하면… 반드시… 스스로 검사님 앞에 나아가… 저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겠다는 약속을… 이 자리에… 이 서신에… 담아… 보내드립니다. 부디… 이 서신 자체를… 저의 확고한 결의와… 검사님께 드리는 진심 어린 약속의 증표로… 너그러이… 받아주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철학자는 잠시 숨을 고른다. 무대 배경 조명이 은은하게 바뀌며, 유럽 어딘가의 풍경을 암시한다. 기차 덜컹거림 소리가 커진다.)
철학자: 지금 이 순간… 저는 여러 차례… 기차의 덜컹거림에 몸을 맡기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국경들을 넘나들며… 오랜 시간 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메아리치던… 갈망의 종착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곳은… (먼 곳을 응시한다) 다름 아닌… 검사님의 수사 기록에도 어렴풋이 명시되어 있듯… 제가 한때 젊음의 열정과 함께… 철학의 심오한 세계에 몰두했던… 독일 중서부의… 유서 깊은 대학 도시입니다.
(무대 한쪽에 푸른 조명과 함께 고딕 첨탑, 낡은 서점 등의 형상이 흐릿하게 투영된다.)
철학자: 푸른 벨벳처럼… 부드럽게 펼쳐진 언덕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고딕 양식의 첨탑들… 그리고 밤이면 더욱 깊고 영롱하게 빛나는… 무수한 별들의 침묵 아래… 저는… (목소리에 회상이 묻어난다) 젊음의 치기와 순수함… 지적 열정… 때로는 광기에 가까운 사유를… 남김없이 불태웠습니다. 칸트의 순수 이성… 쇼펜하우어의 의지… 니체의 영원회귀… 그 거대한 사유의 산맥을 오르내리며… 저는 진리를 찾으려 몸부림쳤습니다.
(조명이 낡은 서점 창가 형상에 머무른다. 젊은 철학자의 모습(혹은 그림자)이 책을 읽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철학자: 지금도 그 도시의 오래된 돌길을 따라 걷노라면… 낡은 서점 창가에 기대어… 니체의 날카로운 문장들을… 경이와 불안 속에서 곱씹던… 과거의 제 모습이… 희미한 환영처럼 아른거릴 것만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손에 쥘 수 있으리라 믿었던… 순진한 이상주의자였습니다. 그 순수함은… 지금의 저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검사: 과거 회상은 법정에서 도움이 되지 않아. 현재 당신의 행적에 대해 말해. 수사 기록에 따르면… 당신은 독일을 지나 더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폴란드… 그리고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철학자: (다시 표정이 어두워진다. 기차 소리가 거칠어지고, 배경 조명이 붉거나 회색빛으로 변하며 긴장감을 더한다.) 네… 검사님께서 이 이야기를 접하실 무렵… 저는 아마도… 폴란드의 구불구불 이어지는 전원 풍경 속을 지나… 역사의 상흔이 아로새겨진… 우크라이나 국경을 향해… 차를 몰고 있을 것입니다. 혹은 이미 그 경계선 앞에 당도하여… 전쟁의 포연(砲煙)과 함께… 동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하고도 비릿한 바람의 냄새를… 폐부 깊숙이…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검사: 전쟁 지역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살 시도인가? 아니면 도피를 위한 위장인가? 그 위험천만한 땅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철학자: 전쟁의 참혹한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그 비극의 땅에서… 저와 같은 이방인에게… 국경의 문이 순순히 열릴지의 여부는… 저 역시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운명의 여신이 저에게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오직 시간이 말해줄 뿐이겠지요. 하지만… 이유를 묻는다면…
(조명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깔로 바뀐다. 무대 한쪽에 제니아의 형상이 나타난다. 고단함 속에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우크라이나 민요 같은 배경음악이 아주 작게 깔린다.)
철학자: (목소리에 애틋함이 가득하다) 제 삶의 가장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한 여인의 이름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제니아.
검사: 제니아? 수사 기록에 이름만 잠시 언급된 인물인가. 관계는?
철학자: 그녀는… 마치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대지에 내리는 새벽 하늘처럼… 더없이 맑고 깊은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제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고백은… 그녀가 제게 주었던 감정의 깊이와 넓이를 담아내기에는… 너무도 초라하고 불완전한 표현일 뿐입니다. 그녀와 함께했던… 불과 3개월 남짓한 시간은… 제 인생 전체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황금기로 각인되어 있으며… 지금 이 순간 돌이켜 보아도… 그 시간만큼은… 한 치의 어둠도 허락되지 않은… 완벽한 행복의 결정체였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제니아가 고단한 아르바이트를 상징하는 듯한 단순한 동작을 반복한다. 창가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
철학자: 코발트빛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햇살을 머금은 듯한 금발… 슬라브 민족 특유의 도드라진 광대뼈… 그녀는… 독일에서 만났던 여느 우크라이나 여인들처럼… 멀리 두고 온 고향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고단하고 척박한 삶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세 개의 고된 아르바이트로 채워진 하루…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밤… 단칸방 작은 창가… 고향의 애수 어린 민요… 다가올 내일을 위한 기도…
검사: 동정심에 기댄 감상인가. 당신은 철학자 이전에… 연민에 취하는 인간일 뿐이군.
철학자: (단호하게) 아닙니다! 그녀는 동정을 받는 것을 극도로 불편해했습니다. 혹독한 삶의 무게 속에서도… 영혼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죠. 마치… 혹한의 폭풍우 속… 길 잃은 자들의 북극성처럼… 그녀의 내면은… 투명하고 영롱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을… 타인에게 돌려주는 행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니아: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은 나누면 두 배로 커진대요.
철학자: (제니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듯하다. 조명이 제니아에게서 서서히 멀어진다.) 그녀가 들려준… 이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철학은… 당시 복잡하고 현란한 형이상학 이론의 밀림 속을 헤매던… 저에게… 마치… 섬광과도 같은 충격과 깨달음을 안겨주었습니다. 밤새도록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하이데거의 존재론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저에게… 고단한 노동과 소박한 일상 속에서 길어 올린… 그녀의 삶의 지혜는… 어둡고 방대한 철학 도서관 전체를… 환히 밝히는… 단 한 자루의 촛불과도 같았습니다.
검사: 충분하다. 감성팔이는 여기서 끝내지. 그 여인은 당신이 연루된 범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명확히 해라.
철학자: (고개를 끄덕이며) 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는… 검사님께서 면밀히 조사하고 계시는 이 복잡한 사건과는… 티끌만큼의 연관도 없습니다. 또한… 제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 지극히 사적인 감정의 편린들을… 타인 앞에…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은… 저에게 있어… 마치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꿈을… 백주대낮의 환한 빛 아래… 발가벗겨 내보이는 것처럼… 크나큰 수치심과… 망설임을 동반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드리는 것은… 제 여정의 이유가… 바로 그녀이기 때문입니다.
검사: 여전히 살아있다고 확신하나?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을 수도 있지.
철학자: (목소리에 먹먹함이 실린다) 우크라이나에 전쟁이라는 비극이 발발한 이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백방으로 그녀의 안위를 수소문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그녀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먹먹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제가 천신만고 끝에… 우크라이나 땅을 밟는다 하더라도… 그 혼돈 속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확률은… 짙은 안개가 자욱한 밤바다 위에서… 길 잃은 별 하나를 찾아 헤매는 것만큼이나… 희박하다는 것을… 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검사: 알고도 가는군.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이끌리는 건가?
철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그곳으로 이끄는 것은… 어쩌면…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고장 난 나침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동양의 오래된 전설이 속삭이듯…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는… '운명의 붉은 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젠가는 우리 두 사람을 다시 연결해주리라는… 어리석고도… 맹목적인… 믿음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깊은 충동입니다.
(무대 분위기가 갑자기 차갑고 어두워진다. 조명이 날카롭게 바뀌고, 퇴폐적이거나 인공적인 분위기의 배경이 나타난다. 기차 소리가 멈추고, 도시의 소음이나 낮은 기계음 같은 것이 들린다.)
철학자: 이제… 검사님께서 진정으로… 그 속내를 궁금해하실… 본론으로…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제 삶의 또 다른… 어두운 축을 이루었던 여인… 세간에 '제니'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노금희에 관한 이야기 말입니다. 노정아… 노애린… 노정심… 마치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이름을 바꾸며… 자신의 과거를 세탁했던… 바로 그 여인과… 철학을 탐구하는 학자인 제가…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기이한 관계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파국적이고 복잡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는지에 관한… 진실일 테지요.
검사: 그 여인에 대한 증언은 이미 차고 넘친다. 언론은 그녀를 괴물로 묘사하고 있지.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철학자: 연일 언론과 방송… 그리고 익명의 가면 뒤에 숨은 SNS 공간에서…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이야기들… 그 안에는… 한 줌의 사실과 거대한 거짓… 악의적인 상상과 무책임한 추측이… 혼탁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녀에 관한 대중의 일반적인 인식… 즉 그녀가 '정상적이지 않은', '기이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대체로 사실에 부합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된 과정 또한…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우연에 기댄… 어쩌면… 필연적인 만남이었습니다.
(무대 중앙 조명이 서울 강남의 화려하지만 어딘가 공허한 밤 분위기를 표현한다. 철학자는 지친 표정으로 그 공간에 들어서는 모습을 연기한다.)
철학자: 독일에서의 길었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저는 서울 시내 한 사립대학에서… 시간강사라는 불안정한 신분으로… 철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 철학의 심원한 정신적 바다… 서양 철학의 거대한 산맥… 그 모든 것이 저의 내면세계를 채우는 듯 보였지만… 현실은… (자조적인 미소) 불안정했고…
검사: 당신의 학문적 배경이나 내면 상태는 중요하지 않아. 노금희와의 만남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
철학자: 저의 삶은… 유년 시절부터… 짙고 깊은 우울의 그림자에… 잠식당해 있었습니다. 너무도 이른 어머니의 죽음… 알코올에 의존한 아버지의 만성적인 중독… 끝없는 이사와 불안정한 가정환경… 제 여린 영혼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이십 대… 삼십 대… 지금껏… 그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은 채… 때때로 저를 절망의 나락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정신과 상담과 약물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고통은… 제 몸에 들러붙은 검은 그림자처럼… 늘 저를 괴롭혔습니다.
검사: 그래서 법, 도덕, 양심 같은 외적인 통제에 무감각해졌다는 건가? 당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인가?
철학자: 정당화가 아닙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내면을 잠식하는 고통의 무게가… 너무나 거대하고 압도적이었습니다. 다른 외적인 가치들에 신경 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저의 학문적 스승이자… 한때 법무부 장관까지 역임했던 유력 인사의… 예기치 않은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강남의 화려하고 은밀한 불빛… 최고급 술집… 소위 '텐프로'라 불리는 곳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무대 한쪽에 노금희(제니)가 등장한다. 화려하지만 인공적이고 '텅 빈' 느낌이 강하다. 주변에는 그림자들(텐프로의 손님, 관계자 등)이 기생충처럼 맴도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철학자: 바로 그곳에서… '제니'라는 화려한 예명으로… 밤의 세계를 유영하던… 노금희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저의 첫인상… 한 단어… '텅 빔(emptiness)'.
검사: 텅 빔? 구체적으로 설명해봐.
철학자: '비어있다'는 감각이야말로… 그녀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눈부시게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듯 보였지만… 그 껍질 아래로… 어둡고 심연 같은 공허함…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기운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더없이 세련되고 예의 바른 태도… 하지만 모든 계산된 몸짓과 미소 뒤에는… 권력과 부를 향한… 노골적이고 탐욕스러운 갈망이… 숨김없이 느껴졌습니다. 완벽하게 조각된 듯한 외모…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부조화… 마치 너무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섬뜩한 이질감이 감돌았습니다.
검사: 탐욕. 그것이 그녀의 본질인가. 당신은 왜 그런 인물에게 매력을 느꼈지? 아니, 관계를 지속했지?
철학자: (잠시 침묵. 괴로운 표정) 그 무엇보다도 저의 지적 호기심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것은… 그녀가 발산하는… 경이로울 정도의 '탐욕'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물질적 욕망을 훨씬 뛰어넘어… 마치 우주의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에너지와 가치… 심지어 타인의 영혼까지도… 남김없이 빨아들여 소멸시키려는 듯한… 강렬하고 파괴적인 힘이었습니다.
검사: '가족 전체를 관통하는 특성'이라고 수사 기록에 쓰여 있던데. 당신의 생각인가?
철학자: 훗날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이러한 병적인 탐욕은… 비단 그녀 개인의 특수한 성향이 아니라… 그녀의 가문 전체를 대대로 관통하며 지배해 온… 뿌리 깊은 특성이었습니다. 마치 유전자에 저주처럼 각인된 숙명과도 같이… 노씨 일가는 세대를 거듭하며… 권력과 부를 향한… 비정상적이고 끝없는 갈망을… 숙명처럼 품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저는… 그 일종의… '존재론적인 결핍'을… 그녀에게서 보았습니다.
검사: 다시 묻는다. 당신은 그녀를 사랑했나?
철학자: (단호하게, 목소리에 아픔이 스친다) 단 한순간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 없습니다. 제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진정한 사랑은… 이미 오래전 우크라이나의 새벽 하늘 아래… 제니아에게 모두 바쳐졌고… 그 이후로… 제 가슴은… 마치 신도들이 떠나버린… 폐허가 된 성당처럼… 적막하고… 텅 빈 상태로 남아있었습니다.
검사: 그렇다면 왜? 왜 그 기이한 관계를 유지했지? 당신의 지적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텐데.
철학자: (솔직하게 고백하듯) 제가 노금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렸던 주된 이유는… 철학자로서의 주체할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이 맞습니다. 저 자신과는 정반대의 스펙트럼… 극단적인 피상성과 물질주의의 끝에 서 있는… 존재에 대한 매혹과 탐구심… 마치 가장 밝은 빛이 가장 깊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듯… 그녀가 지닌 그 극단적인 공허함과 탐욕은… 제게 기이하고 도착적인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작아진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깊은 우울과 고독 속에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성적 욕구의 해소… 역시… 그 위태로운 관계를 지속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어쩌면… 육체적인 친밀함 속에서만큼은… 우리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그 본질적인 공허함이… 아주 잠시나마 망각되고… 일시적으로 채워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대 배경이 노금희의 펜트하우스나 사교계 모습을 암시한다. 화려하지만 차갑고 공허한 분위기. 철학자는 관찰자처럼 서서 노금희와 그림자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철학자: 저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강남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자리한… 그녀의 펜트하우스를 방문했고… 육체적인 교감을 나누는 동시에… 마치 인류학자가 미지의 이국적인 부족 공동체를 관찰하듯… 냉정한 시선으로… 그녀의 일상과 주변 세계를…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했습니다. 거대한 드레스룸… 온통 최신 명품 의류와 보석… 값비싼 액세서리…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으며… 자신을 치장하고 과시하는 모습… 고급 레스토랑… 회원제 클럽… 프라이빗 파티… 사치와 향락… 허영과 과시욕…
검사: 그리고 당신의 수사 기록에도 있는 그 '텅 빈 영혼들'.
철학자: 네… 그녀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녀와 비슷한 부류의 '텅 빈 영혼들'이… 파리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권력 지향적인 정치 검사들… 신념 없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철새 정치인들… 교묘한 수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기꾼 기질의 사업가들… 심지어 과거가 의심스러운 조직폭력배 출신의 기업가들까지… 실로 다양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욕망을 부추기고 기생하며… 위선과 탐욕으로 얼룩진… 그들만의 리그를… 공고히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인간적인 유대감이나 진심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거래와… 계산만이 있었습니다.
검사: 그 관계를 유지시킨 또 다른 매개체는? 마약이었다고 진술했군.
철학자: (목소리에 자조적인 씁쓸함이 묻어난다) 놀랍게도… 그토록 이질적인 우리 두 사람을… 기묘하게 엮어주고… 그 관계를 유지시켜 준 매개체는… 바로 '마리화나'였습니다. 저는 독일 유학 시절부터… 극심한 우울증 증세를 완화하고…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잠시나마 도피하기 위해… 마리화나에 의존해왔고… 그녀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마리화나를 상습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검사: 그 '공동의 비밀'이 당신들을 묶어놓았다는 말인가. 범죄를 공유함으로써?
철학자: 네…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약물을 사용한다는… '공동의 비밀'은… 우리 사이에… 기묘하고 은밀한 유대감을 형성했습니다. 그 위태로운 유대감은… 다른 어떤 형태의 친밀함보다도 강력하게… 우리를 묶어주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금지된 행위를 공유함으로써 느끼는… 일종의… 도착적인 연대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공범 의식 같은 것이었죠.
검사: 그 공범 관계가 논문 대필로 이어졌군. 당신은 그녀의 학위 논문을 써줬나?
철학자: (고개를 떨군다) 그렇게 우리의 기형적인 관계는… 섹스와 마약이라는… 불안정한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위태롭게 회전했고… 그 과정에서 제가 그녀의 석사 및 박사 학위 논문 작성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혹은… 필연적인 수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녀의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들의… 거의 대부분은… 사실상 제가… 여러 저명한 학술 저작과 논문들에서… 문장과 아이디어를 교묘하게 발췌하여… 짜깁기하고… 윤색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철학적인 깊이나 독창적인 사유는… 전무했습니다. 오직… 표면적인 그럴듯함만이… 존재했습니다.
검사: 대학 사회의 부패까지 언급했는데. 당신은 그 과정에 연루된 건가?
철학자: 그녀가 대학의 조교수직에 임용되는 과정에서도… 저의 알량한 학문적 배경과 인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만… 결정적인 요인—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교수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게 된 진짜 이유—은… 아마도… 대학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은밀하게 제공된… 거액의 뇌물과…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성적인 상납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 추악한 거래가… 그녀의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검사: 그래서 당신은… 그 부패한 시스템 속에서… 진리를 가르쳤다는 말인가. 자기모순 아닌가?
철학자: (괴로운 표정) 그렇습니다… 검사님의 예리한 직감이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 바와 같이…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학 사회는… 그 근간부터… 심각하게 부패하고… 병들어 있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학생들 앞에서… 진리와 정의를 역설하면서도… 정작 그 배후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현실을 목도하며… 깊은 환멸과 자기혐오에 시달렸습니다. 한때… 진리를 탐구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상아탑이… 이제는 노골적인 권력 다툼과 금전 거래가 난무하는… 추악한 놀이터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척박하고 오염된 환경 속에서… 저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밀란 쿤데라가 통찰했던 것처럼…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채… 견딜 수 없이 가볍고… 공허한 존재가 되어…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대 배경이 다시 바뀌며, 화려하지만 기괴한 결혼식 풍경을 암시한다. 노금희와 그녀의 남편(검사복 그림자)이 서 있다. 이후 노금희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조명이나 프로젝션을 통해 얼굴이 점점 비인간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표현한다.)
철학자: 노금희와의 기이한… 동거 아닌 동거 관계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그녀가… 검사님의 동기이자…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 전형적인 출세 지향적 인물의 표본과도 같은… 현직 검사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면서부터였습니다. 탐욕스러운 영혼이… 마침내… 강력한 '권력'이라는 날개까지 달게 되자… 그녀의 끝없는 욕망은… 더욱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 행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 뻔뻔스러워졌습니다.
검사: 그때부터 본격적인 범죄 행각을 시작했군. 수사 기록에만 17가지 사기 혐의가 있다.
철학자: 네…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굶주렸던 야수처럼…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17가지에 달하는… 파렴치한 사기 행각들… 남을 속이고… 착취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일에… 그녀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검사: 그리고 당신은 그 과정을 지켜봤나?
철학자:…네. 그리고 바로 이 시점부터… 그녀의 얼굴은… 더욱 급격하고 기괴하게… 성형 수술의 결과물로 변모해갔습니다. 마치 중독된 사람처럼… 한 달이 멀다 하고… 새로운 성형외과를 찾아다니며…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자신의 원래 얼굴을 지워나갔습니다. 그것은 마치… 과거의 자신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직 탐욕과 허영으로만 이루어진… 새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보였습니다.
(노금희의 형상이 완전히 인공적이고 끔찍하게 변모한 상태로 고정된다.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플라스틱 마스크 같은 모습.)
철학자: 그 결과물은… 현대 의학 기술의 경이로운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술적으로는 완벽했지만… 동시에…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철저히 비인간적이었습니다. 그녀의 매끈하고 부자연스러운 얼굴에서는… 더 이상…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인간적인 감정의 미세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차갑고 계산된 표정과… 인공적인 미소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검사: 그래서 그녀는 '투명 인간'이 되었다는 건가.
철학자: 그렇습니다. 세간에 '제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노금희는… 사실상 거의 '투명 인간'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내면은… 완전히 텅 비어버렸고… 그 빈자리를 오직… 끝없는 탐욕과 뒤틀린 욕망만이… 가득 채우고 있으며… 그녀의 외면은… 그러한 내면을 반영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병든 아이콘… 혹은… 괴물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했습니다.
검사: 당신의 고통과 번뇌를 그녀에게 투영했다는 말인가.
철학자:…오히려 그녀는… 제가 평생에 걸쳐 느껴왔던… 삶의 근원적인 고통과 번뇌… 존재론적 공허함을… 생생하게 형상화하여… 제 눈앞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상징… 혹은… 거울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치 니체가 경고했던 것처럼…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라는… 그 섬뜩한 예언처럼… 저는… 그녀라는 심연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결국… 제 자신의… 가장 어둡고 추악한 단면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탐욕은 제 자신의 공허함을… 그녀의 비인간성은 제 자신의 상실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무대 분위기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기차 덜컹거림 소리가 다시 들리고, 역에 가까워지는 소음이나 안내 방송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린다. 철학자가 짐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철학자: 존경하는 검사님. 이제 저는… 저의 여정의 다음 목적지인… 오래된 기차역 플랫폼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유럽 대륙의 유서 깊은 역사가 늘 그러하듯… 이 기차역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애틋한 이별과 감격적인 만남… 덧없는 희망과 깊은 절망의 순간들을… 말없이 품고… 묵묵히 서 있을 것입니다.
검사: 이 여정의 끝이 어디인가. 법의 심판대인가? 아니면… 당신이 찾고 있는… 그 여인과의 만남인가?
철학자: 이제 저 역시… 그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한 점으로 합류하여… 저에게 주어진 미지의 운명을 향해… 또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합니다. 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든…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피하지 않겠습니다.
검사: 법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당신의 '적절한 시기'는 언젠가 찾아올 것이다. 강제로라도.
철학자: 압니다… 언젠가… 저의 이 길고… 방황과도 같은 여정이 모두 끝나고… 모든 진실이 제 모습을 드러낼 그 특별한 날… 검사님 앞에… 다시금… 당당히 서게 될 그날을… (목소리에 결연함이 실린다)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이 여정 속에서… 저는 저에게 주어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철학자는 짐가방을 들고 무대 한쪽 출구로 향한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검사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철학자: (어둠 속으로 걸어가며 마지막으로) 부디… 검사님의 건승과… 정의의 실현을 기원하며… 미약하나마… 깊은 감사의 마음을 함께 전합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 기차 덜컹거리는 소리, 혹은 차갑고 비릿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잠시 남다가 사라진다.)
(암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