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서

by 남모


모든 사랑에는 각서가 필요하다. 오랜 철학의 산물이 난무하는 곳, 화장실 문짝에 누군가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필시 마음의 변덕을 무던히 겪어본 사람일 것이다. 그는 어떤 무모한 사랑에 지쳐버린 것일까. 하루를 온전히 어떤 당신 생각에 소진하는,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바쁜, 실핏줄 하나에까지 휘도는 그리움으로 온몸이 저릿한, 누군들 그런 사랑 하고 싶지 않았으랴. 온갖 맹세가 깨져나가고 사랑만 가지고는 사랑할 수 없는 시대, 각서가 그 숱한 쓸쓸함을 방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그 밑에 뭐라도 적고 싶었다. 모두가 말하는 사랑, 어쩌면 그것은 이 세상에 너무 많이 발음되어 순정이 휘발한 것은 아닐까. 과연 사랑만 가지고는 사랑할 수 없을까. 실례지만 나는 각서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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