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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모 Sep 22. 2024

글짓기와 글쓰기



컴퓨터의 오래된 자료들을 정리하던 중 어떤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는 나는 잠시 눈이 반짝였다. 설레는 연애편지라면 더 좋았겠지만 조금은 어려운 상대에게 최대한 불편하지 않도록 애쓰는 마음이 엿보여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편지. 딸아이 학교 선생님과의 석연치 않은 에피소드를 간직하고 있는 문장들을 바라보며 슬며시 쓴웃음이 났다.


그 시절의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감정이 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며 더욱 그랬다. 그때의 나는 당연히 지금보다 젊었으며 혈기가 넘쳤고 어떤 고집들이 있었겠지만, 아이의 선생님에게는 무엇이 또 그리 서운했을까 싶기도 하고 조금 더 유연하지 못했던 대처법에 일말의 무안한 마음도 든다. 반대로 잘했다 싶기도 한, 이제는 정말 오래된 이야기다.


어느 날 학교에 독서기록장을 써갔던 딸아이가 담임선생님께 글을 조금 더 어렵게 쓰라는 꾸중을 들었다며 일기를 쓰면서도 자꾸만 어려운 낱말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모습에 아이가 혼난 속뜻이 정말 궁금했다. 당장 그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아이를 염려하는 학부모의 심정적 페널티 때문에 한동안 망설였던 생각도 난다. 통화를 결심한 것은 시간이 십여 일이나 더 지난 후였다.


선생님과의 통신선 너머 어색한 소개와 밋밋한 예의를 갖추고 물었던 안부 끝에 들을 수 있던 말은 -그러니까 꾸중의 핵심은- 쉬운 단어와 문장만으로는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기 어렵고 교육적으로도 좋지 않으니 한자어처럼 조금씩 어려운 말도 쓰고 고학년으로 갈수록 점차 고급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깔끔하지 못한 통화를 마치면서 '왜?'라는 의문부호가 머릿속을 헤엄쳐 다닌다. 잠시 경직된 학교 교육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지만 내가 그동안 아이에게 말하던 글쓰기의 기둥 같은 것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 같아 다시 몇 번을 더 망설이다 편지를 쓰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쌀쌀해지는 날씨에 건강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독서기록장을 비롯한 글쓰기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가지고 계신 교육관을 아이들에게 바로 펼치는 일은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이 가지고 계시는 가장 큰 희망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이가 고학년으로 성장해 갈수록 어려운 단어를 조합하고 고급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씀에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바가 있어 편지를 드립니다.


어렵고 고급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말과 글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신의 주장을 논리 있고 힘 있게 펼칠 수 있다는 말씀은 몇 번을 고쳐 생각해 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송하지만 우리 글에 따로 고급언어가 있다는 말씀도 생경하고 말입니다. 물론 불가피하게 사용해야 할 한자어도 적지 않고 일정 부분 선생님 말씀처럼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여러 해 동안 체득하신 선생님의 경험과 교육철학을 경솔한 마음으로 깎아내리려는 마음은 결코 아니니 부디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오덕 선생을 기억합니다.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허위와 시늉이 담긴 글짓기 대신에 아이들이 자기 삶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쓸 수 있는 글쓰기를 위해 살다 가신 분이지요. 이오덕 선생은 어린이들이 쓰는 말과 글이 곧 훌륭한 문학이라고 했는데 거기에 한자어와 고급언어가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른이나 다른 어린이가 상 받은 글을 흉내 내거나 글의 형식을 위해 겉모습을 꾸미는 글이 아닌, 자신의 삶과 생각을 솔직하고 자세히 쓰는 과정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자기 생각을 힘 있게 전달하는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성의 가치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글짓기'를 버리고 '글쓰기'를 가르치는 참뜻이라는 것이 저의 짧은 소견입니다. 우리말과 글에 대한 고집만큼은 제 아이가 저를 닮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조금 길어졌습니다만 선생님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풍성한 경험 위에 제 의견이 조금 더 그럴듯한 모습으로 더해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편지드립니다. 항상 좋은 가르침을 위해 애쓰시는 노고에 감사드리며, 선생님의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편지를 아이 편에 들려 선생님께 보낸 건 그로부터 다시 십여 일 뒤였다. 여러모로 나름 고민했으리라. 혹시나 하여 다시 읽어보는 편지에는 완곡을 넘어선 상대적 약자의 모습이 눈에 자꾸 거슬린다. 담임선생님이 통화에서 내게 들려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너무도 완고해서 마치 오른손으로만 밥을 먹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고집 센 아버지나 모던타임스에서 찰리 채플린을 압박하던 사장님의 확성기 같았고, 나는 초원에서 표범에게 쫓기는 한 마리의 가젤 같았다.


그날, 전화기 저편으로부터 미묘하게 전해져 오던 선생님의 불쾌한 기분을 내가 못 느꼈을 리 없다. 어쩌면 학부모가 묻는 질문 중심으로 간단히 대답을 해주는 와중에 오해가 얹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편지는 선생님이 꼭 다시 한번쯤 생각해 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절반이었다. 물론 나머지 절반은 알량하고 혈기 넘치는 내 고집의 산물이었지만, 아무튼. 


답장은 오지 않았다. 

혹여라도 그때의 선생님과 나는 서로에게 상처로 남았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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