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게 나'라고 알고 있던 내 정체성을 잃게 될 두려움
육아휴직을 쓰기 전, 나는 자신을 사내 에디터라고 소개하는 사람이었다. 7년간 만 번도 넘게 퇴사 생각을 했지만, 적어도 일이 적성에 안맞아 그만두고 싶진 않았던 직업. 만족도를 학점으로 주자면 B+ 정도 되는 직업이었다.
에디터의 일에서 가장 좋아했던 일은 개인 인터뷰였다. 그룹 홍보실에선 매달 한 두명의 직원을 연결해주었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해 인터뷰 기사를 썼다. 개인적인 인맥으론 절대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충동적으로 퇴사하는 친구에겐 박수를 치고, 부자되는 방법이 세상의 화두인 와중에 사사로운 관계 이야길 즐기는 내 주변엔 곧 나같은 사람들만 가득했으니까. 그러니 종종 인터뷰를 위한 질문인척 개인적인 궁금증을 묻기도 했다. 상대방도 내 질문이 진심이 담긴 호응이란 걸 알아채고 더 흥겹게 뽐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나는 답변이 나오는 댸는 ‘성공 경험’을 묻는 질문을 할 때였다.
"최근 가장 성취감을 느꼈던 때는 언제예요?
성공경험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나는 4개월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도는 동안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오랫동안 나를 잡아두던 생각이었다. 고민해도 결론이 잘 안나서 미간에 힘을 주어야 했던 생각이었으며 자려고 누우면 그 생각이 나 휴대폰을 다시 잡아들게 했다.
뒤집기를 시작해 자주 머리를 바닥에 꽝 박고 우는 아기를 위해 폴더 매트를 살까 시공 매트를 할까 하는 고민이었다. 폴더 매트는 가격이 만만하고 청소가 간편했지만 어쩐지 지저분해보였다. 시공매트는 가격은 폴더매트의 3배 일지언정 딱 보기에 고급스러웠다. 이 선택의 갈림길에 선지도 벌써 몇 일. 정말 후회없이 결론내고 싶었다.
10월은 날이 선선하고 하늘은 예뻤다. 유모차를 끌고 개울 다리를 건너는 동안 햇빛이 반사되어 물빛이 반짝였다. '참 좋다아- 그치' 하고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시공매트를 검색했다. 몇 번이나 보았던 시공매트 리뷰를 또 한 번 찾아봤다. 며칠 나의 최대 목표는 이 쇼핑에 성공하는 거였다.
이런 내가 최근에 이룬 성취는 이런 것들이었다. 집앞 마트에서 보내주는 3천원 할인쿠폰을 요긴하게 사용해서 장을 본 일. '25만원짜리 콧물흡입기를 사느냐 마느냐' 고민하다가 결국 결제하곤 기대 이상의 성능에 만족한 일. 당근마켓에 '장난감 일괄' 키워드를 알림 설정해두었다가 아기가 가지고 놀 장난감을 한 꺼번에 산 일 같은 거 말이다.
특히 마지막 '장난감 일괄'은 정말 획기적이었다. 새것을 사려 했다면 하나하나 고르느라 에너지를 낭비했을텐데, 우리 아기 연령의 장난감을 에너지 낭비없이 아주 저렴하게 샀기 때문인데…….
아기를 낳기 전, 내가 가장 두려워한 순간도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나라는 사람을 잃고 엄마와 주부로 사는 일. 심지어 그저 '물건 사는 것'에만 삶의 보람을 느끼는, 쇼핑중독자의 모습으로 살게 된 바로 이 순간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나의 정체성을 잃었단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쇼핑중독자가 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에 맞는 육아용품을 '잘' 사는 일은 엄마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건 나의 몸을 지키는 일이자, 아기에게 편안함과 쾌적함을 선물하는, 아주 가치있는 일이었으니. 그러니 나는 아기를 낳고 바뀐 이런 저런 변화들을 긍정하기에 바빴다. 아기 엄마가 되어 드라마를 보게 된 점, 늘 바쁘게만 살았는데 자주 심심해진 점. 같은 거. 이전엔 나였던 것들이 이젠 내가 아니게 되었는데도,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육아로 이상해진 나까지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나보다.
아기의 탄생은 실로 그 힘이 엄청나서, 감성있게 꾸며놓은 신혼집을 어린이집으로 바꾸어놓더니 이젠 남편과 나의 생활패턴까지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나를 쇼핑중독자로 만들곤, 내가 성취감을 느끼는 방식까지 바꾸려 한다. 임신한 엄마의 몸과 뱃속 아기는 몸에 들어온 영양분을 두고 늘 경쟁한다고 한다. ‘나’가 중요하다는 MZ세대 엄마는 세상 바깥으로 나온 아기와 경쟁이 필요한가 보다. 너무 사랑스럽고 귀해서, 그래서 더 힘이 센 아기로부터 엄마는 '나'를 지켜야 한다.
늘 유모차에 등을 기대고 누워있던 아기는 6개월이 지나자 허리를 바짝 세우고 앉아있었다. 허리를 바짝 세우고 안전바를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기는 자신감이 가득차 보였다. 이제 아기는 제 힘으로 몸을 들어올려 원하는 곳으로 갈 줄 알았다. 장난감도 만지고 온갖 물건들을 입에 넣어보면서 혼자서 놀았다. 며칠 전까지만해도 할 수 없었던 변화였다. 며칠을 몸을 뒤집고, 몸을 들어올려 움직이려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울고 난 결과였다. 아기의 성취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나를 잃을 것 같단 두려움이 현실이 되게 하진 말자. 내가 머리를 박는 곳이 바닥일지언정 가만히 있진 말자.
나는 내가 늘 잘하던 방식대로 행동해보기 시작했다. 시작은 내가 잘해왔던 쇼핑이었다. '소파 테이블'을 검색해 또 이것과 저것을 견주어 가장 알맞은 걸 골랐다. 거실에서 아기와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노트북을 열어야겠단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노트북을 열어 내가 가장 잘 아는 나의 모습대로 살기로 했다. 사소한 거든 뭐든 꾸준히 쓰는 일. 아기의 하루를 글로 남겨놓는 일. 그게 아니면 웬종일 고민해서 산 물건을 리뷰하는 쇼핑 일기라도 써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