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안녕
2주 만에 다시 한국에 간다. 작년에 창업을 하고나서는 거의 한달 혹은 두달에 한번 꼴로 한국에 1주에서 2주 가량 출장을 가는 일정의 반복이다. 1월 초 서울에서 제작사 대표님, 감독님 작가님과 시나리오 회의가 있어서 다녀온 후 2주만이다. 이번엔 주기가 좀 짧은 편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다음주가 설 연휴, 중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춘절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 일주일에서 길게는 2주 이상 긴 연휴를 보내는 춘절연휴는 수도 베이징의 사람들 대부분이 고향으로 이동한다. 어느해엔가 구정을 베이징에서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도시는 평소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늘 차가 막혀 2부제를 시행해도 항상 교통체증이 심해 수도라는 중국어 Shou Du(首都쇼우두)가 1등으로 막힌다는 뜻이 (首堵쇼우두) 라는 우스갯소리가 베이징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정도인데도 춘절 연휴의 도로는 한산 그 자체였다. 모처럼 뻥뚤린 시내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그것도 마음 뿐, 춘절에는 거의 대부분의 음식점이 휴무다. 그만큼 중요한 민족 대 명절인만큼 베이징에 사는 한국 교민들도 고향에 가고 또 중국인들 중 긴 연휴에 고향보다는 여행을 택하는 요우커들 때문에 한국 가는 항공권 가격은 평소보다 2배에서 많게는 3배씩 차이가 난다. 그래서 가장 저렴한 티켓을 사려고 하루씩 한국행 날짜가 앞당겨져서 결국 1월 14일 오전 11시 45분 베이징 수도국제공항 터미널2에서 출발하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항상 서울과 베이징을 오갈 때 대한항공 항공편을 고집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오래된 공항이라 들어오는 항공편수가 적고 공항이 작아 수속시간이 짧다는 이유 한가지다. 마일리지는 대한항공을 계속 이용하다보니 쌓이는 것일 뿐. 베이징의 국제공항 터미널3는 수속시간이 훨씬 더 오래걸리지만, 터미널2는 공항 도착에서부터 체크인 카운터를 지나 이미그레이션 후 짐 검사까지 10분안에 통과한 적도 있었다.
1월의 베이징은 추운 겨울이지만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동5환 고속도로를 지나 공항고속도로를 타기 전 여유로운 마음으로 베이징의 맨하탄같이 변해버린 왕징 마천루에 반사되는 겨울의 맑은 햇빛을 사진에 담았다. 다행히 아침 출근시간대를 지났기 때문에 막히지 않는 도로를 가로질러 여유롭게 도착했다. 수속을 마치고 그리 넓지않은 면세점 구경을 했다.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터미널2이지만 유일하게 하나 있던 스타벅스가 몇달째 가림막을 치고 리뉴얼 공사중이다. 다음에 출국할 때는 열려있겠지하는 생각도 두번쯤 되었는데 정말 다음번 한국갈 때는 오픈해 있겠구나. 어 왕이보 아닌가? 요즘 가장 핫한 중국 스타배우가 모델인 화장품 브랜드를 지나 탑승장으로 향했다.
한국과 중국은 1시간의 시차가 있다. 한국이 중국보다 1시간이 빠르다. 그래서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면 1시간을 놓친 느낌이 들고 한국에서 중국으로 돌아올 때는 반대로 1시간을 번 느낌이 든다. 11시 45분 북경 발 비행기의 도착지는 김포공항이다. 공항철도를 타고 집에 가기에도 편리해 정말 애정하는 항공편 시간대. 하지만 이렇게 오전 11시대의 항공편을 타게 된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나의 일과 삶의 시간을 온전하게 매니징할 수 있게 된 창업 이후부터인 것 같다. 회사와 조직에 속해있을 때는 늘 업무시간 이외의 시간대의 항공편을 타고 출장을 다녔다. 중국 국내 출장은 아침 6시부터 거의 30분단위로 항공편이 많아서 오전 7시대의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 출장을 갔고, 한국 출장은 그보다 더했다. 밤 21:45에 있는 북경발 인천 도착 대한항공 마지막편, 출근할 때 출장짐 캐리어를 끌고 가서 회사에서 업무를 마치고 바로 공항으로 날아가야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이럴 때 저녁을 먹는건 호사로운 일이다. 저녁을 거르고 거의 밤 10시가 다 되어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이미 다음날 새벽. 마지막 비행편 도착하는 승객들을 위해 준비된 새벽 1시 반 출발하는 리무진을 타고 서울로 간다. 인천국제공항 제 2터미널이 생기고 나서부터 밤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넓고 깨끗한 지하 1층 버스를 기다리는 터미널에는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승무원들, 어디로부터 왔을 지 알 수 없는 소수의 승객들이 이미 12시가 지난 새벽에 그날의 마지막 버스를 기다린다. 창공에서 내려 도시로 들어가기 전 모두들 피곤함을 등에 지고 앉아있는 그 터미널의 공기가 묘한 동질함을 안겨주곤 했었다.
회사생활을 하며 어떤 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업무시간에 중요한 업무연락 혹은 상사로부터의 연락을 놓칠까봐서 일부러 9-6 이외의 시간대에 이동했던 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미련해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이 또한 선택 때문이고 지금은 지금의 선택이 가져다주는 결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2002년 1월 14일 월요일 오후 3시, 쌀쌀하지만 맑은 서울의 공기를 마주하며 김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때만해도 이것이 당분간 내가 탄 마지막 비행기가 될 줄은 몰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