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무 May 08. 2022

나의 해방일지 9회

우리는 구씨의 과거를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을까?

우리는 구씨의 과거를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을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변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다르게 쓰거나 이전에 만나던 사람이 아닌 전혀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사는 곳을 과감하게 옮겨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여기 구씨는 사는 곳을 바꿨고 이전의 삶의 바운더리에 있던 사람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사람들 틈에서 최소한의 소통을 하면서 살고 있고 이전에 했던 직업과 전혀 다른 노동으로 하루를 채우며 시간을 달리 쓰고 있지만 그런 구씨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아득하고 어려워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구씨가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조금씩 드러나는 플래시백의 편린에 의지해서 마구 상상하고 추측해왔다. 그건 주인공인 미정이도 마찬가지다. 아니 미정이만큼 구씨에 대해 가장 많이 상상 해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편의점 아줌마가 구씨에 관해 꼬치꼬치 캐 물을 때 미정은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나이와 이름, 어디에서 왔는지 스스로 미지의 구씨를 이미지로 형상화 해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툭 나왔을 것이다. 그건 그동안 상상해온 구씨를 입밖으로 처음 내뱉은 것일 뿐이니까.


그런데 사실 미정이 구씨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면서 한편으로 미정이 이토록 구씨에게 관심이 있었나 하는 지점에서 놀란 것도 사실이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심지어 그가 결혼을 했었는지 가족은 있는지 무슨 일을 했고 혹시라도 범죄의 이력이 있는지조차 그에대해 묻지도 잡지도 않겠다던 미정이었다. 구씨의 과거가 그가 생각하는 최악의 구씨와 최고의 구씨라는 모든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단번에 생략하고 그에게 상호 추앙하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미정이었으니까. 일반적인 관계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추앙 곧 응원하는 관계라고 정의한 채 외부에는 사귀는 사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관계를 제안한 것은 미정이었고 그건 현아의 말처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구씨가 이 겨울을 제대로 날 수 없을만큼 그 사람이 딱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때 미정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말한 응원하는 사이인 추앙도 결국 사랑의 한 면이라는 것을.

그저 사랑의 깊이와 대상이 다른 것일 뿐,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 구씨를 알아보고 그런 구씨에게 마음이 가고 그런 구씨를 믿어보기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 그렇게 무의식에서 결정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함께 관계를 쌓아가는 어느 시점에서 자기가 생각하고 상상한 구씨의 과거가 도저히 자기의 그릇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를것에 대해서 미처 고민해보지 않았음을.


지금 이 모습, 그 사람의 과거나 배경을 판단 근거로 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가지고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배어져나오는 성품이나 품격만을 보고 그 사람을 추앙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고단수이며 숭고하고 어떤 면에서는 영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신이 인간을 그렇게 받아들여주었듯

인간도 서로에게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살면서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 경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거울과 거울을 마주대하듯 당신의 못남만 보이다가 그게 사실은 내게도 있어서 그렇게 싫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그 깨우침이 인간을 해방시키고 더이상 안달복달하지 않게 한다.

그건 마치 염창희가 술자리에서 80%는 정아름 얘기만 하냐는 친구의 팩폭에 그건 정아름이 만약 부자가 아니라면 이만큼 그여자를 싫어했을까? 하는 친구의 말과 연타로 날아온 과장 승진 좌절이라는 시간 이후 그가 겪게 될 자각의 시간이 이후 염창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줄지 궁금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내 안에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욕심이 있고 이기고 싶고 돈 벌고 싶고 차 사고 싶고 부자가 되면 내가 이미 충만한데 내가 누굴 미워하겠냐며 소주잔을 벌컥 들이키는 그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그렇게 아주 펄떡펄떡 뛰는 강렬한 열망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데 그게 너무 뜨거워서 차마 마주대하지는 못하고 괜히 옆자리의 정선배의 속물근성에 투영해 면죄부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창희가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창희는 정말 더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 것 같다. 아마도 큰 결단을 내릴 것이다.  


열등감, 우월감, 자기애, 자기 혐오 정도차이만 있지 갖고 있는 건 다 똑같다고 인간이 원래 한 종자라 한 놈을 만나도 깊이 만나면 사람의 심연을 알 수 있다는 현아의 현자같은 깨우침이 창희의 변화의 실마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결국은 두가지다.

이전의 모습과 똑같이 살아가거나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거나

어쩌면 해방교회의 그 슬로건처럼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겁니다."를 믿는 것은 이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줄지 모른다.

어제까지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던 내 삶에도

새롭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과연 저 문구처럼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살아온 날들만큼 수없이 배신당해온 미래를 향한 희망이라는 이름 앞에

오늘도 속는 셈치고 다시한번 깨끗한 마음이 되어 믿어보기를 선택하는 것.

그건 비단 불특정 다수를 위로하는듯한 교회 외벽에 붙은 은혜로운 표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도

한 번 속는 셈치고 믿어보기를 선택하는 것.

그게 당신의 이전 모습이 아무리 망나니였고 개차반이었고 무능력했고 무정했을지라도

적어도 지금 이렇게 내 앞에 투명하게 속이 다 내다보이는 표정으로

한번 나도 널 믿고 내년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거야 라는 밑도끝도 없는 위로의 말에 기대어 인생의 1년을 살아보겠다라고 호응하는 당신 앞에서

나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그렇게 해보겠다는 것.


실은 아주 기대를 부응하고 기대를 뛰어넘는 사람은 이 세상이 많지 않다는 것을

스물 여덟의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인간에 대한 환멸과 자괴감으로 스스로 큰 희망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불완전한 인간인 미정이

또 한명의 불완전한 인간인 구씨와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이라는 것을

염미정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때에는 마음이 내키는 만큼 자신의 과거의 짐을 꺼내놓는 사람 앞에서

그래도 좀 더 믿어보겠다고 더 같이 앞으로 가 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심연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깊은 것일까?

그렇게 자신의 심연의 어두운 부분을 조금 꺼내 보여준 구씨는 두렵다. 이 여자가 실망하겠구나.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쳐 추앙을 취소해도 된다고 읍소를 한다.

하지만 미정은 말한다.

너는 아직 나를 한번도 제대로 추앙한 적이 없다.

지금 아직도 여전히 변화는 커녕 자신의 과거에 발이 묶여 이렇게 며칠동안 빌빌대며 정신 빠진 사람처럼 앉아있는 네가 아직 나를 제대로 추앙하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어쩌면 구씨는 두려웠을 것이다.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사람인 내 본 모습을 미정이 알게 될 날을.

그래서 이제  시작한 그들의 추앙의 관계를 서둘러 손절되는 편이  마음이 편할  같아서 우울증을 앓던 전 연인의 자살에 도의적인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먼저 고백한다. 스스로 짊어지고 살던  무거운 죄의식을.


구씨는 정량적인 분량이나 대사는 적지만, 정성적으로 주연 인물들 중 다수의 인물들과 관계맺고 영향을 준다는 측면에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염가네 가족은 미정과 창희와 아버지 어머니까지 의식하지 않은 채 구씨와 보내는 시간동안 구씨에게 스며들었다.

구씨를 죽을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그 겨울 밤의 "내려"라는 외마디 외침이 구씨를 죽음으로부터 살게 했고 어쨌든 살아갈 집과 일과 힘을 주었듯이 쉽게 마음의 곁을 내주지 않는 염제호가 자식들 다음으로 마음을 쓰는 사람이 된 것은 과거가 없이 툭 떨어진 이 남자가 지난 시간동안 산포에 살면서 보여준 것으로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씨는 미정과 염가네 가족을 어떤 면에서는 조금 놀라게할 수는 있겠지만 구자경의 품격은 가짜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그들을 품어줄 것이다.

나무 그늘을 찾아 깃드는 염창희가 구씨의 그늘안으로 자꾸만 기어들어오듯. 구씨는 괜찮은 사람이고 그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해방일지 7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