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짠한 사람에게 끌리고 그에게 인생을 다 주는 걸까
나의 해방일지가 어제로 13화를 지나 이제 다음주면 마지막회를 앞두고 있다.
9회 리뷰를 쓰면서 9회가 절정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어제 13화를 보고 13화가 너무 좋아서 계속 생각이 난다. 9화 이후 10부터 12화까지는 사실 전체에서도 중요한 지점이라서 구씨와 미정 서사 위주로 나오면서 조금 힘을 준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13화에서 다시 원래의 리듬이 되살아나면서 다시 그저 살아가고 살아지는 삶의 색채로 가라앉은 것 같아서 보면서도 뭉클했고 보고난 이후까지 계속해서 마음에 여운이 남는다.
삼남매의 엄마 혜숙이 주인공인 화여서 그랬나보다.
엄마의 해방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랬나보다.
밭 내놔요. 정신없이 자라는거 정신없이 뿌리고 거두다보면 1년이 다 가고...
365일 매일, 교회다닐 때는 그나마 하루라도 쉬었지.
더는 못해. 나 이제 교회 다닐 거에요!
시집 장가 안 간, 첫째가 40이 다 되어가는 삼남매를 낳아서 키우고 밭일에 싱크 공장 일에 삼시세끼 밥 해주고 설겆이하고 구씨까지 여섯식구를 건사한 혜숙이 이렇게 더이상은 못한다며 해방을 선언한 후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났다.
눈도 못 마주치고 가는거,
그거 안쓰러워서 내가
여태까지 밥을 해다 바치고 앉았으니
혜숙은 그렇게 40여년 전 제호에게 시집와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도 압력밥솥 가스불에 올려둔 잠깐 사이에 스르르 잠들듯이 이들의 곁을 떠났다.
염기정은 받는 여자, 염미정은 무서울 게 없어서 무사가 되는 여자, 그리고 현아는 다 주는 여자라면,
혜숙은 밥해주는 여자다.
어쩌면 선택일 수도 운명일 수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묵묵히 헤쳐나간다.
눈도 못 마주치고 말 한마디 못 건네는 제호가 안쓰러워서 나 아니면 여자도 없을 것 같아서 제호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혜숙, 빚쟁이처럼 맨날 찾아오냐는 구박과 벽보고 얘기하듯 투명인간 취급하는 남친의 중학생 딸 앞에서도 입술을 물며 기죽지 않고 자신의 사랑 앞에 솔직하고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얼굴 한번 더 보고 행복할 수 있다면 세상의 편견이나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솔직하고 저돌적인 기정, 그리고 들개가 너무 안쓰러워서 키우기로 했는데 키우던 개가 다시 도망가서 시장바닥을 엉엉 울면서 배회하는 미정, 돈에는 관심도 없지만 내가 도망갈까봐 내 계좌로 따박따박 돈을 보내주는 남자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한 현아까지 이들은 모두 누군가의 짠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가가 그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쉴 곳이 되어주고 손부채로 바람을 만들어 쉬라고 말한다. 내가 곁에서 힘이 되어주겠다고.
얼마나 큰 여자들인가.
얼마나 우주를 품고 있는가.
나는 박해영식의 인간 관계의 정수가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이거 분명 진흙탕 고생길이 될 걸 알면서도 그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서로의 짠함을 보고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추앙이 아닐까?
창희는 형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형이 되는 남자다.
형 구씨의 빈자리를 그리워하고 현아의 남친을 형이라 부르며 간병을 돕지만
인생의 철저히 스스로 결정해야하는 순간에 결코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굉장히 주체적이고 책임감있게 행동한다.
스스로 오랫동안 견디고 버티며 사유하고
그 생각의 결과대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
나는 처음부터 창희는 현아랑 되겠구나 생각했다.
왜냐하면 현아도 창희랑 똑같으니까. 어쩌면 창희의 그런 면모는 현아로부터 왔는지 모른다.
둘다 사랑보다는 의리에 가깝지만, 동성친구도 이성친구도 아닌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대 인간으로써의 의리가 있다. 이런걸 믿음이라고 해야할까? 어쩌면 창희와 현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추앙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창희를 보면 심지가 견고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가늘게 흔들리고 모진 비바람을 맞을지라도 꺾이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다. 그게 인간 존재 자체가 좀 탄탄하고 그냥 자존감이 높다 정도가 아닌, 사실 창희는 그리 자존감이 높지는 않은 것 같다. 그냥 인간이 부드럽고 겸손하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염창희 캐릭터를 되게 좋아하는 것 같다. 그건 현아도 마찬가지,
둘의 공통점은 둘 다 무해하다. 욕망이 없다.
어디에도 깃발을 꽂지 않는다. 그저 살아간다.
창희는 쳇바퀴돌듯, 그냥 정신없이 자라는거 정신없이 남들 다 뿌릴 때 뿌리고 거둘 때 거두는 그렇게 1년치의 쳇바퀴가 지리멸렬하게 돌아가는 회사생활이라는 쳇바퀴를 8년은 꼬박 채우고 나서야 내가 그런 세계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스스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점주들에게 선물 받으면서, 결혼할 때 축의금 50만원 준다는 칭찬을 들으며 (100만원도 아니고 50만원이라는 점에서 진짜 작가님의 디테일함은 어디까지일까 감탄함, 100은 너무 많고 30은 너무 적고 50이 딱 적당함.)
이제 창희는 어디로 갈까? 어디로 훨훨 날아갈까?
처음부터 끝까지 8년의 시간을 견디고 견뎌 스스로 해방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나온 창희, 고등학교때부터 달리기 하나는 기똥차게 잘해서 구씨를 따돌리고도 남는 결국 그가 도착한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 아무런 욕망도 욕심도 없는 마음의 모든 허영과 거품이 빠진 인간의 얼굴을 보기위해 병실로 향한다.
곽혜숙 역의 이경성 배우는 드라마에서는 처음 본 얼굴이지만 얼마전 뜨거운 씽어즈 연극인 합창단에서 보고 연극배우인 것을 알게됐다. 이 삼남매의 엄마 역할이 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있는 엄마 역할이다보니 초반 등장때는 항상 찡그린 표정이었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이게 대단한 캐릭터 분석에서 온 연기구나를 알게됐고 연기적으로 정말 탄탄해서 가족 씬이 나올 때 균형을 잡아주는 것 같다. 그리고 천호진 배우야 뭐 말할 것도 없지만, 난 가끔 염제호 클로즈업 할 때 자꾸만 구해줘2에서 그 사이비 교주 표정이 나오는 것 같아서 혼자 흠칫 흠칫 놀람 ㅋㅋㅋ
나의 해방일지가 이제 3화를 남겨두고 있다. 오늘 14화는 아마도 아주 많이 슬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