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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무 Feb 04. 2017

[화양영화] Arrival, 컨택트

드니빌뇌브 감독, 2016년. 

2월 2일 아침일찍 컨택트라는 이름으로 개봉하는 Arrival을 보러 극장을 찾았다. 내가 사는 중국에서는 이미 1월 20일에 개봉한 뒤였다. 이 영화는 한글 자막으로 정확하게 보고싶었다. 그래서 개봉일까지 기다렸다가 가장 이른 시간, 첫 상영 시간에 달려갔다. 


꽤나 좋은 평을 얻었던 드니 빌뇌브 감독의 전작, 시카리오. 

복잡한 배경을 지녔으나 관객의 입장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로그라인으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그 심플한 메세지에 매우 잘 들어맞는 음악의 선율을 얹어 영화를 하나의 시작과 끝이 있는 경험으로 선사한 드니 빌뇌브 감독. 시카리오에서 그와 함께 작업한 아티스트인 Jóhann Jóhannsson이 이번에도 음악감독으로 함께했다. Jóhann Jóhannsson은 시겨로스가 많은 영감을 받는 뮤지션으로 잘 알려진 레이캬비크 출신의 아이슬란드 뮤지션이다.

ⓒ HNM

푸른색의 차갑고 서늘한 감정선을 긁고 지나가되 절대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 새로운 음, 리듬, 악기가 자아내는 선율이 또 다른 감정을 만들어낸다. 호른이 한번 크게 불 때 전혀 여기에서 이런 멜로디가 나오면 안되는데 제대로 쌔게 충격을 준다. 그렇게 얼얼해져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영화도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데려간 뒤다. 영화는 감정을 전달한다는 차원에서 사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게 내가 영화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믿음이다.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내게 보는내내 무척 생경한 감정을 느끼게 했고, 그렇게 마음을 내어줄 수 밖에 없도록 나를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내가 영화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서스펜스인데 드니 빌뇌브의 영화 연출은 서스펜스의 완벽한 재현이다. 



나아간다. 


어느날 지구에 도착한 열 두 개의 Shell. 

그 중의 하나가 미국 몬태나 주에 떨어졌고 대학에서 언어학 강의를 하던 루이스는 그가 미국에서 몇 안되는 탁월한 언어학 박사이고 국가기밀 1급 자격증 기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이유로 차출되어 Shell에 들어가 외계의 생물체와의 소통을 일임받는다.   

루이스는 그렇게 무중력 상태의 쉘에 들어가 에어리언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언어란 단지 대상과 대상을 이어주는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대상을 이해하기에 앞서 대상에게 나를 인식시키고 이해시키는 것이 먼저인 타자지향적인 도구다. 그 누구보다 언어의 목적과 의미에 천착되어 살아온 루이스는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미지의 물질에 감염될지 모를 위험에서 보호해주는 방화복을 서서히 벗는다.  

그리고 나아간다. 

앞으로 나아간다. 

대상에게 나를 보여주고 나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영화는 어쩌면 루이스가 해낸 그 다가섬, 나아감의 행동이 없었다면 

그 이후의 이야기도 가능하지 못했을, 그 단순한 하나의 결단과 행동을 내게 촉구했다. 

출처 : imdb.com


살아간다. 


영화는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비선형적으로 뒤틀면서 시작한다. 초반부에 루이스는 한 아이의 엄마이고 아기의 탄생에서부터 행복한 시간, 그리고 원인모를 이유로 아이가 어린 소녀였을 때 싸늘하게 죽어가는 마지막 장면까지 비추어준다. 이 때 영화는 관객이 시간에 대해 갖는 선형적인 접근을 보란듯이 뒤집어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비튼다. 시작과 끝, 그것은 곧 끝과 시작. 그렇게 서서히 루이스의 삶에 이미 일어났거나 아니면 일어나지 않았거나 할 사건들을 비규칙적으로 나열한다. 

혼돈을 느끼지만 곧 점점 긴장감이 증폭되는 명확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통유리창으로 강이 보이는 그녀의 거실, 밝음 보다는 흐린 날씨가 주는 어둑한 자연광. 

그 무거운 기운이 거실에 꽉 차 있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왜 그녀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묻지 않았고 그냥 살아가고 있다.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어쩌면 우리가 사는 오늘이라는 시간은 미래로부터 왔을지 모른다. 

내가 모르는 미지의 시간이 내게 당도하지 않았다면 내가 모르는 내일이라는 시간은 내게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미래라는 시간은, 우리가 익숙한 선형으로 구분지어온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아직 내게 도달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지만 그 미지로부터 나에게 와야만 한다는 이유에서 어쩌면 이미 나타난 사실에 기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스와 이안이 에봇, 코스텔로(외계인 이름, 이안이 지어줌)와 소통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루이스는 발견한다. 그들의 언어에는 과거, 미래의 시제가 없다고. 

언어가 시간 위에 있는 것이다. 

말은 곧 사건이고 말이 되어지자마자 동시에 현실이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온 예수의 그것과 흡사하다. 



알 수 없음에서 오는 안도, 그리고 위로.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딱히 어느 지점이거나 대목에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서서히 마음이 달아올라 어느 순간 그 벅참에서 올라오는 수분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눈물은.

그것은 아마도 영화가 말하는 그 미지의 것,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도착한 시간이라는 선물. 그 경이로움에서 오는 감탄일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것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함에서 오는 기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그 감사가 주는 평온한 마음이 나를 벅차게 만들었다. 영화에서 이 루이스의 대사처럼.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I embrace it. And I welcome every moment of it." 


인간은 그래서 강하다. 


선물은 시간을 열어준다. "Present opens time." 

헵타포드 언어가 가진 시간성은 우리가 사물과 역사를 대하는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하지만 설령 미래로부터 도달하는 시간이라는 선물이 나의 유한성을 재차 인식시키더라도 내가 영화를 보며 길어낸 위로란 오늘의 내가 해내는 말과 그리고 행동들은 또한 미지의 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알 수 없음이 공포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그곳으로부터 지금 이곳으로 계속해서 보내져오는 신호는 바로 선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선물을 온 몸으로 껴안을 것이라는 의지. 그것이 주는 안도가 영화 내내 감돌았다. 


유한하면서 동시에 강한 인간의 삶, 미지의 힘은 계속해서 지금의 나와 소통하고 있다. 

언어가 다르고 생각이 달라도 나는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고, 절대적 대상으로부터 지금도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다. 


(한나무) 

ⓒ H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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