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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Apr 12. 2023

자전거여행 2

(남해안길, 보길도 ~ 부산 달맞이 고개 )



#5일  보길도~ 완도(화룡포)~신지도~고금도~장흥 : 120km

고등학교 때 지리선생님이 보길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과연 그럴 만한 곳이었다. 윤선도는 제주에서 유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다가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길도에 눌러 앉았다. 부용동 세연정 바위들은 과연 예사롭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혹약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주역에 나온 혹약재연(或躍在淵). 도약할 듯 하지만 연못 속에 있다… 들끓는 마음을 지긋이 누를 수밖에 없었던 윤선도의 심경이 드러난 작명이겠지 싶었다.   


섬에서 하룻밤을 자도 좋았겠지만 남은 길이 걸음을 재촉했다. 

보길도 동리, 중리 해안쪽으로 반 바퀴 돌아보고 다시 내화도로 넘어와 동천항에서 완도 가는 배를 탔다. 배는 완도 화룡포에 닿았다. 완도의 남동쪽을 가로질러 신지도~ 고금도를 거쳐 강진반도에 닿았다. 

고금도에도 지석묘가 있어 잠시 앉아 쉬었다. 어쩐지 옛사람들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장흥에 귀농해 있는 선배와 연락이 닿아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석양에 반짝이는 강진만을 왼쪽에끼고 강진반도를 거슬러 한참을 달렸다.

해질 무렵 수인산 아래  선배가 살고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밥과 술, 따뜻한 잠지리와 더운물 샤워까지 과분한 신세를 지고. 보조 배터리들도 꽉꽉 충전을 해놓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폭등한 부동산 가격, 집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모두 정부를 원망하고 있어 이미 선거 결과를 어느정도 가늠하게 만든 상황이지만 어쩌면 하는 기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집권 세력은 개인들의 고된 인생에 대한 원망을 떠안게 돼 있다.   

장흥 읍내 터미널 인근 식당에서 국밥을 한 그릇 사 먹었다. 읍내를 벗어나 이내 편백나무 휴양림이 있는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개를 넘은 뒤로는 수문 해수욕장, 율포 같은 '따뜻한 남쪽나라'가 실감되는 평화롭고 한적한 바닷가 마을들이 이어졌다. 왜 이런 평화로운 풍경들을 진작 찾아오지 못했을까. 늘 쫓기듯 살아온 지난 날을 새삼 돌아보게 됐다.   

보성군 득량면을 지나 고흥반도로 접어 들었다. 과역 읍내에서 물을 사고 잠시 쉬었다.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는 휴일. 남녘의 소읍은 고요한 햇살 아라 졸고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득량도가 고향인 친구는 내게 고흥에 가면 꼭 녹동항에 들러 아리랑식당 장어탕을 먹어보라고 했지만 자전거 길은 고흥반도를 위에서 가로질러 팔영대교를 건너 여수반도로 이어졌다. 

단연 두드러져 보이는 팔영산을 멀리 바라보면서 여수반도 사이 큰 섬 대여 섯 개를 이어가며 바다를 가로지른 팔영대교를 건너 오후 늦게  여수반도에 상륙했다. 

여수반도 왼쪽으로 여자만을 바라보면서 달리는 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다만 낙타등처럼 오르내리막이 이어져 지치게 만들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 집에 와서 저녁 함께 먹어요' 순천에 사는 후배만 아니었으면 여자만 어디쯤에서 짐을 풀고 자야 적당한 거리였다. 

순천까지 무려 160km 달려야 운행을  마칠 수 있는 일정이었다. 여자만을 거슬러 오르다 보니 마침 와운바다 일몰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장관이었다. 이 순간 이 곳에 있다는 것을 감사할 일이다.  

와운해변에서 이미 해가 지고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곽재구 시인은  '와온 바다'라는 시에서 
'해는 

이곳에 와서 쉰다 
전생과 후생 

최초의 휴식이다

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 
이렇게 말 했다. 

어둠 속에서 틈틈이 자전거를 세워두고 스마트폰을 열어 대통령선거 투표상황을 확인했다. 뜻밖에도 출구조사만으로는 결과를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순천대학교 인근 후배가 사는 '홍매화길'에 도촉한 것은 밤 10시가 다 되어서 였다.

'내가 목에 기름 치게 해줄 게' 하는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눈물 나게 감사한 밥상이었다.


#6일 장흥~ 순천 : 160km


선거는 예상을 벗어나진 못했다. 미리 잔뜩 실망을 해두었기에 새삼스러울 없지만... 


후배가 출근한 뒤,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고 아침 햇살을 잔뜩 받으며 홍매화 만발한 정겨운 골목길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전장에서 후방으로 휴가라도 나온 것처럼 평화로웠다. 거친 숨을 토하며 패달을 밟을 때 등 뒤로 총알 같은 굉음을 내며 내달리던 트레일러 굉음 같은 것들이 꿈속의 일처럼 현실감이 없게 떠올랐다. 

순천에서는 이틀을 잤다. 이틑날은 동문 선배님들까지 강의가 있는 날이라 웃장 국밥집에서 어울려 반주와 함께 푸근한 점심을 먹었다. 후배와 둘이 봄볕 나른한 순천 시내 매산동 일대를 한가롭게 거닐었다. 여순 사건의 집단학살지, 남장료의 초기 선교유적지, 소설가 김승옥의 흔적들.
오후에는 소카를 빌려 구례 섬진강변 천수식당에서 참게탕을 포장해서 구례 산속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스무 살 무렵 추억을 떠올리며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나?'  늘 하는 그런 탄식을 했다. 


8일 순천 - 휴식 


#9일 순천~ 삼천포 100.69km


순천에서 이틀 자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길은 광양을 거쳐 남해로 이어졌다. 광양 제철소 인근은 자동차 공용도로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제철소와 하청 공장들을 드나드는 대형 트레일러들이 시속 100Km 넘게 날아다니는 무시무시한 구간들도 많았다. 그런 길을 달리다 보면 정신이 어수선해진다. 오로지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노량대교 아래 '민주네 식당' 정갈한 밥상 

점심 무렵 노량대교를 건너 남해로 접어든 뒤에야 고요가 찾아왔다. 다리 아래 '민주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작은 식당인데 깨끗하고 음식도 정갈하고 맛있었다. 배터리들을 충전시키며 감사한 마음으로 밥을 먹었다.  

남해 관음포 

광양을 통과하며 어수선했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남해에서는 내내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변길이 이어졌다. 관음포에서 비를 만나 잠시 쉬었다.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둔 '노량해전'의 현장이다. 왕이 이끄는 정부의 역량으로만 따진다면야 임진왜란 이후 어쩌면 일본이 조선을 영구히 합병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순신 같은 기적같은 인물이 어떻게 실존할 수 있었을까. 장군 한 사람에게 민족이 입은 은혜가 무량하다.   


순천에서 이틀 편한 잠을 잤으니 야영을 하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창선대교를 넘어 삼천포로 넘어갈 때 이미 어둠이 짙어졌다. 야영이 가능할 만한 곳을 검색해 보고, 청널공원이라는 곳에 올라가 보았지만 주택가 언덕 위 좁은 공원에 텐트를 칠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삼천포항 주변을 배회하다가 결국 모텔에 들어가 잠을 잤다. 

# 10일  삼천포~ 통영 안정공원 74.63KM

난방도 제대로 안 되던 허술한 모텔에서 자고 일어나 사천에서 통영으로 이어진 길을 달렸다. 낙타등 같은 오르내리막 길이 제법 힘겨웠다. 

달리면서, 전에 와 본 적 있는 남일대 해수욕장이 인근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착하게 생각했다면 해수욕장을 찾아가 야영을 해도 좋았으련만. 언제나 쫓기듯이 초조한 마음이 조급한 결정을 하게 만든다. 
 

고성을 거쳐 통영으로 가는 길에 친구의 부음을 받았다. 망설이다가 상경을 포기했다. 바닷가에 앉아 잘 피지도 않는 담배를 한 대 피워야 했다. 잘 가라. 괴로웠던 육신과 고달팠던 마음 다 풀어던지고 편안히... 편안히! 

고성, 남산공원 인근 오토캠핑장을 지나 바닷가 식당에서 봄도다리 쑥국을 시켜 점심을 먹었다. 

통영시내에 들어서니 사람도 많고 활력도 넘쳤다. 

통영 중앙동 시장앞에서 간식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택시 한 대가 다가오더니 물어볼 게 있다고 해 멈춰섰다. 자신도 자전거 여행을 하고 싶은데 내 자전거에 달린 패니어 등을 어디서 구입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아는 대로 알려드리고, 인근에 야영할 만한 곳이 없는지 물었다. 머지 않은 곳에 공원이 있고 화장실 등 야영하기 충분하다고 했다.  인근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공원에 가서 밤이 깊어지고 주민들이 모두 귀가할 때까지 기다린 뒤 텐트를 쳤다. 비 예보가 있어 지붕 아래 쳤다. 



#11일 통영안정공원~ 마산 월영동 49.5Km

아침부터 비 예보가 있어 5시도 되기 전에 길을 나섰다.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보기로 했다. 통영에서 청원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다.  비가 쏟아질 때마다 비가림이 있는 버스 정류장에 들어가 쉬면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온종일 비 예보라 차라리 마땅한 야영장이 나오면 하루를 쉬어갈까 고민도 했다. 마침 고성군 이동면 장기리 '애향동산'에 야영객들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그러나 오전부터 텐트를 치고 온 종일 들어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고성군 내산리 가야고분군 

종일 비를 맞고 달렸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릴 때는 카페에 들어가 충전을 하면서 기다렸다. 


창원 공원묘지가 있는 고개를 넘어 마산까지 제법 굵은 빗줄기를 감당해야 했다. 

마산에 접어들며 한살림경남 김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그 빗속에 기꺼이 달려와 밥을 사주고 갔다. 


#12일 마산 월영동~ 부산 달맞이고개  96Km


'뚜르드월드' 게시판에 CAK 순례 소식을 알렸더니, 일면식도 없는 '자유토끼' 님이 고맙게도 다음 날 마산에서 부산까지 함께 달려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아침 7시경 만나 자유토끼님 안내를 따라 편안한 마음으로 진해를 거쳐 부산까지 달렸다. 

진해에서 부산 신항으로 접어드는 지름길은 일부 비포장 구간이었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바퀴 사이에 진흙이 끼어 더 이상 굴러가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다행히 트럭 운전자분이 주차장 같은 곳에서 고무 호스를 끌어다 줘 간단한 세차를 한 뒤 다시 달렸다. 

부산 신항 부근 줄지어 질주하던 컨테이너 트레일러들. 잔뜩 주눅이 들어 길가로 달렸다. 나라를 생명체에 비유하자면 이 거대한 물류 시스템이야말로 심장이고 혈관일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수많은 일자리들. 이런 고된 노동의 목적은 단순하다.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사는 것.

부산에 들어섰다. 자유토끼님은 낙동강변에서 사상터미널로 가 버스로 마산으로 귀환하고, 남은 구간은 혼자 달렸다. 사상공단을 지나고 부산교대 인근 온천천 자전거 길을 만날 때까지는 꽤 번잡한 시내를 통과해야 했다. 

달맞이고개에서 해운대에 사는 친구를 만났다. 기장에서 교사로 일하는 또 다른 친구가 정관에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며 오라고 했다. 날이 어두워져 달맞이 고개에서 친구의 차 트렁크에 바퀴를 분해해 싣고 정관까지는 점프를 했다. 

이로써 남해안 긴 구간을 모두 달렸다. 이제 꼭지점을 돌았으니 북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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