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비밀 문자가 필요한가요

by 나무

그런 이야기가 있다.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데 잊을 수는 없고 말로 뱉기도 어려운 상념 말이다. 노트 한구석에 몰래 써볼까 싶다가도 들킬까 봐 겁이 나 꿀떡 삼켜버리는. 그럴 땐 비밀을 꽁꽁 싸맬 나만의 방법이 필요하다. 더불어 여간해선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을 은밀한 공간에 숨긴다면 더욱 완벽할 것이다.

어머니의 집은 경기도에 있는 2층짜리 주택이다. 아래층은 가족실로, 위층은 손님용으로 지었지만 2층엔 거의 올라가지 않아 자연스레 창고처럼 사용한다. 대부분 잘 쓰지 않는 물건을 보관하는데, 안 그래도 많은 짐에 자식들의 것까지 한몫을 더 한다. 나도 스무 살 무렵에 분가하면서 어린 시절 물건은 부모님 댁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이후로도 짐을 더 가져다 두긴 해도 잘 찾아오진 않는다. 기껏해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불을 교체해 가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 오랜만에 2층에 갈 일이 생겼다. 텃밭에서 갓 수확한 향긋한 바질로 페스토를 만들기 위해 믹서기가 필요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가 믹서기를 찾다가 문득 구석에 놓인 키 큰 장식장에 눈길이 미쳤다. 장식장은 깊은 잠에 빠진 듯 조용히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내 학창 시절 상장과 졸업장, 자작시 모음집, 오래된 앨범 등 옛날 물건이 가득했다. 추억에 잠겨 하나씩 짚어 보다가 어느 빛바랜 공책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귀여운 그림과 삐뚤빼뚤한 글씨가 가득한 오래된 그림 일기장이다. 사랑스러운 이 물건 때문에, 고작 여덟아홉 살이던 당시의 나는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초등 6년간을 한결같이, 방학 내내 일기를 미루다가 개학 전날이 되어서야 몰아 쓰느라 매번 눈물 바람을 했다. 당연히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고 결국엔 없던 일까지 지어내야 했으니 그 시절 일기는 어쩌면 ‘기록’보다는 ‘글짓기’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형제가 많았던 덕에 급할 땐 서로의 것을 베껴 쓰는 꼼수를 부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장씩 차분히 읽고 있자니 고사리 주먹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일기를 쓰던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그때, 공책 사이에 끼워진 낡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이게 여기에 있었구나!’ 반으로 접힌 종이에는 동그라미와 삼각형, 사각형 등 여러 가지 도형이 빼곡했다. 중고등학생 때 썼던 비밀 일기이다. 세상의 질서에 외롭게 저항하던 사춘기 시절, ‘사과’는 왜 ‘사과’이고 ‘책상’은 왜 ‘책상’이냐며 의문을 제기하다가 멋대로 ‘의자’는 ‘이불’로, ‘이불’은 ‘신발’ 등으로 바꾸어 불렀고 그걸로도 성에 차지 않자, 도형을 활용한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빈 동그라미는 모음 ‘ㅏ’, 동그라미를 반으로 나눠 왼쪽을 색칠한 것은 ‘ㅑ’ 와 같이 말이다. 나만 아는 언어가 있다는 건 높고 튼튼한 성곽을 쌓은 것처럼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내가 허용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내 글을 읽지 못할 테니까. 그 시절 여드름 가득했던 단발머리 소녀에게는 무슨 재미난 일이 있었던 걸까? 종이 한 장이 부족할 만큼 빽빽하게 채워진 그날의 흔적이 긴 시간을 지나 내게 닿았다.


부호가 잔뜩 적힌 종이를 곱게 접어 원래 있던 자리에 끼워 넣었다. 무언가 미스터리한 수수께끼를 살짝 엿본 기분이다. 글자를 해독할 문자 배열표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나조차도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었다. 이로써 도형 문자를 만든 이유, ‘비밀 봉인’이라는 최초의 목표가 완벽히 성취된 셈이다. 학창 시절의 비밀 일기 뒤로 덧붙여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생각해 보지만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은, 조금 밋밋하고 지루해서 그다지 비밀이랄 게 없다. 하긴 혹시 있다고 해도 나이 들수록 조금씩 무뎌지는 기억력 때문에 이제는 예전만큼 정성껏 감출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모험이 사라져 아쉬운 마음을 그림일기와 함께 장식장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혹시 어린 시절의 나처럼, 누군가 자신만의 비밀 문자가 필요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기꺼이 이 아이디어를 제공할 의향이 있다. 누구든 나의 것을 모티브로 삼아 자신만의 문자를 만들어도 좋다. 단, 자신이 지은 죄를 감추려고 하는 이들만은 제외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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