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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04. 2023

언제나 첫날인 오늘

병원에서 받아온 약 봉투를 열었다. 약이 담긴 봉지들을 꺼내어 윗부분에 하나씩 날짜를 적는다. 하루 한 번 복용이니까 오늘 날짜부터 쓰기 시작한다. 근래 들어 약을 먹어야 할 때 헷갈리는 일이 잦아져 시작한 방법인데 꽤 도움을 받고 있다. 조금 전 ‘약을 먹어야지.’ 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 내가 먹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땐 혹여라도 과다복용하는 것보단 하루 빼먹는 게 나을 것 같아 걸러 버린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 날, 미처 먹지 못한 약봉지가 몇 개씩 남곤 했다.


장을 보러 갈 때는 메모를 한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필요한 것들을 적어 놓는다. 미리 목록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사야 하는 물건을 빠뜨리기 일쑤다. 생활용품이야 다음번에 사도 되지만 혹여라도 요리에 필요한 재료 중 빠진 것이 있으면 난감해진다. 온 길을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리스트를 적을 때는 주로 작은 수첩이나 메모지를 이용했었다. 하지만 집을 나서며 두고 가는 일이 많아서 지금은 핸드폰 메모장을 활용한다.


가만, 유년 시절엔 어땠던가? 나는 물건을 곧잘 잃어버리는 아이였다. 초등학생 땐 학교에 연필이나 지우개, 필통, 우산 등을 두고 오는 일이 허다했다. 가져가야 할 준비물을 챙기지 못해 선생님께 호되게 혼이 나기도 했었다. 5학년 때인가, 아버지가 처음으로 손목시계를 사주셨다. 분홍색 시계 줄이 달린, 만화 주인공 캔디가 그려진 바늘 시계였다. 1970년대였던 당시는 손목시계가 무척 귀했는데 그걸 차고 나간 첫날 그만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 일은 어린 나에게도  충격이었던지 딱 하루 보았던 시계의 생김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행히 성인이 된 후로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거의 없다. 내 기억력이나 주의력이 좋아졌다기보다는 나름의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이다. 항상 큰 가방을 메고 다니며 모든 물건을 그 안에 넣는다. 필요할 때 책이며 우산 등을 꺼내 쓰고 이후에는 바로 가방 속에 넣어 가능하면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는다. 이 방법은 꽤 유효해서 지금까지도 물건들을 잘 챙기고 있다. 그러고 보면 잘 잊는 것이 본래 내 성향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이 들수록 빈도가 높아지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그러니 잘 잊거나 잃어버리는 것은 이제 나만의 일이 아니어서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곧잘 화젯거리가 된다. 누군가 ‘건망증 때문에 이런 행동을 했다.’고 이야기하면 처음엔 공감하며 각자 자기 경험을 덧붙이다가 점점 누구의 건망증이 더 심한지 성토하는 자리가 되어 버린다. 재밌는 건, 40대 중반을 넘기면서는 친구들과 어떤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든 나중엔 건강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점점 변해가는 우리 몸은 50대가 되도록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체 리듬도 변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낮잠을 자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질 때가 있다. 또 새벽 2~3시까지도 무리 없이 활동하던 것이 근래엔 오후 11시만 넘어가도 피곤함을 느낀다. 이렇게 무언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몸의 낯선 변화를 마주하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처음엔 졸려도 자지 않거나 배고프지 않아도 때에 맞춰 음식을 먹으며 몸의 변화를 거부하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젊은 시절 습관대로 살려고 애를 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 몸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젊어서는 내가 몸을 이끌며 살았어도 앞으로는 몸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걸 이해한다. 가끔 서글프긴 해도 어느새 담담히 받아들일 만큼 유연해졌다. 졸리면 자고 배고플 때 먹으며 신체의 변화에 저항하지 않으니 오히려 사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이럴 때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나누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큰 도움이 된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과정이 내면의 불안을 잠재워 준다.


20, 30대에는 중년이 까마득히 먼 듯 보였다. 어느덧 나는 40대를 훌쩍 지나 그 시기에 도달해 있다. 나이 듦은 존재가 살아있는 한 계속되는 것이고 우리의 몸은 그에 따라 변할 것이다. 하지만 신체의 변화가 꼭 자아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나는 여전히 세상이 궁금하고 호기심은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지고 있으니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점점 느려지고 약해지는 신체를 돌보기 위해 좀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뿐, 오늘도 씩씩하게 이 몸으로 살아갈 방도를 궁리한다. 2023년이 벌써 절반 지나갔다. 해를 넘기면 또 한 살이 더해질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언제나처럼 처음 '오늘'을 맞이하겠지. 시간의 일은 그가 알아서 하도록 두고, 나는 내 일을 하며 오늘도 즐겁게 내 뜻대로 산다.

                                                                                                                                                  (2023.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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