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상실한 '원형'을 복원한 BTS
1년 반 전, 나에게 찾아온 일곱 소년들과의 만남. 그 '아주 특별한 만남'을 기억한다.
그것은 얼핏 보면 상처 받은 자의 철없는 몸짓처럼도 보였고, 생의 의지를 놓은 무기력증처럼도 보였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혀를 찼었고 친구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나를 찾아온 그 만남은 어떤 '고상한 사람'이 아닌, 세상이 말하는 '일개 아이돌' 어린 소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방탄소년단. 생의 의미를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찾아왔던, 내 생애 하나밖에 없던 만남. 그렇게 그 소년들은, 내 안에 들어왔었다.
숨이 막혀오고 모든 것을 잃어갔을 때, 그 아이들은 내게 '인공호흡기' 같은 존재였었다.
그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노래를 듣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돌파구였던 나의 하루하루에 다시, 빛이 비치고 생기가 돌았던 날들. 신기했다. K팝은 커녕 그 어떤 노래도 듣고 산지 오래였던 내가, 그런 것에 도통 아무런 관심도 없던 내가, 그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미소를 짓고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밤마다 그 아이들의 영상을 돌려보고 있는 나를, 남편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었다. 어떻게 저런 '코 묻은 애들'을 보며 행복해할 수 있냐는 '편협한 지식인의 시선'이었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은 '수준 낮은 취향을 가진 개인이나 하는 짓'이라는, 역시나 '배운자들의 치우친 편견'이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 아이들을 보며 위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실체로서 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더 중요했기에. 나는 그들에게 말했었다.
"내가 그 아이들을 보며 위로를 받는 것은, 들꽃을 보며 위로를 받는 것과 같아"
들꽃까지 들먹였으니, 내가 더 가관으로 보였을 줄 안다. 무기력증에 빠진 스스로에 대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어도 상관없었다. 실제로 그들의 존재는 나에게, 그렇게 작용했으니까.
나는 어쩌다 그 아이들에게서, 들꽃을 보았었을까?
그들의 콘서트장에서 일곱 소년들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들의 표정 속에 답이 있었다. 그 표정. 아련한 기억을 붙잡고 싶은 간절함. 소녀들은 거의 다 '울먹이고' 있다. 왜 소녀들은 그들을 보며 울고 있을까? 무엇이 그 소녀들을 울게 했을까? 단지 눈 앞에서 엄청난 기교의 서커스가 벌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감동을 받지는 않는다. 우리가 감동을 받고 우리를 울게 하는 것은 언제나, 테크닉의 시현이 아닌 '감정의 전달'에서 온다.
그들은, 어떠한 '강력한 감정'을 소녀들에게 '전달'했고, 그것이 소녀들 마음을 울게 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 소년들을 보며 느꼈던 감정, 그것을 통해 위로받았던 경험, 그리고 그 소년들이 자신의 삶을 바꿔 놓았고, 어둠의 끝에 있던 자신을 살렸다는, 전 세계 수많은 팬들의 생생한 증언.
그들은 달랐다. 기존의 어떤 가수나 그룹과도 같지 않은 매우 차별된 그들만의 '자기장'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강력한 치유 매개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을 말하지 않고는 'BTS 현상'의 핵심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융이 말한 '원형'과 닿아있다는 것을.
인간이 지닌 태곳적 마음, 훼손되지 않은 가치, 아이 같은 마음,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생명력. 순수한 마음으로만 닿을 수 있는 것. 그 소년들은 남들처럼 고상한 척하지 않았다. 힘주고 있지 않았다. 거룩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유치했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 자체로 아이였고 들꽃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누구보다 자연스러웠고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을 깨웠다.
BTS가 우리를 데려간 지점은 바로 거기였다. 아이 같은 마음. 그 순수함을 돌려준 것.
온갖 지식과 이성으로 된 갑옷 따위 벗어도 된다고 말해준 것. 진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라고 외쳐준 것. 그들 스스로 '아이로 존재하며' 그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준 것.
세상의 수많은 소녀들과 소년들이, 저 늙어버린 유럽의 문화 대국들이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외적인 탤런트'에 있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존재가 뿜어내는 '내적인 의미'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체로 '원형을 품고 있는 개인'이기 때문에.
BTS가 이루어내고 있는 '소통'은 단순히 '아티스트와 팬'의 소통이 아니다. 그들 소통의 차별점은 그들이 팬들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다가가고 접근'하는데 성공했다는 데 있다. 그것은, 그들이 원형이라는 '가장 순수한 상태의 힘'을 '원형을 훼손당해 고통받는 개인'에게 직접 접속하게 하는 체험을 가져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것은 융이 말한 '신적 체험'과 같은 것으로, 인간 의식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깊고 신성한 체험이다. 그들의 팬인 '아미'가 그토록 용맹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BTS에게서, '스스로의 구원'이라는 '신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Love Yourself '사랑'이다.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다.
그들을 보며 울고 있는 소녀들은 그 순간, 그들을 통해 '잃어버린 천진함' '상실당한 순수함'과 접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근엄한 성직자나 그럴듯한 지식인 현자의 모습이 아닌,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아이 같은 감성' 그 찬란함을 간직한 모습이기에.
오늘날, 그 모두가 광적으로 찾고 싶어한 단 하나의 것. 모두가 잃어버렸고 마음 깊이 그리워하는 그것.
그것을 BTS, 그들이 우리 앞에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신화'를 품은 모습으로.
무엇보다 가장 신나게. 누구보다 가장 친숙하게.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보다 강력하며, 누구도 해낼 수 없던 '완전한 사랑'으로 강력한 치유가 일어나게 한다.
그것은, 저 깊고 오래된 태곳적 마음. 우리가 잃어버렸고 회복해야만 하는, 내 안의 모습이기에.
'BTS와 융'에 대한 저의 글들과 저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BTS 오디세이>
모든 아미들을 대표하여 가슴으로 낳은 저의 이야기. 많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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