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Feb 04. 2021

위험한 자기만족의 덫 '준다는 것'

진짜 어려운 것은 받는 것이다


 한국에 살던 시절, 결혼 전까지 마음으로 나름 의지하던 '언니'라 부르던 이가 있었다. 나보다 한참 연배가 있던 사람이었고, 늘 바지런하고 빠릿빠릿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느리고 현실성 떨어지는 '어린 나'는 그 사람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고 때로는 마음의 짐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순간들이 불편하고 부담스럽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내게 보낸 '순수하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대표적인 진보 언론사에서 작가를 하던 사람. 여기저기 사람들을 널어놓고 다니며 언제나 큰소리치던 사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한없이 주던' 사람.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것을 빚처럼 느껴지게 한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내 맘대로 준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주는 자란 '달콤한 권력자'라는 것을. 
진짜 어려운 것은 받는 것이라는 것을. 함부로 주어서도 함부로 받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오래 전 그 사람의 본모습을 확인하며, 그런 사람을 언니라며 따랐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 사람이 내게 '늘 무언가를 많이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뭔가 사회도 현실도 잘 아는 듯 보이던 그 사람의 베풂에 '보답해야 한다는' 일종의 어떤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속이 깊은 사람도 넓은 사람도 아니었고, 더구나 나를 평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허망한 관계는, 빨리 털어낼수록 좋다  


 씁쓸한 것은 그 사람은 나를 여전히 받기만 한 철부지라고 생각할 거라는 거다. 
자기는 한없이 주기만 했기에 언제나 '도덕적으로 정당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거라는 거다. 상관없다. 함께 따르던 당시의 후배들이 그 사람에게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그 사람식 관계 맺음의 허망함을 단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진심이 빠진 베풂은 고마울 수 없다. 그냥 막 퍼준다고 해서 고마운 것이 아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어야만 그 마음이 닿아 고맙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결혼생활을 하던 내게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해 준 사람이 있었다. 시어머님이었다. 파리지앵 부르주아 출신의 외동딸. 
가족들 중 최상의 경제력을 지닌 어머님은 자식들에게 늘 경제적인 도움을 주시면서 동시에 '핵심 권력자'로 존재했고, 실제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은 어머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흘러갔다. 

 어머님이 곁에 있으면 느껴지는 그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의 정체. 그것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겉으로는 언제나 쿨한 얼굴로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 그 미소 앞에서 왜 나는 늘 불편하기만 하였는지. 그 미소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경제력이 없는 이방의 며느리에게 늘 용돈을 쥐어주시던 그 손에서 어머님의 진짜 속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신의 나에 대한 '권력의 우위'를 확실하게 해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어머님은 나에게 돈을 주던 모든 순간 남에게 적선하는 마음으로 주었었다는 것을. 그 '기부 행위'로 언제나 자신의 만족감을 돌려받고 싶어 했다는 것을. 

줄 때에도, 주고 나서도, 인상을 쓰면 안 되는 것이다  

 
 어머님이 돈을 쥐어주실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으나 끝까지 거절할 수 없어 받아왔던 내가 바보였다는 것을. 그 날 이후로 결심했었다. 다시는 어머님의 용돈을 받지 않겠다고. 마침 어머님은 그 날 이후로 더 이상 내게 돈을 주지 않으셨다. 너무도 투명한 어머님의 행보에 웃음이 나왔지만 마음만은 편안했다. 이제는 그 불편한 마음을 내 안으로 들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준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만족, '에고'를 달콤하게 살찌우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줄 때는 실은 조심해야만 한다.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준다는 행위 자체가 에고에게 '만족'이라는 힘을 계속 실어주기 때문이다. 


 주는 행위를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편을 선제적으로 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준다는 행위로써 자신의 모든 양심에 반하는 마음들을 중화시키고, 받는 상대에 대해 우월한 위치를 선점하게 함으로써 자기는 '더 나은 사람'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다. 그러한 등가 치환 행위로 자신의 마음은 편해진다. 스스로 보상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힘든 것은 '받는 것'이다. 무언가를 마구 퍼주는 그 사람으로 인해 상대는 마음의 부담을 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는 마음이 순수하지 못할 때에, 받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주는 것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 어떤 베풂도, 주었다는 마음 자체를 잊어버려야만 진정으로 준 것이다. 그래야만, 받았다는 마음 자체가 생겨나지 않게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진정으로 주는 것이다. 





필자의 낯설게 보기 다른 글


* 본문 그림들 : Edvard Munc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