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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Mar 15. 2024

유럽은 선이고 자유고 진보라는, 사이비

인종차별과 프랑스 그리고 유럽


 나를 아는 것은 모든 것의 출발이다. 나를 모르는 것은 모든 것을 그르친다. 나를 알려면 ‘나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길고 지난한 여정이다. 목숨을 바쳐야만 끝이 날까 말까 한다. 우리가 대면하고자 하는 그것은 인식의 뿌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날것으로 다가와 삶의 뿌리를 흔든다. 당신은 가격 당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쓰러진다. 진실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그것을 직시할 때만 울타리 밖의 나를 볼 수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의 진실’이 보인다.
 
 사이비의 뜻은 맹종, 맹목적인 믿음을 뜻한다. 우리는 사이비가 종교에 국한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많은 건강하지 않은 것들에 ‘중독’되어 있고 그 중에 가장 위험한 중독은 ‘맹종’이라는 믿음의 중독이다. 그것은 모든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키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때로는 스스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망상 속에 함몰되게 한다. 진정 가치로운 것에 대한 믿음은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믿음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매거진은 지금까지 ‘당연한 거라 생각해온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성찰해보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할 것이다. 오늘은 그 첫번째로 ‘유럽중심주의’라는 맹종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럽은 선이고 자유고 진보라는, 사이비
 
 한국인 청년이 파리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뉴스를 봤다. 철마다 나오는 너무나 흔한 이야기.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와 유럽의 진실을 눈치는 채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을 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대면하기를 원하기에.
 
 이 얘기를 하자면 먼저 나의 지난 브런치 시절을 소환할 필요가 있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던 나의 브런치 초기 글들. 모두가 '파리의 로망'을 말할 때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던 내 이야기들. 프랑스와 유럽의 허위를 직시하게 하는 나의 글들은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그것은 나의 경험과 삶을 통해 얻어진 통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명한 반란군 같던 나의 글들은 "프랑스를 미화하는 글이어야 팔린다"는 답과 함께 출판사에서 거부되었다. (실은 계약금 입금 후 엎어졌고, 5대 출판사에서 끝까지 고심하다 반려됐다) 진보의 탈을 쓴 지식인들의 말만 무성한 비겁함과 요란함을, 선민 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그들만의 오만한 정의를 모르지 않았다. 유럽중심주의라는 사대주의가 얼마나 우리 삶에 뿌리깊이 들어와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말하는 '진짜 지성인'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한국 총선을 보며 말해주고 싶은 것들이 참 많다. 저 블랙 코메디 같은 정치판과 그것에 세뇌된 것을 넘어 사유의 힘 자체를 잃어버린 많은 ‘깨어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한국 좌파의 본체가 프랑스 좌파고 프랑스 좌파의 뿌리는 인정사정 없던 광기의 학살극을 벌인 자코뱅과 코뮤니스트(공산주의)들에 있음에도 그들의 폭력적 광기는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건강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유럽발 진보 정신'이 현재의 모든 '정의를 앞세운 극단성과 폭력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또 다른 권력이고 군림이며 기득권일 뿐이라는 것을. 비례 1번을 종북 인사로 세워도 문제될 게 없다는 좌파 기득권의 위험한 생각의 뿌리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진보라는 말이 지닌 함정에 매몰되어 있다. 우리는 진화가 필요한 것이지 진보가 필요한 것이 아님에도. 그것이 또 다른 프로파간다로써 대중을 선동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에 눈 감은 채로. 왜냐하면 유럽에는 '진정한 진보'가 없기 때문이다. 유럽은 낡은 생각과 낡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죽어있는 땅’이다. 합리주의는 감정을 억압하는 위험한 방식이기에 유럽인들은 ‘상처받은 내면 아이’로 자라 행복하지 않은 성인이 된다. (프랑스 학계에 이미 많은 연구와 논문이 있다) 그들 문화가 차가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심장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것이 온기를 잃게 했기 때문이다. 머리로 하는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이 향정신성 약물(우울증약)을 가장 많이 복용하는 나라 중 하나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유럽중심주의는 아름다운 원주민들의 고유성을 파괴하고 말살했다. ‘유럽이 우월하다’는 말은 반드시 ‘비유럽은 열등하다’가 성립되어야 하기에 폭력적이다. 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 식민지배가 끝난 지금도 불어를 모국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보는 건 가슴 아프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말함으로서 본래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이 내상을 입는 것이기에 진실로부터 멀리있다. 콩코인은 콩고어를 말할 때 가장 ‘나 자신에 가까운’ 존재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영혼에 새겨진 고유한 코드이기에.
  
 우리가 유럽에서 ‘생기'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유럽의 정신은 ‘자연’에서 온 것이 아니며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이성주의 강박’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이성적 사고’를 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끝도 없는 AI 같은 말장난을 늘어놓으며 계속해서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 모습은 합리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언제까지 니체가 카뮈가 저 현학적인 서향철학자들이, 어려운 말장난으로 거들먹거리는 저들이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어야 할까. 힘을 가진 저들의 시대는 이제 그들이 이빨 빠진 고양이였음이 판명나면서 저물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거기로부터 구걸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모두가 착각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제 식민사관으로 스스로를 열등하다 믿는 정체성을 새겼듯, 유럽인들 또한 제국주의사관으로 자신들만 우월하다 믿는 정체성을 새겼다. 똑같은 ‘우민화 교육’이다.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한 채 무조건 유럽을 찬양하는 것은 무지로부터 온 사대주의다. 유럽의 식민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고 ‘유럽=선’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된 것은 인류에게 큰 비극이다. 유럽은 나찌 뒤로 숨은 비겁자들이다. 유럽이 지금처럼 ‘우아한 나라’가 된 것은 전적으로 식민지 착취와 학살로부터 왔다. 철저한 군국주의 정책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프랑스는 없다. ‘힘의 논리’를 벗어난 ‘아름다운 프랑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 살며 계속 실망하고 물음표를 던진 모든 지점을 따라 프랑스 역사를 파헤쳐 본 적이 있다. 프랑스의 야만적인 진실 앞에 나는 경악했고 그것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책으로 꼭 내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은 19세기가 아니다. 이제는 ‘진보의 탈을 쓴 비겁한 프랑스와 유럽’의 민낯을 모두가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프랑스는 미식의 나라도 아니고 예술의 나라도 아니다. 그것들은 ‘선전’이다. 프랑스 문화는 ‘로컬’이다. 인식의 균형이 크게 깨져 있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사실 많이 늦었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미래는 유럽에 있지 않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무력으로 획득한 과거의 영광을 놓지 못하는 정체되어 있는 정신에 인류의 미래가 있을 리 없다. 인류의 미래는 그 반대 ‘힘있던 그들’에 의해 짓밟히고 부서졌던 마음, 그럼에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기개, 모든 새로움 앞에 말갛게 웃음 짓는 열려 있는 정신에 있다. “유럽인들은 기술이 있는 미개인이자 지적인 야만인이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칼융이 아메리카 인디언을 만난 후 한 고백이다. 나의 생각인줄만 알았던 이것을 그가 말해줘서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유럽에 오래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목소리가 작기에 힘이 없기에 그 목소리가 잘 전달되지 못했던 거 뿐이라는 것도.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에 매몰된 채 제국주의 버릇을 고수하는 유럽은 인류의 미래를 이끌어갈 자격이 없다. 자신들도 무의식적으로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양심은 누구보다 자신들의 추한 모습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척 간신히 버티고 있던 힘이 바닥을 드러낸 것, 그것이 지금의 유럽 모습이다. 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프랑스나 유럽행을 선택하겠다는 친구들을 말린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다면 차라리 미국에 가라고 권한다. 미국와 유럽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미국은 열려있고 유럽은 닫혀있다. 미국은 Yes의 문화고 프랑스는 No의 문화다. 미국은 잠재력을 개발하게 하지만 프랑스는 잠재력을 말살하는 교육을 한다. 왜 그럴거 같은가. 프랑스의 고고하신 ‘시민 정신’에 답이 있다.
 
 교육 목표가 ‘무난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기에 튀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당연히 천재가 나올 수 없다. 낡은 시스템과 낡은 철학으로 모든 게 돌아가는 늙은 땅. 미국에서는 수도 없이 나오는 천재가 프랑스나 유럽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프랑스 남편을 따라 프랑스에 사는 미국 아내들은 다시 미국으로 많이 돌아간다. 너무 많은 것이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알제리 200만명 대학살을 자행한 프랑스는 독일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여전히 아프리카의의 고혈을 뽑아먹는 프랑스는 인권을 올릴 자격이 없다. 여전히 식민지에 진짜 사과를 하지 않는 프랑스는 자유를 말할 자격이 없다. 잔학한 식민지 경영과 학살로 전 지구를 휩쓴 것도 모자라 여전히 ‘라떼 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프랑스와 유럽. 뼛속까지 우생학으로 가득 차 있는 땅. 1884년 프랑스 총리 쥘 페리는 식민화를 주장하며 프랑스 하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좀 더 큰 목소리로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수한 인종들은 열등 인종들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수한 인종들은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수한 인종들에게는 열등 인종들을 문명화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제국은 16세기에 시작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영국과 프랑스와 유럽은 한때 지구땅의 84%를 소유했다. 400년간 유럽이 어떠한 생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고 대하였는지는 저 말에 선명하게 나와있다. 유럽인들 무의식 속에 그것이 왜 뿌리깊이 자리할 수밖에 없었던가를 말이다. 인종차별 개념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표적인 '분열 정책'으로 유럽의 식민지배 정당화를 위해 '만들어진 프로파간다'이다. 서로를 증오하게 하고 이간질 시켜놓음으로서 지배자들은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들은 식민지로부터 부를 축적하고 제1권력자가 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 국민들이었다.
 
 오만한 ‘문명화’의 뿌리가 저 근거 없는 우생학이라는 것. 그 낡아터진 헤게모니가 아직까지 이 시대의 전면에 있다는 것. 미래 세대에게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사대주의란 개념에 유럽만 쏙 빠져있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도.

'나의 진실'을 가릴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진실을 헛소리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필자의 현 구독자수를 만들어준 '서랍 속의 (역작)'





필자가 프랑스에 살며 직접 경험한 '험한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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