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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Feb 15. 2021

동양인이 프랑스에서 겪는
'흔한 봉변' 인종차별

프랑스의 인종차별 1편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행복한 프로젝트입니다. 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 배경이 된 사전 정보를 제공해드리고자 합니다. <프랑스 낯설게 보기> 단초가 된 저의 초기 프랑스 이야기들입니다. 오늘부터 2주간 2일씩 묶어 올리고자 합니다. 프랑스의 인종차별/ 프랑스인들의 제국주의/ 프랑스인들의 자기중심성/이상한 똘레랑스/프랑스인들의 이성숭배/무력한 엄마/ 6개 챕터로 진행합니다.

프로젝트 최종 내용은 '치유'입니다. 그러나 치유가 일어나기 이전 '아픔'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 아픔이 탄생한 이야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갈 곳이 없던 제게 '쓸모 없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증폭시켜준 프랑스에서의 시간들입니다. 수많은 삶의 한 조각으
로, 저의 프로젝트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담없이 편하게 보시면 됩니다. 본글들은 2019년에 쓰였습니다. 
 



 피부색이 하얀 것과 조금 누런 것과 많이 검은 것. 그깟 피부색이 뭐가 중요하다고.
 
보통은 그렇게들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가지는 우리 무의식 속의 힘은 생각보다 매우 세다는 걸 알 수 있다. 더구나 이질적인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내가 서있는 땅의 말을 못 할 때' 그곳이 프랑스일 때, 그것은 괘씸죄가 추가되어 무시받기에 매우 쉬운 입지를 가지게 됨을 의미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오후, 여느 때처럼 유모차를 끌고 나가 빵을 사고 장을 본 후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었다. "쏴...."  유모차를 끌고 있던 내 머리 위로 물벼락이 떨어졌다. 물이 쏟아지면서 들려온 말 "야! 중국년! 시원하지?... 크크크"  어디선가 어린 남자아이들 소리가 들려왔다. 

'
잠깐, 이건 뭐지?'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인종차별적 봉변을 당한 거란 것을. 
 
아기를 살폈다. 다행히 아기는 젖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몇몇 집들의 발코니가 보였다. 매일 지나다녔지만 그런 오픈형 발코니가 있는 곳 밑으로 지나는 건 줄은 처음 알았다. 열불이 올라오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일단 한국말로 뱉고 보았다.
"야! 거기 누구야!" 그러나 이미 아이들 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씩씩대며 고자질을 했다. 남편은 내게 '운이 나빴다'며 '자기가 대신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분은 안 풀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 동네 슈퍼에 장을 보기 위해 막 집을 나섰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어떤 말이 들려왔다. "야! 중국년! @#$%&... 킥킥킥" 내가 뒤돌아보려던 순간, 그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밀치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네다섯 명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멍 때리는 동안 아이들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 녀석들 뒤통수에다 대고 무슨 욕이라도 한마디 해주면 좋았으련만.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프랑스 욕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수가. 그나마 당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던 말이 '중국년' 하나밖에 없었던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프랑스 욕'을 센 순서대로 몇 개 알려달라고 했다. 남편은 같은 말을 했다. '또 운이 없었네. 미안해' '근데 그런 말은 안 배우는 게 낫지'라며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인종차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세 명이 또 있다. 한 명은 동네 빵집 아줌마, 다른 한 명은 동네 채소가게 아저씨, 나머지 한 명은 동네 백인 할머니. 처음엔 그들이 내게 보내는 '어색하고 기분 나쁜 공기'의 실체가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 번 계속 마주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내뿜는 것이 '그거'였다는 것을.
 
그 빵집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깝고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파는 곳이었다. 체구가 좋은 백인 아줌마는 손님들이 빵을 살 때면 언제나 '친절한 미소'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나에게만 빼고. 내가 빵집에 들어서면, 아주머니는 앞 손님에게 날리던 미소를 싹 거두며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대했다. 처음엔 '내가 말이 서툴러서 짜증 나나?' 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채소가게 아저씨는 또 어떨까. 동네에 있는 유일한 채소가게인 데다 엄선된 질 좋은 제품만을 파는 가게. 채소와 과일은 웬만하면 시장에서 사 왔지만, 살림을 하다 보면 갑자기 필요한 것도 있고 빼먹고 못 사 온 것도 있다 보니 자주 가게 되었던 집이다. 역시나 주인아저씨는 백인.


 

가소롭다고 해야할까, 저들의 오만과 무지를 

 

앞 손님들과 허허실실 농담을 하던 아저씨는 내가 문을 들어서는 순간, 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면 언제나 '내가 너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기분 나쁜지'를 숨길 수 없는 마음으로 보여주곤 하였다. "저거 주세요" 할 때마다 굳이 "뭐라고요? 못 알아들었어요" 라며 내 '비네이티브 발음'을 콕 짚어주던 아저씨.
나와 마주칠 때마다 인상을 쓰곤 하셨던 동네 백인 할머니는, 내가 '백인 남편의 아내'라는 걸 아신 후부터 나에게 꼬박꼬박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셨다. 그 부분은 가히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가장 나를 맘 상하게 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아이 학교의 같은 반 친구 엄마들게서 그런 공기를 느꼈을 때였다. 
 
 프랑스 학교는 매일 아침 매일 오후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기 때문에 늘상 부모들을 마주치게 된다. 더구나 아이 학교는 매우 작은 학교였기에 거의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알았고 항상 따뜻하게 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록 매일 보는 나에게 그 흔한 봉주르 한마디를 하기는커녕 내 쪽을 '아예 쳐다도 안 보던' 엄마들이 몇 있었다. 시크함 풍기는 세련된 금발을 가진 백인 엄마들이었다. 바로 앞에서조차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 엄마들 마음이 읽혔다. 이 역시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 중 한 엄마와 처음으로 인사를 한 건, 입학 후 3년이 지나 같은 반 다른 엄마 집에서 마주쳤을 때였다. 그때도 그 엄마는 내게 사무적인 인사만 했을 뿐 여전히 차가운 공기를 선명하게 풍겼다. '차도녀' 느낌 확 나는 금발 머리 여자를 볼 때마다 지금도 그 엄마가 내게 전해주었던 느낌이 가끔 떠오른다. 여기는 중국이나 인도가 아닌 유럽, 그것도 프랑스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모종의 일들을 겪을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황당함과 불쾌함은 언제나 물음표로 끝나곤 했다. 

'피부가 하얗지 않으면 열등한 종족이라는 너희의 편견은 어디로부터 왔지?' '그래서, 누가 백인 너희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지?' '너희들이 누리는 부가 어디로부터 왔지?' '이 행성의 주인 행세를 하는 너희의 잔인함이 무얼 낳았지?' 
  
하지만 그 물음표는 언제나 '우리들만의 물음표'로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자기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믿는, 백인들의 무의식 깊이 새겨져 있는 오만이 얼마나 깊고 굳건한지도.  



프랑스의 인종차별 2편

프랑스에서 가장 '비천한 계급', 말 못하는 동양인
 

 빵집 아줌마, 채소가게 아저씨, 동네 할머니, 그 중학생 놈들.

나에게 인종차별이란 것을 몸소 체험하게 해 준 그들과의 에피소드는 비단 나뿐만이 아닌, 그냥 이 땅에 사는 '프랑스 말을 잘 못하는 동양인' 또는 '서방국가에 사는 동양인'에게는 흔하게 일어나는 생활의 한 부분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당시 알고 지내던 한 한국인 친구는 유모차를 끌고 집 앞에 잠깐 나갈 때조차 늘 잘 차려입고 나갔는데, '뭘 그렇게까지 챙겨 입고 나가'라는 나의 말에 이렇게 답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얘네들이 무시해요. 그나마 잘 차려입고 있으면 나아요"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동네를 다닐 땐 '막 입고' 나가고 심지어 맨 얼굴로 나갈 때가 더 많았지만, 그 친구의 그 말은 수긍이 되었다. 
 
 프랑스는 아니지만 당시 스위스에서 생활하던, 그것도 고액 연봉을 받는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친한 동생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을 때에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제가 여기서 학술지 발표를 하는데 애들이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예요" "왜?" "제 영어 발음이 아라비아어 같다나요. 하하하..." "동네 빵집 갈 때마다 아저씨가 저만 오면 어찌나 티를 내며 기분 나빠하는지.. 근데 빵집이 거기밖에 없어서 계속 가요..하하하..." 
 
그 동생은 하물며 키도 크고 수려한 외모를 소유한 명문대 출신 박사로 한국에서는 언제나 환영받는 게 익숙했던 데다 마음씨까지 고와 모두가 좋아하는 친구였다. 그러나 그 인종차별 장벽은 외모나 스펙과도 인성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서운 장벽'이었던 것이다. 그 친구가 겪고 있을 쓸쓸함이 무언지 너무 와 닿아 참 속상했다. 
 
그렇게 소소한 에피소드로 넘어갈 줄 알았던 나의 인종차별 경험 또한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종합병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접수창구가 여러 개 있었고, 예약을 하고 갔음에도 창구에 늘어서있는 긴 줄을 기다려 여러 서류를 제출하고 접수해야 했던 날. 여름이었고 사람이 매우 많았고 에어컨 시설이 없는 병원 실내는 불쾌지수가 높았다. 내 차례가 왔다. 체구가 큰 여자가 창구에 앉아있었다. 나는 남편이 알려준 순서대로 서류를 제출하였다. 
 
서류만 제출하면 다른 할 일이 없다고 전해 들었건만, 갑자기 그 여자가 내게 아주 긴 문장을 몇 개 휘리릭 묻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말은 불어 왕초급이던 내겐 너무 빠른 속도였다. "죄송한데 말이 너무 빨라서 잘 못 들었어요.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있어요?" 그러자 그 여자는 다짜고짜 내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긴 문장으로.


서양국가에서 가장 세력이 없는 '아시안'은 최종 샌드백이 된다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 채로 멍청하게 서있었다. 엄청난 짜증이 섞인 걸 넘어 분노 수준의 감정을 실어 말을 하자 나는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저 여자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지만, 그 당시 나는 그 '무식'에 순간적으로 대응할만한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급하게나마 본능적으로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그제야 그 여자는 진정을 하였고 접수를 끝내었다. 내 뒤로도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있었다. 얼떨떨함을 안고 일단 그 자리를 나왔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간단한 한 두 마디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를 그냥 나온 것이 실은 언어 능력이라기보다, 내가 이 나라 말을 잘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온 '주눅듬'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료가 끝나고 병원을 나서려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 나에게 '무식함'을 퍼부은 여자에게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얘기를 꼭 해주고 가야만 할거 같았다. 그 여자는 다혈질일 것이고 더운 날 사람들 바글거리는데 나 같은 말이 어눌한 동양인 몇 명을 상대하며 이미 짜증이 나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나는 병원 한쪽에서 수첩을 꺼내 그 여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달달 외웠다. 내 입에서 유창하게 나올 때까지. 
 
 그리고 다시 접수창구에 가서 줄을 섰다. 그 여자가 앉아있는 줄로. 내가 다시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본 여자는 뜨끔했는지 이번엔 저자세가 되어 나를 멀뚱이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요"  그 여자는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저기로 오시죠"라며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사람들 앞에서 챙피하기 싫다는 거였다. "아뇨. 그냥 여기서 할게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자기가 가리켰던 구석자리로 가버렸다. 그 앞에 나있는 문을 열며 나를 들어오라고 하였다. 김이 새긴 했지만 할 말을 하고 가면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고 싶은 말 하세요" 여자가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되게 귀찮게 하네'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말을 시작했다. 그 여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가 다시 온 이유는, 당신이 내게 한 행동이 부당했음을 얘기해주기 위해서예요. 당신이 스트레스 상태였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당신이 내게 한 행동은 정당하지 못했고 심지어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이었어요. 당신은 당신 행동에 대해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해요. 나는 당신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야겠습니다"
 
여자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계속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다시 말했다. "알겠어요. 그러니 나에게 사과하세요" 그 여자는 또다시 다른 말들을 늘어놓으며 자기 합리화를 시켰다. "알겠어요. 사과하세요" 그 여자의 변명 놀이는 그대로였다. 나는 다시 한번 목소리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나의 집요함에 여자가 지쳤다는 듯이 말했다
"Sorry....." 불어로 하면 될걸 웬 영어? 심지어 그 여자는 갑자기 공손한 자세로 서있기까지 했다. 됐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병원을 나왔다. 마음이 상쾌했다. 그동안 당했던 다른 것들까지 전부다 보상을 받은 것만 같았다.  

 
그렇다. 나 자신은 내가 지켜야지 누가 대신 지켜주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언제나 내가 스스로 당당해야지만 상대로부터 존중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하였다. 




1884년 프랑스 총리 쥘 페리는, 베트남과 튀니지의 식민화를 주장하며 프랑스 하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좀 더 큰 목소리로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수한 인종들은 열등 인종들에 대해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우수한 인종들은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수한 인종들에게는 열등 인종들을 문명화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제국은 16세기에 시작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를 선봉으로 한 유럽은 한때 지구땅의 84%를 소유했다. 400년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어떠한 생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고 대하였는지는 이 말에 선명하게 나와있다. 유럽인들 무의식 속에 그것이 왜 뿌리깊이 자리할 수 밖에 없었던가를 말이다. 

인종차별 개념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표적인 '분열 정책'으로, 유럽의 식민지 정당화를 위해 '만들어진 프로파간다'이다. 서로를 증오하게 하고 이간질 시켜놓음으로서 지배자들은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인종 차별 개념이 생겨남으로서 이익을 얻은 자들은, 식민지로부터 부를 축적하고 제1권력자가 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 국민들이었다




* 한국 또한 차별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에 내재한 보편적인 추악한 본성'인 반면 유럽의 그것은 '유럽만 우월하고 나머지는 열등하다는 세뇌'에서 출발한 제국주의 관점과 연결됩니다. 유럽의 차별이 위험한 건, 인간의 본성을 넘어선 '사회적 역사적 합의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인종차별 3편


프랑스인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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