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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Mar 16.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다시 만난 무라카미 하루키

무게 잡고 영화 리뷰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영화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누군가에게 감히 "가르칠"만한 소양은 없다. 그저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맥락 없는 잡담이다. 와인을 마실 때 포도가 품종이 어쩌고저쩌고, 어느 지역이 어쩌고저쩌고, 몇 년산이 그때 포도밭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고 그저 "향기롭다"라고 마셔도 되지 않을까. ≪드라이브 마이 카 (2021)≫를 보며 지금 내 나이, 내 상황에 알맞은 맛을 느낀다. 심지어 그게 작가나 감독의 의도와는 영 다른 방향일지라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생 때 읽은 ≪상실의 시대 (1987)≫였다. 당시 난 독서부에 있었는데, 누군가 (담당 선생님이었을 수도 있고) 그 책으로 독서 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난해한 책이긴 했다. 작중 시대 배경이 '우리 때'보단 훨씬 더 옛날이었던지라 기저에 깔린 '시대의 상실'에 고등학생이 공감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말이다. 그렇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아마 고등학생에게는 너무 '야한' 책이었기 때문인 것 한몫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 사전에서 'sex'라는 단어만 가지고도 얼굴이 (그리고 아래도) 발그레 해지곤 했던 나이였다. 그런 나에게 ≪상실의 시대≫는 충격적인 책이었다. 그러나 인상 깊었던 건 그렇게 야한 장면이 많은데도 책을 덮고 나면 허무한 느낌만 남고 야하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든다는 점이었다. 잘 알진 못해도 이런 게 잘 쓴 책이라는 걸까 싶었다. 아무튼, '중2병'을 곁들여 음미하기에는 좋았다.


허무라는 '중2병'을 가지고 가 나는 토론 때 감상을 말했다. 사실 주인공이 사기적이지 않느냐고. 물론 이런저런 상처가 있는 건 알겠는데... 알아서 여자들이 꼬이고 섹스하고는 또 알아서 훌쩍 떠나버리고. 질척거리는 연애의 과정도 없이 남자는 그저 허무감에 빠져 X폼만 잡고 있으면 되는데, 솔직히 그거 남자 입장에선 완전 '땡큐'인 판타지 아니냐고. 독서부 담당 선생님은 여자분이셨는데, 그 말을 듣고 잠시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똥그랗게 뜨고 계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당시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발령받으셨던 (유능하셨구나...) 분이니 아마 25살 '밖에' 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선생님도 '애'셨다.


어쨌든 무라카미 하루키를 난 완전하게 공감하지 못했다. 하루키는 고등학생 때 내가 쓰고자 했던 페르소나론 맞지 않기도 했다. 허무주의적 또는 타나토스적 섹스는 흥미롭긴 하지만 입시엔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 당시 나의 롤모델은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1998)≫의 여주인공 '미야자와 유키노'였다. 재색겸비의 엄친딸. 그러나 그녀의 재능은 보이지 않은 곳에서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였다. 그 작품에선 남주인공 (아리마 소이치로)도 엄친아다. 그런데 왜 여주인공을 롤모델로 삼았느냐면 그녀의 집이 '서민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쥐뿔도 없는 (?)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하며 노력했던 악착같은 면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듯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되고자 했다 (아마 그때 오타쿠도 된 게 아닐까...). 남주인공도 매력적이긴 한데, 따져보면 사실 좀 재수가 없는 면이 있다. '거의'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여주인공이 할 일이 없을까 봐 뭔가 부족한 거랍시고 준 게 가정의 비밀사 어쩌고저쩌고... 그것도 결국 결말에 가선 해결되고 그만일 테니깐 여주인공으로선 완전 '땡큐'이지 않나. 참나 내가 여자여도, 아니 남자여도 그런 사람이 나 좋다 하면 결혼하겠다. 아무튼, 그런 남주인공보단 여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내가 비록 色은 많이 모자라서 안 되지만, 才는 여주인공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땐 적어도 내가 내 인생에서만큼은 '주인공'이 되는 줄 알았다.


헌데, 알고 보니 엄친딸, 엄친아들은 실제로 있었고 의대에 있었다. 才는 뭐 기본이고... 色도 겸비한데다 알고 보니 집안도 빵빵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세상이 뭐가 이런가 싶었다. 연애도 하루키스럽기는 커녕 (물론 그래도 문제다) 그냥 연애 자체를 못 했다. 슬프게도 난 청춘로맨스물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N'일 뿐이었다.


이성에게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던 대학생 땐 물론 연애심리 책(불쏘시개라곤 하지만 한번 읽어보면 재미는 있다)도 많이 봤지만, '도대체 사람의 매력이란 무엇인가?'에 많은 관심을 두고 책을 찾아보곤 했다. '미인의 기준은 보편적인가(본능인가)? 학습되는 것인가?' 같은 것이다. 그런 걸 읽어도 어차피 내 인기가 별로 없는 건 변함 없었지만, 재미는 있었다.


서른이 되었을 때 난 목표를 '미중년'으로 잡기로 했다. 어차피 '미소년'이나 '미청년'이 되는 건 글렀다는 현실파악은 진즉 했고, 매력적인 중년이나, 뭐 그것도 정 안 되면 말년에 '미노년' 정도는 어찌저찌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 나이대의 매력을 결정하는 건 외모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살아남아서' 적당히 향기로운 연륜을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나 요즘은 그저 그냥 늙어버렸음을 느끼고 있다. 물론 원로 교수님 앞에서는 야단맞을까 봐 이런 얘기할 순 없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나이는 계속 먹는데 길을 잃은 기분이 자꾸 드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완연한 봄 햇볕에도 까닭 없이 눈시울이 붉어지고 울대 근처가 간질간질한 걸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나이를 먹어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있기나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아직 '연륜'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며 일단 '무라카미 하루키? 아직 살아 계셨어?'가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에게 '또' 허무를 남기고 사라지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게 남주인공에게 허무'만' 남기는 건지 아니면 뭐라도 의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문외한인 나는 해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저씨. 우리 그냥 살아가요. 운명이 내린 시련을 참고 견디며...
(중략)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 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알아주실 거예요.
 그때가 되면 우리는 드디어 편히 쉴 수 있겠지요.


라고 말하는 장면(수화로 진행되어 고요 속에서 감정만 들린다)에서 같이 눈물 흘리면 영화 한 편 잘 봤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 느끼는 하루키의 허무는 분명 어릴적의 그 허무와는 빛깔이 달랐다. 영화는 감독의 색깔이 들어가겠지만, 내가 느낀 빛깔을 보여주는 듯해서 좋았다.


인생은 계속 살아가는 것일 뿐인가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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