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상으로는 마지막 퇴사 일기가 되어야 할 2월 28일이지만, 나에겐 가장 최근의 기억이고 꽤 생각할 거리가 많았기에 잊기 전에 먼저 남겨본다.
아버지의 실직 (사직?) 후 연이은 사업 실패로 부모님은 재기할 수 없는 큰 손해를 입었다. 이 상처는 내게도 큰 흉터를 남겨놓았고 지금도 종종 아린다.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는 직업은 반드시 '안정적'인 걸로 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잠깐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정년이 보장 안 되면 다 소용없다며, 아버지를 보라고... 장래 희망 같은 건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고 난 뒤에 '취미'로 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 뭐가 '안정적'인 거냐는 거다. 아버지가 잠깐 계셨던 곳도 대기업이었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설마 삼성전자가 망하겠어?' 했는데, 진짜 부도난 게 당시 상황이었다. 결국, 어머니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공무원'이었다. 공무원 열풍은 남들보다 좀 더 일찍 우리 집에서 발생했다.
한데, 지금 난 의사를 하고 있다. 공무원 하려다 갑자기 의사가 된 과정은 운명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의사 집안도 아니었기에 나와 어머니는 '의사'가 굉장히 막연한 느낌이었다. 사회통념처럼 의사가 '그냥(?) 돈 많이 번다더라'라고만 알지, 의사가 어떻게 '일하는'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공무원이라는 직업도 마찬가지로 잘 몰랐다). 의사가 앞으로 망할 거라는 저주(?)도 20여 년 전 그때도 이미 있었다. 어머니는 불안했다. 의사가 과거에 잘 나갔다지만, 내가 의대 가서 의사 되는 건 거의 10년 뒤일 테니 말이다. 미래에 어떻게 되건 말건 당장 꼬박꼬박 나가야 하는 등록금과 학비도 큰 부담이었다. "의대 합격을 '좋은 경험 했다 치고' 포기한 뒤 공무원 시험 쳐서 바로 공무원으로 일하는 건 어떻겠니? 아들 머리 좋으니깐 크게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울었다. 내가 그때 울지 않았다면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의사 하는 대신 무조건 대학병원에 남아 있기로 합의(?)했다. 끝내 '안정성'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땐 몰랐다. 대부분 의사가 '프리랜서'로 산다는 것을.
"뭐하러 대학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었어요? 펠로 1년, 길어야 2년 하고 탈출하는 게 보통인데?"
로컬 병원 면접 때 원장님이 내 이력서를 보더니 툭 던지듯 물어보았다. 로컬에 나오면 의미 없는 시간이 되어버리는 경력에 대한 비웃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어디부터 얘기해야 좋을지 몰랐다. "대답을 드리자면 제가 학생 때 이야기부터 해야겠군요"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난 이렇게 답했다.
"제가 성격이 우유부단합니다, 원장님. 직장을 여기저기 옮기는 걸 스트레스 많이 받는 성격이라 보시다시피 한 곳에서 진득하게 근무했습니다. 이제 이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니 오랫동안 일할 겁니다."
어떤가? 이 정도면 원장님께 85점 정도의 답변이 되었을까? 일단 원장님은 웃으셨다. 어차피 이 대답을 못한다고 탈락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한 들 계약서에 적힌 계약 기간은 1년뿐이다. 원장님께서 오래 일할 사람을 원한다고 하시고 나 또한 오래 근무할 직장을 원하지만,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당장 내년엔 또 어디에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심지어 나라는 존재가 미래에도 있을지도 확률일 뿐.
로컬 병원 정식 근무 전 근무 관련 인계 및 교육을 받아야 해서 몇 번 병원을 방문해야 했다(대학병원에는 휴가를 낸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로컬 병원이 대학병원에서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걸 느낀다. 다르다는 건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다. 좋았던 건 로컬병원의 진료 방식이 사람들의 편견처럼 '과잉진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 돈 좀 더 벌어봤자 환자가 과잉진료 당했다고 생각하면 다음부턴 안 오기 때문이다. 페이 닥터에게 '무리수'까지 강요하지 않는 건 환자에게도 좋을 것이다. 물론 실적 압박은 있는 모양이고 따라서 '영업'은 해야 했다. 병원에 손해를 입히고 있어도 월급은 따박따박 들어오는 대학병원 때와는 아무래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별로였던 건 정식 근무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주말도 일하고 공휴일에도 일하는 곳이다. 월급은 대학병원보다 많지만, 훨씬 더 많이 근무하기 때문이면 가치관에 따라선 별로일 수도 있겠다. 내가 시급으로 계산해보니 대학병원이 더 높긴 했다. 내 기억 속 대학병원 근무는 굉장히 빡빡했는데, 그것보다 더 빡빡하다고? 기분이 뭔가 묘했다.
하지만, 의사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대학병원 탈출은 지능 순"이라고 했다. 로컬 병원에서 근무하는 게 몸은 몰라도 마음이 편하다고. 과에 따라선 몸도 편할 수도 있다. 나도 이젠 대학병원을 나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직은 두렵다. 대학병원의 '후광'이 없어도 환자들이 나를 좋아할지, 내가 '영업 체질'인 건 맞는지 모두 시험해본 적 없다. 새 직장의 출근 날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대학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치 현재 나의 미련에 대한 대답 같았다. 요약하면 인생엔 오직 플랜A만 있다고 생각하라는 내용이다. 돌아갈 곳(플랜B)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고. 내 상황에 적용해보면 대학병원에 계속 있으려고 했다면 로컬로 나오지 말았어야 했고, 이젠 로컬로 나왔으니 다시 돌아간다는 옵션은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니! 생각이 아니고 정말 없다. 내가 나온 문은 안에서 잠긴다!
2월 28일. 대학병원의 마지막 출근 일이다. 알고 보니 사실 나처럼 이렇게 빡빡하게 근무하는 경우는 잘 없다고 했다. 올해 로컬로 나가는 다른 과 선생님들은 지난주에 이미 병원을 떠났다. 일주일 정도의 개인 시간은 잠시 휴식하거나, 이후 근무할 로컬 병원으로 가서 적응하는 데 쓰거나 할 것이다. 어쨌든, 나가는 사람에게 28일까지 출근시키는 대학병원 의국도 너무하고, 처음 출근을 3월 1일에 하는 로컬 병원도 흔하진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어지간하면 두 고용주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 뭐 어쩌겠나 하는 게 내 생각이라 그건 괜찮았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날 기분을 망친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마지막 날의 계획은 점심때까지 있는 것이었다. 외래 진료는 없는 날이었지만, 점심에 새로 오실 선생님. 나가는 선생님. 교수님이 모여 잠깐 인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새로 오는 선생님이랑 나가는 내가 도대체 뭔 상관이 있나 싶은 건 둘째치고, 인사도 이미 이전에 몇 번이나 할 만큼 했는데 뭘 또 하나 싶었다. 새로 오실 선생님과는 하도 얼굴을 자주 봐서 절친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도 꽤 미련이 많은 사람인지라 (혹시 대학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싫은 내색은 하지 않고 까짓 거 점심까진 있어 주기로 했다. 오전엔 내 자리 짐 정리를 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내게 마지막으로 커피 한잔하자고 하시며 카페로 오라고 하셨다. 짐 정리를 하다 말고 부랴부랴 내려갔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교수님께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오늘 동물 실험이 있는데... 이게 좀 손이 필요해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유종의 미를 거두셔야죠."
동물 실험은 쥐를 잡는 (해부) 것이었다. 다른 날은 놔두고 왜 하필 오늘 쥐를 잡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실험 계획상 어쩔 수 없이 오늘이 잡는 날이 되었을 거라는 걸 나도 알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연구가 아니다. 교수님 연구이고 논문을 써도 교수님 이름이 들어가지 내가 제2 저자로도 들어가지 않는다. 어차피 로컬에서 돈 버는 사람에게 실험 논문은 무의미하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부탁인데, "딱 한 시간만 도와달라"고 하시니 냉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알겠다고 했다. 그래 이 정도는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도와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쥐 잡는 시간이 3시부터라고 했다. 네? 그럼 끝나면 4시란 말인가. 이쯤 되니 비로소 나도 약간 기분이 언짢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처음부터 받아주지 않았을 텐데...
점심에 어쩌고저쩌고 의미 없는 인사를 마치고 어정쩡하게 붕 떠버린 3시간을 보낸 뒤 동물 실험실로 갔다. 연구 내용은 말할 순 없지만, 아무튼 실험 쥐들은 오늘 결과를 보기 위해 다 해부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쥐가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교수님이 직접 해부하시지만 혼자 하시기엔 감당이 안 될 정도라 부득이 가는 사람에게도 부탁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화가 나긴 하는데, 입 밖으론 나오기 어려운 정도로 애매하여 대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운을 입고 칼을 잡았다.
한 시간만 도와달라는 실험은 6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아예 실험실에 벽시계가 없었다. 실험 쥐가 깨끗한 동물이긴 하지만, 특유의 쥐 냄새가 있기도 하고 장갑엔 피가 묻어 있고 그래서 휴대폰을 확인해보지 않았더니 이 모양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교수님께 말했다.
"교수님... 이 정도면 제가 유종의 미는 충분히 거둔 것 같은데요...?"
교수님은 멋쩍게 웃으시고 내가 얘기하지 않으면 계속 붙잡고 있을 것 같으니 말한 거냐고 하시며 가도 좋다고 하셨다. 내가 전혀 보상도 없이 시간을 뺏기면서 교수님을 도와드리고 있는 건데, '가도 좋다'니... 그런데도 나는 바로 훌쩍 떠나자니 이상하게 뭔가 찜찜한 기분이 남아 떠나는 것도 주저주저하다가 나왔다.
실험실을 나오니 밖은 벌써 어두컴컴했다. 정오의 햇살을 받은 병원 건물을 마지막으로 사진 찍고 뒤로 돌아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나오는 것이 내가 상상했던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장면은 어두운 밤길과 실험실 쥐 냄새, 별로 쓸 것도 같지 않은데 혹시 몰라 챙긴 애매한 짐꾸러미를 들고 피난민같이 서 있는 내 모습이었다. 마지막까지 대학병원에 헌신한 내게 남은 건 결국 이 모양 요 꼴 뿐이었다.
멋대로 뺏긴 내 시간은 아깝지만, 덕분에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무리 봐도 '정신 승리' 같아 보이더라도 말이다.
첫째, 나는 연구 활동은 영 흥미가 없는 것 같다. 논문 쓰기, 각종 실험 등. 대학 병원 정교수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연구 실적인데, 이게 난 정말 안 맞는 것 같다. 이걸 어떤 느낌에 비유할 수 있느냐면, 대학원생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대학원생이 체질인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만... 진료와 교육은 할 만하지만, 여기에 또 연구까지 해야 하는 게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난 아무래도 못하겠다.
둘째, 교수가 되기 위해 기다리면서 당연하게 각종 잡일을 떠안는 것도 이젠 못 하겠다. 이건 사실 내가 있으면 있을수록 (아래 사람이 들어오기 때문에) 편해지는 부분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게 당연시되는 분위기 자체가 싫다. 내가 당하는 것도 싫고 나도 남을 그렇게 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도 싫다. 로컬 병원 페이 닥터도 어쩔 수 없이 원장님 밑에서 일하는 건 똑같다고 하지만, 거긴 계약만큼 일하고 계약만큼 돈으로 받는다.
셋째, 이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해본 적 없어서 안 나올 수도 있고, 처음엔 서툴고 때론 거친 표현으로 나올지라도. 계속 말하다 보면 점차 고상하고 은근하게 거절하는 방법도 배울 것이다. 나의 생명과 시간을 이젠 남이 멋대로 가져다 쓰게 하지 않을 것이다. 계약된 범위 외의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면 방어할 것이다. 아니면 돈으로 달라고 할 것이다. 돈! 돈! 돈! 거릴 것이다. 돈을 따지는 걸 속물이라고 나를 나무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돈에 환장하는 놈이니 경계할 것이다. 돈이야말로 내 생명에 대한 가장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보상이다. '유종의 미'보다 말이다.
나의 퇴사 날. 사람 대신 쥐의 배를 가르며 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 느낀 걸 절대 잊지 말자고. 로컬 병원이 더 힘들 수 있더라도 행여나 대학병원으로 돌아갈까 미련 갖지 말자고. 어차피 내 자리는 없었고 다 환상일 뿐이라고. 내게는 오직 플랜A 밖에 없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