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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Mar 19. 2023

애매하기에 씁쓸한 어릴 적 나의 빌런들

[더 글로리] 재밌게 본 김에 써봄

요즘 유명한 드라마 [더 글로리]. 학교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가해자들을 통쾌하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넷플릭스에서 직접 보거나, 유튜브 요약본을 보거나, 위키를 보거나. 어딜 가든 워낙 정리가 잘 되어 있으니 굳이 내가 재미없게 또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대신 이 드라마의 명대사를 하나 고르자면 난 이거라고 하고 싶다.


그니까 그게 뭐? 학폭은 너나 위험하지, 우리 같은 일반인이 뭔 타격이 있어?

- 5명의 가해자 중 1명인 이사라가 다른 가해자인 박연진(기상캐스터)에게 한 말


그렇다. 최근 몇몇 정치인이나 운동선수, 연예인, 기타 유명인들이 학폭 폭로 글로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 사건들이 보인다. 학창 시절에 안이하게 갚지 않은 업을 성인이 되어 돌려받은 것이지만, 한편으론 가해자가 많은 사람이 알 정도로 유명해졌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솔직히 우리 동네 누구의 과거 학폭을 폭로한들 사람들은 “뭐? 그게 누군데?” 밖에 더하겠나.


따라서 [더 글로리]의 이야기 전개는 다소 편리한 방식을 취한다. 빌런들이 하도 흉악해서 주인공이 굳이 ‘복수’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알아서 자멸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디 보자... 살인(미수)은 기본, 유명하지 않아서 사회적으로 매장되기 어려운 친구는 마약을 하거나, 자기들끼리 서로 찌르거나 죽이거나 해서 어쨌든 벌(?)을 받는다. 물론 이게 그냥 벌어진 건 아니고 (마약쟁이는 원래 그랬으니 논외로 쳐도) 주인공의 행동으로 인한 연쇄반응이니 어쨌든 복수는 달성되고 우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평범하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악하고. 개인적인 원한은 있으나 이제 와서 복수하기엔 뭔가 애매해져 버린 그때 그 인간들. 드라마를 보니 나의 빌런들은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아니, 사실 거짓말이다. 일부는 대충 알고 있다. 과연 그들은 짐작할지 모르겠다. 학창 시절에 괴롭힌 친구가 20년이 지나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는 걸. 뭐 이렇게 말은 거창하게 해도 ‘아주 가끔’ 생각날 때 찾아보는 정도이지만, 적어도 빌런들이 날 ‘추억’하는 빈도보다는 많지 않겠나 싶다.


지금도 나는 ‘그때 내가 이렇게 했다면, 혹은 저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라며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곤 한다. 단순히 선한 피해자와 악한 가해자로 생각하진 않는다. 나 또한 선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므로. 다 똑같이 질풍노도의 미친놈들만 있는 정글 같은 학교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때 처맞더라도 맞서 싸워본 경험이 있었다면 난 좀 더 자신감 있는 수컷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모범생으로 ‘회피’했던 것도 그럭저럭 지금 의사가 되었으니 잘 된 거로 생각하자며 자신을 위로하곤 하지만, 아무래도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늘 그렇듯 빌런들은 한 땐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한참 힘들 적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에 대한 환멸이 심했다. MBTI에서 당연하게 E가 나왔을 외향적 성격도 극 내향적으로 변했다. 물론 지금이야 어른이 되었으니 남들 하는 만큼 사회활동은 하지만, 솔직히 그저 피곤하기만 하다. 결국 인간관계라는 게 피상적이고 허무하다는 걸 너무 일찍 깨닫게 되었다는 게 씁쓸하다. 이럴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내가 그때 싸워서 이겼다면, 지금 외향적이고 멋진 핵인싸로 살고 있었을 텐데!’


뭐... 적당히 망상 정도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이런 상상이 꽤 보편적인지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도 실현된 바 있으니.


아무튼, 학폭 폭로해도 별 타격도 없을 애매한 나의 빌런들을 추억해본다. 사실 애매한 애들은 졸업 앨범 봐야 생각날 정도고 어느 정도 인상 깊은 녀석들로 추려본다. 시간이 약이라고 막상 정리하려니 기억 자체가 바래져 잘 생각이 안 난다.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 빌런이나 나나.




# 주동자 A

아마 A는 유치원 때 만났던 것 같고 초등학교 땐 꽤 친했다. 그랬던 A가 내게 왜 그랬는가 생각해보면 아마 학업에서 경쟁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 보면 별 쥐뿔도 없는 학교였으나, 우물 안에서 우린 나름 1, 2등을 다투는 관계였던 것 같다. 나 또한 경쟁에 미친 놈이었던 것 같고 특히 주변의 시기(=재수 없음)를 관리하는 것이 매우 미숙했다. 언제부터냐만 문제일 뿐 결국 우린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게 A가 날 괴롭혀도 될 명분은 될 순 없다. A도 똑같이 재수 없는 놈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육체적인 힘이나 세력 모두 A가 나보다 우위였고, 그 뒤 발생하는 일은 뭐 뻔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렇게나 날 힘들게 했던 A는 모 지역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헤어졌다. 주동자가 사라지니 무리의 다른 이들도 뭔가 흐지부지 흩어지게 되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지옥 같은 날들도 그렇게 싱겁게 끝나버렸다. 당연하게도 내게 사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빌런이 아니지.


세월이 흘러 지금 A는 모 대학교 정교수 발령을 받은 모양이다. 학생 땐 ‘갑’으로 재미 많이 본 인간이 대학원에서 오랫동안 ‘을’로 고생했을 거로 생각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전공과목이 달라서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지만, A가 쓴 논문도 읽어 봤다는 걸 그는 알까? 혹시나 역사적인 대발견의 값어치를 하는 업적을 남겼을까 봐 (뭐 대부분의 석박사 논문이 그럴 리 없지만).


그래도 교수가 되었으니 참 열심히 살긴 했구나 싶다. 그건 그렇고 과연 대학원이 A를 ‘사람’으로 만들어 줬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의대를 보면 과정이 너무 힘드니 ‘순한’ 사람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독한 놈’만 남는 게 교수던데,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난 그 대학에 아는 대학원생이 있으면 적어도 A 교수 실험실에 들어가는 건 말리고 싶다. 그의 ‘갑질’이 어땠는지 아니까.


# A의 측근 B

B가 짜증 났던 건 뭔 별 알고 지냈던 사이도 아닌 놈이 A에 들러붙어서 같이 날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B에 대해선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다만 방송반을 했다는 건 기억이 잘 난다. 방송이나 취재 활동? 같은 걸 많이 했다. B는 아마 그때부터 미디어 방면으로 적성이 맞았나 보다. 난 걔가 기자가 되려나 보다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B를 우연히 만나게 된 건 한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B가 그 친구의 축가를 불러준 것이다. B가 인디밴드 보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당연하게도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뭔 오디션도 본 모양이다. 하긴 인디밴드니까 당연히 봤겠지만. 아주 유명하진 않으나 소소한 팬도 몇 있었다. 댓글을 보니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하는 가사만큼 감성적이고 다정한 목소리’란다. 하!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한다고? 그걸 보고 내가 얼마나 기가 찼는지 모를 것이다. B의 목소리를 들으면 너무 소름 끼칠 것 같아 듣지 않았다. 따라서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겠으나, 당연히 일반인보단 잘 부를 것이다.


B가 속한 밴드는 유명한 것 같진 않아 보이나, 활동은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최근엔 나름 유명 소속사 출신 PD와 협업하는 걸 보고 놀랐다. 인디 음악을 키우는 환경을 조성하는 걸까. 워낙 다른 업계라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 나이도 이젠 적지 않고 연예계는 워낙 젊고 매력 있는 사람들이 넘치는 곳이니 B가 과연 보컬로 성공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 양아치 C

C는 의례 어느 곳에나 있는 그런 양아치였는데, A가 날 괴롭히자 좋은 먹잇감이라 생각했는지 같이 괴롭혔다. 당시엔 ‘빵셔틀’의 개념이 막 정립(?)되는 무렵이라 뭔가 돈은 좀 뜯긴 것 같긴 했는데, 그다지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걸 보면 ‘난 참 시기상 운이 좋았구나(?)’하고 생각이 들 정도. 그러나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나가면 정말 별 볼일도 없을 이딴 놈한테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게 자존심에 큰 상처였다. 어느 날 자기가 여자 친구와 ‘투투’라며 200원? 2000원?을 달라고 뜯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투투가 뭔지 그때 처음 알았는데, 사귄 지 20일? 200일? (X발 내가 알 게 뭐야) 뭐 그런 거란다. 그래서 여자 친구 선물 사주기 위해 돈을 달라는 건데, 그걸 ‘친구’도 아닌 내가 왜 축하해주냐. 아무튼, 사소한데 병X 같은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도 이성에 관심이 많을 사춘기 시절인지라 ‘저딴 놈도 사귀는 여자가 있는데, 난 그보다도 못한 건가?’라는 우울감은 덤.


C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매우 궁금하나 아쉽게도 찾을 수가 없다. C의 인생 전성기는 딱 학창 시절까지일 테니까. 아! 장담하건대 학생 때부터 피운 담배는 못 끊었을 것이다. 딱히 흡연자를 혐오하는 건 아니나, C만큼은 금연하지 말고 평생 국가에 빨대 꼽혀서 고통스럽게 살았으면 좋겠다.


# 방관자인 줄 아는 소심한 가해자들

어떻게 사는지 듣고 싶지 않아도 소문을 전해 듣는 경우가 있다.


날 위로하는지 나무라는지 알 수 없는 조언을 하면서 ‘그래도 난 A 무리 같은 인간들은 아니다’라고 도덕적 우위를 챙기곤 했던 D. 자기 딴엔 진흙탕에서 안 논다는 제삼자 위치를 자처했던 것 같은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나에 관한 생각이 A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다른 의미로 역겨웠다. 그러니 대학교 입학 후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지는 건 당연. 굳이 일부러 근황을 찾아보진 않았으나, 모 대기업에 입사했다더라 하더니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기고 평범하게 열심히 사는 모양이다.




다른 빌런들도 다 그런 식으로 평범하게 산다. 나도 뭐 그렇고. 결국, 그렇게 다들 희석되어버린 감정으로 평범하고 그저 그렇게 살다 죽겠지. 그러니 오래전의 학폭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현실에 인과응보라는 게 있겠냐 싶다. 그러나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고 생각난 김에 빌런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너희는 절대 성공 같은 거 해서 유명해지지 말라고. 알아서 마약 하거나 사고 쳐서 뉴스에 나와주면 고맙겠지만, 그럴 깜냥도 안 될 인간들이니 바라지도 않는다고. 계속 애매하게 살고 갈 때 소식이나 한번 전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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