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걷지도 못하면서 뛸 순 없겠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다 보면 종종 드는 생각이 있다.
'내 글(그림)을 전문가가 보면 얼마나 미숙해 보일까?'
자기 홍보하기에도 부족한 요즘 시대에는 "오늘도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 같은 말 따윈 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내 글은 부족한 게 아니라 개성 있는 거라고 말하는 뻔뻔한 자기 암시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우연히 어떤 현업 작가님의 블로그를 구경하던 중 "다른 학문을 취미로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글(또는 그림)이 취미인 사람은 왜 이리 많은가... 만만한가?"라는 글을 보니 왜인지 모르게 죄송한 마음이 든다. 다른 업계의 고충을 구체적으로 알 순 없겠으나, 나도 나름 한 업계의 종사자로서 대충 어떤 감정과 생각으로 쓴 글인지 공감하기 때문이다. 내가 의대 입학부터 쌓아 올린 시간과 노력만큼 작가님도 다른 곳에서 똑같이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걸 고작 '취미'로 따라잡는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사기적인 능력이 있거나 그냥 사기다.
어쨌든 글이나 그림이 일단 다른 분야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확실히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겐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있겠다. 그러나 '만만하지' 않다는 건 작가님이 더 잘 아실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결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처음엔 취미로 시작했을지라도 버티고 (?) 버텨서 결국 뭔가 남길 수 있다면 이미 취미 수준이 아니게 된다. 의식의 흐름으로 쓰고 보니 '버틴다'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것도 참 미묘하다. 인고의 부분이 있는 게 좋은 '취미'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결국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작가님의 푸념만큼 진입장벽이 낮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입구보단 좀 더 안쪽에 보이지 않게 있을 뿐. 오히려 일단 들어가고 난 뒤에 장벽이 있다는 점이 더 사악한 걸지도.
#2
브런치를 시작하면 내가 글을 쪼~금 한다는 착각에 빠진다. 나만 그런 거라면 민망하긴 한데... 내 경우 그 착각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상당 부분 초중고 수준밖에 안 되는 경험에 기반하는 것 같다. 일종의 '추억 보정' 같은 것이다. 겸사겸사 옛날이야기를 남겨본다.
어린 시절 난 집에서 그림(이라곤 해도 낙서 같은 걸 텐데)을 매우 좋아해서 많이 그렸다. 초등학생이 되자 부모님은 '그러면 한번 원 없이 그려보라고' 날 미술학원에 보내주셨다. 우리 애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신 건지 아니면 질릴 때까지 그려보고 진로는 다른 걸 하길 바라신 건지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진 잘 다녔다. 지금도 난 부모님께서 국·영·수 학원을 안 보내고 미술학원을 보내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다.
결국 미술학원을 그만 다니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우선 집안 사정이 많이 어려워져서 학원비를 내기 어렵게 된 모양이다. 그땐 어려서 어른들 사정은 잘 몰랐지만. 한편, 나도 슬슬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입시 미술을 좀 맛보게 되면서 새로운 걸 배우는 즐거움보단 괴물같이 잘 그리는 수많은 천재와 경쟁할 만한 능력이 안 된다는 깨달음만 얻곤 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 미술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계속 도를 닦듯이 정진하는 거긴 하겠지만, 차라리 난 미술보단 공부로 도를 닦는 게 좀 더 잘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뭐 그렇게 겸사겸사 오랜 추억이 담겨 있던 미술 학원을 그만두었다.
아마 고2였을 것이다. 당시 미술 선생님이 내게 진지하게 미대를 목표로 준비해 볼 생각은 없냐고 하셨다. 그림 좀 (?) 그리고 성적도 나쁘진 않으니 무난하게 S대를 노려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난 미대에 가는 것도 수능 성적이 중요하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 제안한 건 내가 미술 실력이 출중해서라기보단 공부도 잘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선생님 입장에선 어쨌든 'S대를 보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때부터 의대를 생각한 건 당연히 아니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그걸 진로로 삼을 만큼 내가 잘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좋아한다는 것도 착각이지 않을까? 그동안 나갔던 대회만 봐도 어떻게 하면 이렇게 그리나 싶은 괴수들이 수두룩했고, 심지어 전국대회에선 그들도 '평범'한 수준이었다는 걸 많이 느꼈다. 미대는 그런 사람들이 가야지 내가 가서 되겠냐 싶어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른들이 늘 하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잘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해라."
일단 진로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걸로 하고 그림은 취미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 '취미'라는 걸 다시 하는 일이 없을 거라는 것도 막연하게 짐작했던 것 같다.
한편, 선생님의 제안은 친구 A에게 갔다. 난 A가 갑자기 미대를 목표로 정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A는 만화를 좋아한다며 일러스트 쪽으로 진로를 정하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그거야 남자애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거 아닌가. 수능으로 가는 것보다 미대 입시로 가는 것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게 A의 전략이었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당시엔 이런 식으로 홍보하는 미대 입시 학원이 많았다. 문제는 정작 A의 실력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수준이었다는 거였다.
수능이 2년도 안 되게 남은 시점에서 선 그리기 연습을 하는 A를 보며 난 마음이 복잡했다. 나도 실력이 출중하진 않으나, '공부도 해야 하는데, 지금 선 그리기부터 시작해도 괜찮은 건가?' 싶은 그런 어리둥절한 느낌.
'주변에 그림 잘 그리는 친구가 하필 나뿐이라 미대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게 된 거 아닐까? 괴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옆에서 보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A는 도를 닦듯 도화지에 직선을 하나하나 그었다.
'밑바탕이 없어도 미술로 대학 간다'라는 입시 학원의 전략은 아주 사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다만 그걸 따라가는 인내는 개인에게 달렸을 뿐. 미대에 가기로 결심한 건 다소 뜬금없어 보였으나, A는 매우 성실한 학생이었다. 선은 곧 면이 되고 면은 도형이 되었다. 도형은 구도를 이루며 결국 작품을 만들었다.
고3 겨울. A는 바라던 대학에 합격했고 나는 그를 축하해 주었다. 합격도 합격이지만, 인고의 과정을 극복한 성실함을 더 축하해 주고 싶었다. '와 미대 입시가 그때 시작해도 되는 거였나...'하는 놀라움도 약간 있었지만. A는 내가 그림을 좀 그렸던 걸 알기에 내심 나와 자신을 계속 비교했던 모양이었다.
"너도 미대에 가면 좋았을 텐데. 솔직히 나보다 네가 더 잘 그리고..."
아니 미대 입시 본 애가 다른 괴수들 실력 못 봤나? 역시 드러내지 않으니 뭔가 A의 기억 속에서 내 실력이 왜곡되어 강화되는 모양이었다.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 미묘하게 흐른 뒤 나는 말했다.
"무슨 말이야. 네가 나보다 더 잘 그려. 게다가 앞으론 훨씬 더 잘 그리게 될 거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들 각자의 길로 떠나는 마지막 날, 우린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어렸을 땐 잘 몰랐으나, 지금 와서 보면 우린 그럭저럭 각자 '잘하는' 걸 잘 선택했던 것 같다.
#3
작년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그림과 글을 좀 했다. '그렸고, 썼다'라고 하고 싶지만, 현업에 종사하시는 작가님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했다' 정도로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림도 오랜만에 그리니 쉽지 않다. 요즘은 도구가 엄청나게 좋아져서 (그림 그릴 때 'Ctrl + Z'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기적이다) 훨씬 수월하긴 하나 역시 밑천이 부족함을 금방 느낀다.
'그림에 들어가는 인물을 잘 그리고 싶다면 인체에 대한 지식(의사이긴 하지만?)이 필요하겠네. 배경을 잘 그리고 싶다면 원근법과 투시를 공부해야겠네. 색칠하고 싶다면 빛과 채색법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어야겠네.' 기타 등등. 여기에 많이 그려봐야 하는 건 덤이다.
다행히 각 이론을 공부하는 건 재미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와 그러면 언제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어?'라는 생각이 든다. 부정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공부' 좀 한다고 현업 작가만큼 멋진 그림을 금방 그릴 수 없으니까.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좀' 공부한 거 가지곤 가운 입고 진료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문제는 내 눈높이는 능력보다 위에 달려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재미'를 느끼기 힘들다는 거다. 내 취미는 '쓰기와 그리기'가 아니고 역시 '읽고 보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저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게 최선의 효율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글이 잘 안 써지니 별생각이 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