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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산 Feb 26. 2023

먹고살기. 브런치를 쉬는 상투적인 변명거리

우선 쉬운 변명부터 해보자. 그냥 바빴다고.


병원장님은 신년 인사부터 병원 운영이 몹시 어려움을 강조하였다. 환자가 많이 줄어서 병원이 위기라고. 나야 이제 고용된 지 1년 된 직원이니까 잘 모르지만, 오래 일했던 간호사 등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확실히 병원 분위기가 예전과는 달리 쇠락해진 느낌인가 보다. 하긴 2022년 합계출산율이 0.7이니 당연한 걸까. 다행히 올해도 안 잘리고(?) 일하게 되어 1년 생명 연장된 기분인데, 매년 재계약하므로 내년은 또 모르겠다.


여러모로 실적의 압박을 느끼다 보니 괜히 다른 의사 선생님에게 시기심이 들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선배 의사야 당연히 나보다 경력이 많으니까 환자도 그만큼 많이 보고 실적도 좋은 건 인정. 그런데 산부인과만의 특징은 비슷한 능력치의 의사가 있다면 남자보단 여자 의사를 선호한다는 것이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예상 못 한 바는 아니나... 나보다 훨씬 더 경력이 적은 후배 여의사를 환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더 선호한다는 걸 알았을 땐 솔직히 좀 충격을 받고 허망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뭐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만날 필요가 있나. 나이 들면서 그런 거부도 노련하게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려니~'라는 마법의 단어로 말이다. 역시 20대 연애에서 처참하게 깨져본 경험들이 과연 헛된 것만은 아닌가. 아무튼 남자 의사와 여자 의사는 그냥 사는 세상이 다른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종의 역할 분담 같은 거지. 난 외래 환자가 적은 대신에 당직 근무를 하잖아(?). 내 월급의 값어치엔 언제 올지 모르는 응급 환자를 밤에 홀로 보는 노고가 대신 들어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굳이 외래 환자를 북적북적 봐서 스트레스받을 필요가 있나. 오늘부터 내 인생의 모토는 '한량'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네.


지금은 ○○과로 먹고사는 친구의 놀림이 자꾸 생각난다.


"무슨 대단한 의사 되겠다고 산부인과를 전공하냐. 의사가 고생한다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환자는 없어. 요즘은 다 돈 내고 받는 서비스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무조건 의사가 잘못했다고 하잖아. 필수 의료고 자시고 오래 살려면 안전(?)한 거 해라 그냥. 분만실이 없어지기 전까진 산부인과 의사들이 소중했다는 걸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


그 얘길 들을 때만 해도 난 나름의 정신 승리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남들이 산부인과를 안 하면 그만큼 취직자리는 많겠지? 주식처럼 출산율도 언젠가는 다시 오르고 산부인과도 빛을 볼 날이 오겠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출산율은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가고 있고, 몹시 귀한 몸이 된 산모를 상대하는 건 더욱 까다로워지고 있으며, 전국의 문 닫는 분만실은 늘어만 가고, 내 인생 역시 내년부터 당장 백수가 될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뉴스에선 정부가 '필수 의료'를 살린다고 말은 많던데, 솔직히 환자(산모)만 늘어나면 의사도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법이다. 그걸 강제로 의사부터 채찍질한다고 사회 총체적인 문제가 해결될지 나는 모르겠다. 현재로선 후배 의사에게 감히 산부인과를 전공하라고 권하진 못하겠다. 일단 지금은 힘들게 의사가 되었으면 산모나 소아를 보는 것보다 노인을 상대하는 것이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두서없지만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모두가 힘들다고 하니깐 감히 밖에선 말할 순 없지만, 브런치는 내 공간이니까...



이걸 같이 쓰다가 내용이 길어져서 분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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