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영상이 유튜브에서 유행한다는 말이 있다
#1
인터넷을 보다 흥미로운 글을 하나 보았다. 난 유튜브에 돈 자랑하는 의사만 많은 줄 알았는데, 최근?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가난'을 자랑(?)하는 의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의사인데, 가난합니다.]
선두 주자들이 '솔직함'으로 좋은 평을 받으며 인기를 끌자, 너도 나도 비슷한 양식으로 만들고 있다는 거다.
#2
그러나, 비슷한 내용의 브이로그가 너무 많아지니 사람들이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게다가 미용 의사의 페이 시세가 투명할 정도로 까발려져 있으므로, 브이로그의 의사가 실제로 얼마를 버는지 알 수 없지만 비슷하게 번다면 "의사가 가난하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다"라고 말하는 반응도 생기고 있다.
이를 '도둑맞은 가난'이라고 표현한다.
#3
가난을 어필하는 내용은 다양한데, '도둑맞은 가난'의 예시로 든 브이로그는 내가 봐도 눈치가 좀 없는 게 아닌가 싶은 게 보였다. 예를 들어
"의사인데, 대중교통 타고 출퇴근합니다"
(원문을 각색함. 검색해 보니 원본 영상은 내려간 듯하다)
같은 내용은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내가 그래도 의사인데, 꼴이 이게 뭐냐...'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졸지에 '불쌍한' 의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의사면 당연히 좋은 차 타고 거침없이 달려야 한다는 게 '기준'으로 깔려 있어야 나올 수 있는 생각으로 영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라 매우 놀라웠다.
#4
생각해 보면 나도 브런치에 가난을 어필하는 글을 좀 썼으니 남 말할 처지는 못 된다.
근데, 우리 집도 진짜 눈물 나게 가난한 서사가 있고 내가 그걸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 중인지 남들이 알아주길 바랄 때가 있다. 마치 상처에 앉은 딱지를 자꾸 긁으면 아프면서도 묘한 쾌감이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람들이 의사들은 고생 하나 안 하고 자란 것처럼 일반화하면 내 청춘을 다 바친 '노력'이 별것도 아닌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속상하다. 그래서 자꾸 '어려움'을 얘기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 가난 레퍼토리를 가장 많이 들은 사람은 아내다. 아내는 이걸 서로의 불행을 겨루는 '불행 시합'이라고 말했다. 아내도 어려운 환경의 집안에서 큰 여자라 그래서 마음이 잘 맞았던 것 같다. 흙수저 남자가 의사가 되면 부잣집에 장가를 가서 계층 상승을 하는 게 현명한 걸지도 모르겠으나(성별이 반대여도 마찬가지), 아무튼 그래서 아내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5
분명 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기보단 운이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의사 중에서는' 불운 랭킹 상위권에 들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눈물 나는 흙수저 사연을 가진 의사들이 많더라.
의사 커뮤니티에서 어느 날 심야에 갑자기 본인이 얼마나 흙수저인지 사연을 겨루는 (?) 대회가 열렸다. 처음에 누군가 정말 답답한 마음에 인생 상담 겸 사연을 담담하게 올렸는데, 그 뒤로 "사실 나도 만만치 않다", "아마 여기선 내가 가장 흙수저일 것이다"라며 줄줄이 기구한 사연 글이 올라왔다. '개천룡'들이 으레 그렇듯 온 집안 가족의 생활이 의사 하나의 어깨 위에 얹힌 경우가 기본이었고, 거기에 '부모가 병이 있어 병수발을 해야 하네', '가족 누가 빚을 많이 졌네' 같은 옵션이 붙는 것이다. 정말 대책 없는 옵션이 붙으면 아무리 의사여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난 그날 밤 커뮤니티에서 봤던 흙수저 의사가 과연 '가난' 브이로그를 찍을까 생각해 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런 대화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부자의 최대 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모르겠는데?"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중략) 돈이 없으면 절대 그런 소리를 못 하게 돼. 그건 정말 돈이 없다는 소리니까. 비참할 뿐이지. 예쁜 여자가 '나 오늘은 얼굴이 엉망이니까 외출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과 같거든. 못생긴 여자가 그런 소릴 해봐, 웃음거리만 될 뿐이지."
#6
의사도 다양한 사람이 있고 양극화가 심한 집단이니 일부 브이로그를 무조건 '도둑맞은 가난'이라고 단정하고 아니꼽게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돈 자랑도 가난 자랑도 유행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