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물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말을 아끼기 마련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소개를 할 때 장황하게 말해야만 했다. 이런 책을 썼고…. 이런 경력이 있고…. 이런 회사에서 일했고 어쩌고…. 이런 블로그를 운영하고…. 지금은 저쩌고…. 이제는 간략하게 말하는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첫대면에서 나에 대해 잘 모른다. 첫 만남에서 나는 그저 구석에서 이야기만 듣는 망상에 빠진 남자임과 동시에 모임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애송이일 뿐이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이런 내 성격이 싫었다. 나도 그들처럼 처음부터 남들로부터 주목받고 인기를 끌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로 군중을 휘어잡고 싶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그들을 따라 해보기도 하고 자신만의 전략을 펼쳐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나는 그들이 아니었고 그들과 같아질 수 없었다. 결국, 이 성향은 고치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심장 깊숙하게 베인 어떤 본질적인 성향을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20살 때였을 것이다. 나는 남들 따라 하기를 멈추고 나대로 살기로 했다. 그들이 될 수 없었으니 완전한 내가 되기로 한 것이다. 남들 따라 하기를 끝냈을 때, 남들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솔직한 내가 될 수 있었다. 지금도 첫 만남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아마도 내 순위는 하위권이거나 꼴찌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나를 알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만 진면목이 드러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어떤 모임, 특히 초면이 많은 모임에 가보면 처음부터 자기 자랑을 일삼는 부류가 꼭 있다. 그들은 겸손하지 않고 자기가 지금껏 무엇을 해왔고 잘 아는지를 계속해서 어필하지만 주제에 맞지 않는 데다 젊은이들에겐 꼰대라 불리며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의 집중도는 떨어지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른다. 그들은 밤새도록 누군가를 붙잡고 자기가 해봤는데 어쩌고…. 자기가 이런 건 잘 아는데 저쩌고…. 라면서 말만 들으면 세계 최고의 전문가 같지만 실제론 내용 없는 이야기만 허공에 떠다닐 뿐, ‘진짜’는 없다. 나는 지금껏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은 경험자이므로 슬쩍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으로 대처한다. 굳이 듣고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기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어서 시간이 아깝고 그건 아니라고 반대 의견을 내면서 에너지를 소모할 생각은 더욱 없다. 그 시간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담소를 나누거나 산책을 하거나 잠을 자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이런 성격의 나를 보고 일부 사람들은 욕을 한다. 자신들과 다르고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의견 차이와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억압된 환경에서 권위적이고 폭력성 짙은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무슨 소통을 한다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실이 그렇다. 나는 단지 그들의 의견이 내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내 행동을 내가 한 것뿐이다. 말싸움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들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는데 욕을 먹어야 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이런 현상도 곧 익숙해졌고 지금은 초연한 편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욕을 먹을지언정 싫은 상황을 참아가면서까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
진짜 실력과 위대함은 세 치 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어떤 것, 즉 콘텐츠가 대변한다. 내겐 나만의 콘텐츠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 강력한 대변인을 가만히 기다리는 입장이다. 구태여 처음부터 파워게임을 할 필요가 없다. 내 소개는 내 입이 아니라 내 콘텐츠가 대신한다. 나는 그저 내 일을 열심히 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게 ‘나’다. 결과물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말을 아끼기 마련이다.
유명한 사람일수록 명함은 간략해진다. 대통령이나 빌 게이츠, 유명 연예인은 굳이 명함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곧 브랜드이고 자신의 얼굴이 명함이며 자신이 하는 일이 곧 경력인 셈이다. 자기 자신을 압도적으로 내세우면서 파워게임 승리자의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는 열등감과 패배의식의 향기를 뿜는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일종의 방어기제인 것이다.
90살 먹은 노인이라도 특정 분야에서는 젊은이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고 배워야 한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색이 전문성을 증명하는 시대는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났다. 5살짜리 꼬마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면 존중하고 존대해야 한다. 언어로 찍어누르면서 나이를 앞세운 무차별 폭격 같은 자기소개는 며칠만 지나면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뇌리에 박히는 건 언제나 눈에 보이는 콘텐츠고, 콘텐츠를 가진 사람의 이름은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자기 PR 시대에 자기소개는 중요한 이벤트지만 장황하다고 좋은 건 아니다. 광고 → PR → 브랜드로 이어지는 단계에서 이미 브랜드화가 된 사람은 자기소개가 점점 짧아지다가 나중에는 자기소개가 아예 없어지고 이름만 남는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어떻게 자기소개를 명확하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름만으로 남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아이디어다. 전자가 어떻게 광고할 것이냐면 후자는 어떻게 브랜드화할 것인가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