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명에게라도 중요한 사람이 되고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날은 어떤 마가 낀 날이었던 것 같다. 꽤 중요한 일정이 있어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걸쳤다. 머리는 샵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멋짐을 표현해둔 날. 저녁에 아는 후배와 술 약속이 있어 집 근처 치킨집으로 향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바람이 좀 부는 것이 곧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퇴근시간때에는 비가 오지 않았고 가방에는 서류뭉치와 업무용 다이어리, 미러리스 카메라, 보조배터리 등 온갖것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우산은 없었다. 그 많은 물건들 사이에, 그 터질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가방에, 우산은 없었다.
후배 녀석과 치킨과 맥주를 신나게 먹고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비가 쏟아진다. 조금 오는게 아니라 미친듯이 쏟아진다. 이게 소나기였다면 마음먹고 기다렸겠지만 상황을 봐서는 밤새도록 올 것 같다. 아이폰에 경보 문자가 왔다. '해당 지역 호우주의보 발령'.
좁은 도로에는 개미새끼 한마리 없고 그 많던 차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차량 라이트 하나 보이지 않았다. 택시는 고사하고 버스조차 보이지 않는 도로. 들리는거라곤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가 바닥을 때리면서 내는 경쾌한 노이즈 뿐이었다. 후배녀석도 우산이 없고 나도 우산이 없으니 이걸 어쩌나. 도로는 물바다가 된지 오래. 너무도 많은 비가 갑작스럽게 내렸다.
콜택시를 불러 가기에는 집과 너무 거리가 가까워 돈이 좀 아깝고. 그렇다고 비 맞고 걸어가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방법과 대책이 없었다. '우린 망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내 생각엔 그래도 나와 꽤 친분이 두텁다고 생각한 친구 녀석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치킨집에 갇혔다. 날 좀 태우러와줘"
나는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차가 없어서 안돼"
차량이 없다고한다.
"그럼 집에 우산 두 개 들고 여기로 와줄래? 걸어서 10분 거리잖아"
"귀찮아서 못가겠다. 비도 많이 오고..."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일단은 집에는 가야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이든 선택을 해야만했다. 비를 쫄딱맞고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콜택시라도 불러 조금은 편하게 갈 것인가? 이 날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뭔가 착찹한 기분이 있어서 비를 맞고 걸어가는걸로 마음먹었다. 정장 자켓을 벗어 머리를 겨우 막고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갔다. 1분 안에 온몸이 다 젖었고 구두 속으로 들어오는 물은 걸을 때마다 '찔꺽'소리를 냈다. 가방에는 중요한 서류와 전자기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방을 보물처럼 품에 안고 최대한 젖지 않게 하면서 집으로 갔다. 여전히 도로에는 아무도, 그 어떤 차도, 그 어떤 소리도 없었다.
머리 위에 덮어쓴 자켓을 신나게 적시는 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걸었더니 사람이 극도의 감성적으로 바뀌는게 기분이 묘했다. 집으로 가면서 단시간에 나는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깊숙하게 고민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자 내 다음 행동은 명확해졌다. 아이폰을 잠금해제하고 그 친구의 번호를 차단. 일은 깔끔하고 빠르게 정리됐다.
12년간의 교우관계, 거의 매일처럼 만나 함께 식사를 했던 친구, 이런저런 일들을 공유하고 서로의 집을 종종 찾아 담소를 나눴던 사람, 친구이자 몇 가지의 일은 함께 하는 파트너, 서로의 고민거리를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을만한 녀석, 그리고 그외 모든 추억들과 기억들, 앞으로의 불편함까지. 주마등처럼 모든게 스쳐지나갔고 이제는 정리해야될때라는 결론이 섰다. 모든건 찰나였다.
우산 하나 때문에 누군가와 인연을 끊어버린다는건 누가 들으면 쪼잔하고 속좁은 인간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 장소와 그 친구의 집이 거리가 멀었다면, 그 날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차라리 거짓말을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마치 악마의 손길이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상황은 흘러갔다. 그 친구와의 인연이 끊어진지 벌써 10일이 넘었다.
나는 그 친구를 꽤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금껏 일도 소개시켜주고 취직에도 도움을 줬고, 그 친구의 하소연과 고민거리를 들어주며 상담도 해줬다. 필요할 때 뭔가를 빌려주고 돈벌이되는 일을 연결시켜주기도 했다. 사람을 소개해주고 소개팅도 시켜줬다. 어떤 반대급부를 바라고 해준건 아니었다. 그냥 친구였으니까. 친했으니까. 나는 그랬다.
그 친구 역시 나에게 많은걸 해줬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심리적으로 이기적이었기 때문에 내가 해 준것만 생각났고 그게 전부였다. 귀찮다는 이유로 단 10분 거리도 걸어오지 못할만큼 나는 그에게 우선순위가 낮은 존재였을까. 비를 흠뻑 맞았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기분과 감정이 상해버렸다. 이런 관계를 오래 지속할 순 없다. 우리는 이제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고, 언젠가는 정리해야될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친구와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불편한점이 꽤 있다. 살면서 몇 가지의 취미활동을 함께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걸 혼자해야하거나 다른 이들과 해야한다. 불편하다. 하지만 감내해야하고 적응해야한다. 나는 지금껏 그 친구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걸 아깝게 생각한적은 없었다. 그 반대의 입장은, 10분도 투자하기 힘든 인간일 뿐이었다.
나는 단 한명일지라도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싶다. 모두가 날 욕해도 날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단 한 명. 밤 늦게 전화해도 특별한 일이 없다면 소주 한 잔 흔쾌히 받아주는 그런 사람. 만약 입장이 바뀌어 내가 우산을 들고 가야했다면... 나는 어땠을까?
나이를 먹으면서 친구 관계가 계속 정리되고 바뀌어간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홀가분하다. 많던 친구들이 각자의 삶을 찾아나가면서 그렇게 정리돼간다. 진짜 친구는 몇 없다. 아예 없을수도. 우산 하나로 한 명의 친구가 또 나와 멀어진다. 그 친구가 날 욕하고 비난해도, 나는 지금의 자세를 유지할 것이다.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고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