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을 다녀오는 길
왼쪽 골목에 낯익은 이름이 눈에 보였다.
앗!
하일지,
오, 그림 그린다는 소식을 얼핏 듣긴 했는데,
뭔가가 잡아끄는 듯한 느낌으로 전시장 지하를 내려갔는데,
웬걸, 아직 오픈 전이었다.
네이버로 전시 정보를 찾아보니 12시에 연다고, 오늘이 전시 마지막날이다!
29분 정도 남았지만
일단 유리문 밖에서 사진이라도 찍으며 달래기로 한다.
사진을 확대해서 그의 그림을 감상한다.
뭔가 아기자기하고, 얼굴이 커서 그런지 애들 그림 같은데
평면적인 인물들, 초록초록한 배경들, 가끔 작가의 분신 같은 대상도 보이지만
늘 그랬듯 그의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야리야리하지만 육감적인 여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눈망울이 큰데 뭔가 감정이 담겨 있지 않고
제스처의 일종처럼 표현했다.
시계와 기차와 비행기가 떠도는 바깥 또는 실내에서 어디론가 떠나거나
여행의 중간 휴식지에서 마주한 풍경들
초록의 배경은 이상하리만치 그림의 시간대를 짐작하기 힘들게 하는데,
어느 땐 칠흑 같은 저녁 같다가도, 어스름한 새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녹음이 짙은 나무그늘 속에서 햇볕에 차단된 채로
시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시공간 같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성인을 위한 동화책에 삽입될듯한
스토리의 연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삽화 같은 걸
그린 게 아닌가 싶다.
몽환적이지만 감정은 배제되어 있고,
정적이어서, 대사를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무언극의 한 장면을
그대로 그린 듯한 느낌,
나는 20분여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뒤돌아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은,
소설가로 익숙한 하일지의 그림들을 봤다는 반가움에서
그 그림들의 뭔지 모를 '귀여움'이 느껴졌달까,
이드가 사라지고 천진난만한 에고가 전면에 등장한 느낌을 받는다.
초록색의 심리적 효과인가?
활발하고 구성찬 희극 사이 잠시 등장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간주곡 느낌의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그림들에 암시된 분위기와 소재들은
문학에서 내러티브를 옮겨 놓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마치 소설에서 문장이 해야 할 일들을
그려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하일지의 책들이 언젠가는 더 본질적이며 원초적인 이미지들이 내러티브를 압도하게 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지금 이 그림들이 그 인상을 이어받고 있단 생각이 든다.
한편, 조금 큰 폭의 그림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작은 화폭의 그림들이 소품 같은 성격이 진한데,
작가의 왕성한 창작력과 에너지를 생각한다면
빨리 그리기 위해 택한 가장 이상적인 판형이란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돌아오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짝사랑은 아니지만 오래전에 관심을 가져왔던 인물을 만나
반가운 인사말을 내내 생각하고 다가가려다
문득, 그런 설레는 감정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 것 같아서
되돌아오는 그런 귀갓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