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윌리엄 해즐릿, 공진호 역, 아티초크
위대한 에세이스트로 알려진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가 최근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를 비롯,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까지 총 3권이 번역되어 있다.
역자는 공진호로, 아티초크라는 출판사에서 같은 역자의 새로운 번역의 고전 시 들이 열심히 출간되고 있음을 영미권 고전 저자들에 대한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즐릿 책이 나와서 <혐오의 즐거움>과 <왜 먼 것이>를 시간이 될 때 한 번씩 훑어보았는데, 주된 생각은 이 해즐릿이란 양반은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구성요소들을 이리저리 교반하고 분배하고 무게를 달고 측정함의 결과를 엄격한 과학자의 이성을 닮은 특유의 직관으로 해체해서 면밀한 보고서를 쓴다면 바로 이런 글들이 한 바닥 적힐 것 같은,
반면, 우리는 해즐릿이 활동했던 당시의 정치 지형이나, 그가 활동했던 당시 언론 지평, 그가 자주 논하고 인용하는 18-19세기 영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시들, 당대 종교적 영향력이나 기타 문화적 동향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해즐릿의 문장이 추구하는 콘텍스트의 고리들에서 매번 연결되지 못하고 그 사슬을 반쯤 눈 감은 채로 더듬더듬 만지는 형국이랄까, 결국 반쪽짜리 읽기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그런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적당한 길이의 에세이들은 어떤 효과가 있는데, 진중한 독서라는 가상의 이념을 만들어 시간이 된다면 그의 글을 곱씹고 싶다는 어떤 휘황한 빛이 감도는 기대 지평을 우리에게 선사한다는 점이다.
물론 내가 지금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에 관한 메타적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봐도 좋듯이, 시간이 지나고 공간을 짐작하기 힘든 시절에 활동한 이 작가에 대해 그저 감각적인 헌사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해즐릿은 내 기억으로 줄리언 반즈인가, 아니면 90년대 읽었던 또 다른 영국 작가의 책에서 인상 깊게 다뤄져서 이름만 어렴풋이 기억되었던 적이 있는데, 그러한 과거 햇볕이 사그라질 즈음 읽었던 독서의 강렬한 인상에 의거해, 그 아련한 맛이 희미하게 남아있기에, 오로지 그 작은 기억의 편린으로 해즐릿이라는 이름이 각인되었고,
지금 읽고 있는 그의 글들은 그 편린을 확대한 것에 불과하단 느낌이 크다. 언제나 부분이 전체를 압도한다고 해즐릿이 반쯤 자조적으로 역설했듯이, 해즐릿을 제대로 읽는 일일랑 계속 연기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이러한 아티초크나 공진호 번역가의 시도들은 아주 좋아 보인다. 저 먼 것들과 저 혐오의 즐거움들이 가리키는 것들은 우매한 편견에 가득한 진짜 경험이 부족하고 우매한 독서가들을 위한 것임을 매번 통탄할 만큼 지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해즐릿에 대한 근사한 에세이를 마무리할 수 있기를 염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