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반느> 이필성 감독
키 크고 잘생기고 무용에 소질 있는 남자가, 어머니를 버리고 간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에
못생기고 자신감 없어 보이고, 자기를 사랑줄도 모르는 여성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설정은,
그간 숱한 멜로 영화에서 보였던 클리세 중 하나이다.
거기에 더해 두 사람의 사랑의 오작교, 능글맞고 쿨한 감초 역할이란 얼마나 클리셰 자체인가, 그가 영화적 화자로 등장해서 위 두 남녀의 사랑을 중개하며 그것들을 해설하는 친숙한 술집 사장이 있고(마치 하루키의 소설 속 중국인이 운영하는 술집처럼) 거기에 더해, 화자 자신이 출생의 비밀이 있으며, 지독히 외롭게 자라났고 그래서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자살을 시도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는 기사회생하고(?) 오히려 위 남자 주인공은 비극적으로 생을 달리하며, 여자는 처음 남자를 만났던 장소를 떠나서 자기에게 맞는 직업을 찾고 생을 영위해 나간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소설가로 변한 남자에 의해 아름다운 결말로 포장된다.
박민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필성 감독의 <파반느>는 원작 소설이 그렇듯이 시공간적
'무국적성', '무시간성'을 가져와서 찬란한 멜로 판타지를 연출하고 있다.
연출적으로, 화면 연결과 주인공 배역 3인의 연기와 감정선은 평균 이상을 획득하고 있다. 감독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마치 하루키 초기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및 초기 단편들에서 보이는,
특유의 개인주의와 인물들의 디태치먼트-단절감의 정서를 전면화한다.
대화는 최소화하고, 주변에선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들에 둘러싸인 채, 쉽게 자신의 감정을 유치한 아포리즘으로 설명하고, 적당히 불분명하게 얼버무린다.
한국의 90년대 말 2000년대 활동한 주요 소설가들에게 하루키적 정서가 이미 내면화되어 있음은 기정사실과도 같은데, 그래서 우리는 초기 하루키적 개인주의를 ai가 반복학습한 듯한 박민규의 소설과 그것의 21세기적 버전인 <파반느>에서 친숙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이다.
현실과는 유리된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하지만 아직 혼란스럽기만 하고, 그 사랑의 여정이 중반으로 흘러가기도 전에 이야기가 성급히 마감된다. 해서 남는 것은 진한 아쉬움과 쓸쓸한 정서인데, 이는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들이 선택하고 마는 세상과 의도적인 단절에서 오는 쓸쓸함을 닮았다고 할까,
해서 <파반느>라는 무국적, 무시간적 소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차라리 꾸며낸 결말이 주는 가짜 충만함에 대한 희구에 가깝다.
현실 레벨에서는 도무지 닿을 수 없는 판타지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영화를 보기엔 너무 나이 들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우리는 다들 사랑의 진입이란 문턱에서 머뭇거리는 형상들에 집중하느라 뭔가 놓치고 있단 생각이 들었고, 상대방의 의도를 누그러뜨리며 자신을 더 내세운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추억을 잠시 환기하는 정도에만 만족하는 영화이지,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남의 삶이 궁금해지지는 않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
유치함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안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