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발저, <연필로 쓴 작은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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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면 무시해도 좋다.
한편 그의 작품들이 픽션이 아닌 산문집들 위주로 발간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다.
발저의 책들이 거의 없었던 시절에 그의 이름은 유명한 독일어 작가들의 인용을 통해서 소개되었고, 그 인용들은 그 작가들의 텍스트 속에서 꽤나 중요한 의미망을 던져주었기에, 발 저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경우가 많다. 반면, 그의 실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불투명하게 쌓여있었던 것 같다. 문학동네에선 나온 <벤야멘타 하인 학교> 같은 책을 읽다 보면, 도무지 제정신인가? 싶은 화자 혹은 작가가 등장해서 꽤나 마이너 한 감성이라고 생각했다. 궁핍한 삶이 낳은 예술적 행로?라고 봐도 좋을 이상한 헛소리들 같이 느꼈던 것이다. 매우 편협하고 한계적인 상황들, 상상력이 때로는 건전한 방향보다는 비관적이고 기묘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흐름들에서 생의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에 대한 시선을 더 많이 할당받은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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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연필로 쓴 작은 글씨>이다
마이크로그램이라는 제목을 풀어 옮긴 것인데,
공책이나 흰 종이 편지지 같은 글씨 쓰는 데 사용된 정상적인 매체가 아니라, 주변에서 구한 포장지나 인쇄된 종이 뒷면의 여백이 있는 곳이라면 닥치는 대로 거기에 연필로 아주 작은 세필의 글씨들로서 암호 같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적었다는 뜻이다.
작은 글씨로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곧 세계(자아의 내면)가 그 좁은 한계적 공간 속에 갇혀 있고, 더 쓸 공간이 부족하지 않을까란 예감… 혹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암담한-비극적 운명을 미리 상정하고, 작은 글씨로 최대한 많이 자신을 그 안에 풀어놓아야 했음을 의미한다.
작은 손가락이 충분히 닳아진 연필의 빗면을 잘 골라가며 글씨를 새기고 작가는 최소한의 동작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기존에 말하지 못했던 것들, 또는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와 격언과 상상들과 서사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단어들의 순환을 고스란히 적어냈다는 뜻이다.
가만히 한 곳에 앉아서 작디작은 절단된 종이 뒷면에 무언가를 적는 행위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스스로 유폐된 죄인의 명징한 한 순간처럼 사진 찍히게 되지 않을까?
최대한의 집중을 통해 픽션의 세계 속에서 주인의 지위를 누리며 자신들의 단어와 함께 짧은 가상을 휘젓는 황홀함과 안온함, 자기기만적 행위이고 자기 파괴적이지만 이 충족된 시간, 작은 공간을 빼곡히 메우는 글자들의 홍수를 스스로 일으킬 수 있다는 만족감이 이 글들에서 풀려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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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발저의 글들은 꽤나 불온하고 그리고 꽤나 위험하다
이것을 정신병의 일종으로 보는 시선도, 유일무의 한 예술적 추구의 한 방향으로 읽혀도 곤란하다.
그게 아니라 이것은 한 예술가가 인생의 특정 시점에서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보냄의 방식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글쓰기, 마치 귓속의 악마가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그것을 받아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해도, 또는
세상에 대한 복수의 글쓰기를 암호 같은 형식으로 행한 것이라 풀이된다고 해도, 결국은 원초적인 글쓰기였다는 것에 의미를 가진다.
그는 그렇게밖에 쓰지 못할 글들을 그렇게 남긴 것이란 이야기다.
4
평생 인정받지 못했던 작가들은 항상 후세의 음험한 신비화에 직면할 것이다.
이미 죽은 존재, 살아 있을 때는 아무런 인정도 찬사도 받지 못한 그들의 모습은 늘 보고 싶은 대로, 훌륭한 산문을 남긴 작가로, 뭔가 불우한 삶을 최대한 보상해 준다는 의미로 후작업이 이뤄진다.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고 나서도 비극적인 국면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해서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이들의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져갔고, 그것이 어떤 판단을 받고 있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정말 작품이 그럴듯하게 적힌 것인지, 조금은 냉정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발저를 마치 처음 듣는 이름처럼 무시해야 한다.
그를 아무 편견도 없는 상태로 놔두고 아주 천천히 우연처럼 기회가 올 때 시간이 날 때 비로소 알아가면 된다.
그렇다면 이 <연필로 쓰인 작은 글씨>는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야 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