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r 18. 2019

우리를 집어삼킨 시간들을 어떻게 먹을 것이냐의 문제

하마구치 류스케 <아사코>

 

  

  쌍둥이를 주제로 한 <고초 시게오 사진전>에 간 아사코는 바쿠라는 매혹적인 사내와 마주친다. 강물 앞에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묻고 있고 동시에 두 사람 앞에 폭죽이 터진다. 그리곤 거짓말처럼 둘은 첫 만남에 키스를 하고 연인이 된다. 6개월이 흐르고 바쿠는 거짓말처럼 이유 없이 자취를 감춘다. 2년이 지나 아사코는 고향인 오사카를 떠나 도쿄에 정착하는데 바쿠와 똑같은 얼굴을 한 료헤이를 만나 당혹스럽다. 아사코의 태도에 묘한 감정을 느낀 료헤이는 계속해서 아사코를 의식하고 이내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하지만 아사코는 료헤이를 피하기 바쁘다.  

 

 그 무렵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게 된다. 피난 중인 료헤이와 아사코는 우연히 마주친다. 이를 계기로 둘은  연인이 되기로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5년을 함께 지내면서 결혼을 약속하던 때, 사라졌던 바쿠가 아사코 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아사코는 혼란스럽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아사코>가 계속 머릿속에 상영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아사코>를 보고 지난 연애의 기억들이 다시금 살아나서 현재로 찾아온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련다. 어쩌면 나도 영화 속 인물들만큼, 혹은 훨씬  비겁했을 것이며 선택의 기로에 항상 도망쳐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사코처럼 불확실한 상황에 뛰어들 정도로 용감하지 못했단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


 그래서 <아사코>라는 영화의 세계를 통과하고 난 뒤에서야 나는 삶이라는 건 언제나 선택과 배제의 문제이며 배제가 우선되야만 자신이 택한 것에 충실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그것이 책임과 윤리 일지 모른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덕분에 영화에 몸을 던질 수 있는 계기를 <아사코>로 마련했다.


  결국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아사코>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문장이다. 이 영화에선 사랑은 거짓말처럼 시작하다 끝나고 또다시 재회한다. 영화의 30분을 남겨두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사랑에 몸을 던지는 아사코의 여정은 분명 거짓말 같은 여운을 안겨준다. 그러나 어디 사랑만이 그러했을까. 아니 <아사코>를 보면 고작 사랑때문에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첫 공연을 고대하던 배우는 지진으로 공연이 취소된다., 재난으로 인해 가까운 사람을 잃은 누군가는 그저 주저앉아 있는데 또 누군가는 앉아있는 그에게 서스럼없ㄷ 손수건을 건넨다. 누구보다 온몸으로 젊음을 표현했던 청년은 불과 몇 년 만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다. 그러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정말로 있을 수 없다는 게 <아사코>의 요지다. 그렇다면 만약 그 재난 같은 시간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계에 응답할 것인가.


  아마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바쿠에게 이별을 고하고 돌아온 아사코. 그를 절대 신뢰할 수 없게 된 료헤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강물을 바라보고 한쪽은 "더럽다"라고 이야기하고 한 사람은 "그럼에도 아름답다"라고 이야기한다. 흐르는 강물을 차분히 응시한 채로 카메라를 거두는 영화의 태도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어쩌면 재난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하는 것보단  불신과 불안, 고통을 지닌 채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삶이자 운동이며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이 신비로운 까닭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연인 사이가 된 료헤이와 아사코가 해마다 센다이에 들러 도호쿠 재건 축제에 자원봉사를 하러 가는 지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재난 속에 기적처럼 이뤄진 사랑에 관한 보답으로만 저 행위들을 납득하려 하겠지만, 그보단 영화가 저 시간들을 들여다보는 이유가 어쩌면 영화 <아사코>의 비밀스러운 지점으로 들어갈 수 있는 틈새로 읽힌다.


 왜 두 사람은, 아니 영화는 센다이로 향할 수밖에 없는가. <아사코>에 자동차, 오토바이를 탄 인물들, 혹은 영화 마지막 료헤이와 아사코가 벌이는 추격씬만 놓고 보더라도 이 장면은 모두 운동하는 주체가 자신이 위치한 장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듯한 방식으로 찍혀있다. 다시 말해 유독 센다이로 향하는 장면만은 두 사람이 탄 차가 마치 귀환하는 듯한 뉘앙스를 가득 품고 있다. 부감으로 찍힌 시선은 마치 센다이라는 장소가 두 사람의 귀환을 환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부여함과 동시에 재난의 바깥에 위치해 있던 료헤이와 아사코를 타자의 위치에 놓는다. 여기서 영화의 시선은 센다이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으로 뒤바뀐다. 그러니까 료헤이와 아사코가 이곳에 찾아오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방사능과 지진이 집어삼킨 이 죽음의 땅으로 당신은 돌아올 수 있느냐의 문제이니 말이다.



 아사코는 어떻게 굴을 먹는지도 중요한 포인트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그 자체로 영화의 선택과 배제를 가장 눈여겨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어떤 음식을 먹는지부터 그 음식을 먹는 장면을 카메라가 지켜본다는 점 또한  식사가 한 작품의 주제론적인 체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아마도 연인이 된 이후로 매년 센다이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사코는 5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센다이의 음식을 받아들인다. 이 쇼트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면서 기묘하다. 카메라가 센다이 주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정면으로 응시함과 동시에, 날것 그대로의 굴을 클로즈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사코가 굴을 먹는데 머뭇거리는 이유를 우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살아있는 해산물이라지만 저것은 분명 오염된 바다로부터 파생되어 눈앞에 현전 해 있기 때문이다. 그 불편함은 관객의 눈앞에 열실이 그려져 있다. 그럼에도 아사코는 끝내 그것을 먹고 "맛있어요"라는 말을 내뱉는다. "맛있다"라는 말에서 전해지는 감각은 단순히 "맛있다"라는 청각적 기호와 미소를 머금은 아사코의 표정으로만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어떤 비밀스러운 감동이 있다. 단순히 아사코의 진심 이전에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태도와 연관돼 있어 보인다.


 초조한 표정으로 아사코를 지켜보던 주민들, 이 물음에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응답한 아사코. 같은 일본일지라도 재난의 외부에 위치해있던 자와 직접 그 시간들을 오롯이 견뎌온 사람 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 이는 단순히 먹는다와 먹지 않는다라는 선택과 배제의 문제뿐이 아니다. 아사코라는 먹는 주체가 생생한 굴을 먹음으로써 센다이라는 공간이 여전히 살아있는 장소다 라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 지점이 <아사코>의 이야기를 지탱하고 그것이 끝내 보는 나의 마음을 여전히 뒤흔들고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는 어떻게 삶을 버티게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