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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r 13. 2019

영화는 어떻게 삶을 버티게 할까

<작은 빛>




 뇌수술을 받아야 하는 진무는 휴가차 어머니의 집에 방문한다. 수술을 하면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진무는 캠코더를 들어 가족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한다. 으레 이런 줄거리를 지닌 독립영화들은 비극을 전시하는 데 몰두할 거란 오해를 잠시 하기도 했었지만, 진무의 캠코더에 담긴 vhs화면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그런 의심은 접어뒀다.


 정지상태로 영화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과 별개로 초점을 잃고 흔들림을 안고 피사체에 다가가는 vhs화면은 그 자체로 이질적이면서 영화가 살아있다는 인상을 던져줬다. 영화를 보는 일방적인 시선과 영화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캠코더의 시선이 만나 탄생한 리듬이 기묘했다.

 <작은 빛> 속 캠코더는 영화 속 이야기에서도 단절된 가족들을 이어주는 매개다. 서로에게 무관심했던 가족들은 진무가 캠코더를 들고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스스로 담아두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낸다. 진무의 형은 어린 시절 몰두했던 춤을 선보이고 누나는 작가를 포기하게 된 계기를 고백한다. 이 기록된 영상들이 서로에게 보이는 순간 단절돼 보였던 가족 간의 끈이 다시금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지점들 뿐 아니라 <작은 빛>에 동요됐던 이유는 영화가 자신에게 던져진 윤리적 질문 앞에 도망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영화 말미 마침내 어머니가 폭력적인 가부장이었던 아버지의 역사를 고발하는 장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탄 짓무를 따라가지 않고 다시 어머니의 뒤를 쫓아간 영화의 서사적 선택, 아버지의 산소를 옮기던 중 미라가 된 아버지의 시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영화의 결단. 보여주지 않아야만 윤리적이라 믿는 일종의 타협을 거부하고 저 이미지를 대면해야만 한다는 연출자의 태도를 엿본 기분이었다.


 그러니 이 영화가 끝내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고 포용하는 결말조차 나는 긍정할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 앞에 굴복한 게 아니다. 자신의 결여와 역사를 끌어안고 살아가겠다는 태도야말로 그 자체로 영화로 삶을 견딜 수 있는 작은 빛의 현현이다.




추가로
Gv를 하면서 알게 됐지만 관객석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계셨던 분이 실제 조민재 감독의 어머니 셨다는 사실도 이 영화를 각별하게 느끼게 된 이유 같다. 그게 우연이었던 착각이었건 나는 영화가 필요한 이유와 사랑을 이날 조금이나마 확인했으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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