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r 12. 2019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어

<국경의 왕>

 

 

은경(이유진)을 만나기 위해 폴란드로 온 유진(김새벽)에게 계속해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위협적인 인상을 한 두 한국남자 세르게이와 혁기가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다니는 듯하고, 선배 현철은 '포켓몬 고'를 하며 믿을 수 없는 말들을 계속한다. 스스로를 조선인이라 하는 꽃집 주인은 유진에게 별안간 이상한 일들이 이어질 것이라 예언한다. 


한편 동철(조현철)은 혁기의 부탁을 받아 폴란드로 오자마자 안약 통에 들어있는 마약을 운반하는 일을 맡게돼 당황스러워한다. 한국을 떠나 도착한 두 사람에게 황량한 이국에서 어찌 된 영문인지 한국인들과의 악연이나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아참 둘은 모두 영화를 전공했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은 이 정도에 그쳐야 할 것 같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각 단락이 끝날 때마다 인물들의 이름과 관계, 배경과 시간이 모두 조금씩 엇갈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영화가 서사의 관계성을 거부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 국경의 왕>은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이 영화가 지닌 어떤 정서를 눈여겨봐야 한다. 우선 <국경의 왕>은 소름 끼칠 정도로 이국적인 기운이 들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난 이 영화가 한국에서 찍었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유럽의 풍경이 더 이상 일상의 탈출구나 낭만을 지닌 풍경, 혹은 낯선 이미지를 상실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국경의 왕> 은 다른 나라의 풍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돼버린 기이한 시대를 마주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 기이함 때문인지 이 영화에선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연결하는 시도는 모두 무력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어떤 기운이 막과 막 사이를 이어주고 있다는 확신만은 떨칠 수 없다. 그 감정은 불신과 죽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가까운 기운이다. 영화가 동철의 입을 빌려"마음이 중요하지"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질문해 볼 지점이 생긴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이야기와 이미지를 믿을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믿고 영화를 봐야 합니까.


 이 영화가 전해주는 공포감은 아무래도 세르게이로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머리를 넘기고 아무렇게나 침을 뱉고, 주거침입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도하는 오인된 남성성과 폭력성이 가득한 인물. 잔뜩 찡그린 표정과 낮은 목소리로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고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자. 유진은 외국인인 척하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하면서 거리를 두려 하지만, 세르게이는 유진이 하는 외국어를 전부 구사하면서 끈질기게 따라온다.


세르게이를 한국이나 한국 남자라는 도식으로 치환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단 인물이 떠나온 장소로부터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바로 그  공포가 국경을 넘어 따라왔다는 데 주목할 수 있다. 세르게이의 얼굴을 마주 볼 때 느껴졌던 두려운 기운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내 들러붙어 있는 기분이다.


 유럽 속의 작은 한국, 혹은 한국이 돼버린 유럽의 방. 영화 첫 장면, 폴란드에 도착한 유진은 길을 잃는다. 그리고선  "모르겠다"라는 말을 내뱉고 곧장 카메라가 보고 있는 정면을 향해 나간다. 프레임 밖으로 나가려는 일종의 야심 찬 시도이면서 인물의 생동감과 활력이 더해진다. 이때의 유진은 하나의 출구로 진입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막이 진행될수록 그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낙담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선 끝없이 걷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스크린의 안 속으로 점점 멀어져 간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두고 도식화할 수 있다면, 유진이 짓는 마지막 얼굴은 출구를 찾아 도착한 장소조차 또 다른 미로로 변해버린 것을 마주한 자의 자포자기처럼 보인다.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영화를 보고 느낀 개인적인 비약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 중엔 현실의 이미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영화를 선택하는 사람이 종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영화조차 더 이상 출구가 될 수 없다고 느껴질 시기가 온다면 어디로 도피해야 할까. <국경의 왕>이 무서운 이유는 이것이 임정환 감독의 의도였건 아니건 간에, 이 불길한 기운을 영화로부터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좇아 영화로 도피하려 해도 그곳은 천국이 아니다. 영화는 곧 세계이고 착각이면서 동시에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에서의 사랑이 자살행위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