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Apr 01. 2019

아녜스 바르다를 추모하며

사랑을 연출한 마지막 예술가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의 부고가 있기 며칠 전, 술자리에 '아녜스 바르다가 정말 좋은 영화감독일까' 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가 "감정적으로 울림을 주긴 하지만 어쩔 땐 호들갑을 떨거나 조금 요란스러운 면이 있다" 라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잠시 발끈해 얼른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어디까지나 기호의 문제일 뿐 아녜스 바르다를 좋아하는 사람 중엔 바로 그 요란스러움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으니까.


 아녜스 바르다에겐 기나긴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천진함과 저돌성, 방랑자의 태도가 존재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점 때문에 아녜스 바르다가 좋았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실감하지만, 그건 세상을 향해 정말로 지키기 힘든 순진함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건 아녜스 바르다가 아이와 같은 마음을 시간으로부터 지켜온 위대한 여성이자 사람이란 말이기도 하다. 이건 단순히 모성과 같은 단어로 치환할 수 없다.  


클린트 이스트 우드(좌) 아네스 바르다와 JR(우)


 혹자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우리 시대의 마지막 어른이라 이야기한다. 영화 안에 자신의 과오를 드러냄으로써 반성하려는 한 사람의 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키려는 진짜 어른으로써의 삶.


 만약 그들의 말이 맞다면 나는 아녜스 바르다가 이스트 우드와 다른 결을 지닌 우리 시대 마지막 어른이란 입장이다. 순수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겁게 느껴지지만 아녜스 바르다는 정말로 순수한 아이와 같은 태도를 마지막까지 지켜낸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그건 아녜스 바르다의 마음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르다 그 자신이 자신의 영화적 형식으로 증명해낸 삶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지 않아야겠다. 아녜스 바르다만큼 자기애를 이토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표현한 예술가는 드물다. 나는 아녜스 바르다를 어떤 면에선 굉장한 나르시시스트로 여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남과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다. 이스트 우드가 자기혐오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사랑하려고 시도하는 나르시시스트라면, 반대로 아녜스 바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면서 또한 스스로를 귀엽게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아녜스 바르다에게 스스로를 귀엽게 여겨야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배웠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시간 앞에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태도라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낭트의 자코>

 자신을 사랑스럽게 연출하는 삶. 혹은 사랑 그 자체를 연출할 줄 알던 사람. 그건 아녜스 바르다가 무언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아낸 데서 근거한다. 자크 드미의 영화 세계와 유년을 매개한 한 편의 동화 <낭트의 자코>. 뿐만 아니라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과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과 같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에서 조차 그는 자크 드미에 관한 그리움을 끊임없이 영화 속에 불러 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자크 드미가 아니라, 그를 그리워하는 아녜스 바르다의 표정과 말들.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이다. 그는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숭고해질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의심도 했다. 누군가를 저토록 애정 하는 지점으로부터 조금 고집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가 자신의 영화 안에 자크 드미의 영화들을 끊임없이 불러오면서 <쉘부르의 우산>과 <로슈포르의 숙녀들>의 장면들이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고 그게 보는 이로 하여금 큰 흔들림으로 다가온 순간, 아녜스 바르다가 자신이 실행하고 있는 사랑을 자신만의 형식으로 일궈냄으로써 보는 이를 설득시켰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아녜스 바르다는 사랑을 연출하는 데 있어 대가였던 사람인 셈이다.



 

 그래서 슬프다. 아녜스 바르다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가장 절망스러웠던 건 그가 떠나서가 아니라, 그를 대신해 세상을 사랑이란 감정으로 바라볼 사람, 혹은 연출할 사람이 우리 곁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비참으로 가득하다. 아녜스 바르다는 그 비참 속에 언제나 한줄기 빛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부터 얻은 즐거움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게끔 바라보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떠난다는 것은 생에 큰 비극인 것 같다. 하지만 아녜스 바르다의 말대로 죽음 또한 나이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시간을 받아들여야 하며 자연스럽게 흐릿하게 사라져 가는 광경들 역시 즐겁게 바라봐야 한다. 그의 죽음에 오랫동안 슬퍼하고 힘들어하지 않으려 한다. 힘들어하지 말자. 감자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를 집어삼킨 시간들을 어떻게 먹을 것이냐의 문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